84화 특이점 (1)
아그네스는 오전 시간을 몽땅 서류 검토로 보내야 했다. 수행 사업비 등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항목을 넘겨도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만큼 폴링이 만든 보고서는 정밀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바로 들 정도로.
‘역시 켈세타의 사무관님이셔! 정말 대단해. 나도 언젠가 이렇게 보고서를 잘 쓸 수 있을까?’
막연한 희망이었지만, 아그네스는 손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서류를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기회다.
그때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준이 창고로 들어왔다. 손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왕진 다녀온다더니 여기에 있었던 거니?”
“다녀왔어요. 오자마자 뭐 좀 보느라 여기에 있었고요.”
“뭔데?”
“폴링 씨가 광산 개발 관련 서류를 주셨어요. 검토를 해 달라고 하셔서 한번 살펴보고 있었어요.”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군.’
견습생 시절이었다면 당장 달려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러지 않고 일단 스스로 내용을 검토했다.
대견했다. 그런 마음에 준은 자신이 마시려던 차를 아그네스에게 양보해 주었다.
“앗. 감사합니다.”
“카누 씨의 상태는 어때?”
“약이 아주 잘 듣고 있는 것 같아요. 날이 갈수록 컨디션이 좋아지고 계세요.”
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의 전이를 막기 위해 좋은 약재를 모조리 쏟아 넣었지만, 약이라는 것도 체질에 따라 잘 듣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경과를 살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좋은 성과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모레쯤 스캐너 검사를 다시 해 보자. 암 조직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예. 그럼 내일 왕진 갈 때 말씀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책상에 널려 있는 광산 개발 관련 서류를 집었다. 아그네스는 준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준은 빠르고 정확하게 서류를 모두 검토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폴링은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있는 훌륭한 인재였다.
“서류는 다 읽어 봤나?”
“읽긴 했는데 반도 이해를 못 했어요. 숫자도 많고 사업에 대한 건 전혀 몰라서요.”
“그럼 엘누아르 서기관의 의견을 좀 들어 보도록 할까?”
“어, 그게…….”
아그네스가 말을 더듬으며 눈을 굴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준은 웃음이 나왔다. 썩 재미있었다.
“질문을 좀 바꾸지. 이 보고서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나?”
“이상한 점이요?”
“현실성이 없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라든지.”
질문을 더 쉬운 것으로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보고서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라고 한 것이니까.
하지만 의외로 아그네스의 입이 쉽게 열렸다.
“하나 있긴 했어요.”
“뭐지?”
“보면서 계속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가 하려는 게 광산 개발 사업이잖아요? 그럼 광맥을 찾는 작업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없었어요. 탐사에 필요한 예산도 배정되어 있지 않고요. 그래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광맥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상황 같다고 할까요?”
“멋진 추론이다.”
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이 보고서의 문제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금맥을 이미 찾았다는 사실은 일부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였다. 백작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탐사비에 예산을 책정하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을 폴링 씨에게 이야기하도록 해. 그럼 바로 알아들을 거다.”
“혹시 건방지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나이도 한참 어린데.”
준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일은 나이로 하는 게 아니다. 지혜와 열정으로 하는 거지. 깨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모른다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워하면 모를까.”
“폴링 씨는 깨어 있는 사람인가요?”
“내가 보기엔 그래.”
“알았어요. 아무튼 부딪쳐 보라는 말씀이죠?”
“그래.”
자신감을 회복한 아그네스는 씩씩하게 다시 서류를 검토했다. 준은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곳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누아에서 듣기 어려운 소리였지만, 이제는 제법 자주 들린다. 엘누아르 가문이 세워진 이후 기사 서임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준은 말을 보급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기사단장 바이런을 포함해 기사단원들에게 전투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했다.
이제 기사로 승격한 자경단원들은 헐거운 가죽갑옷 대신 잘 짜인 플레이트 메일을 걸쳤다. 근사한 검도 하나씩 받았다.
거기에 하룬은 특별히 망토를 하나 더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물은 아니었다. 한창 성장 중인 지금 성물을 늘리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말소리를 낸 건 하룬이었다. 그는 사뿐히 말에서 내려섰다.
“훈련 다녀오나?”
“네! 무구를 바꿔서 적응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빡세요. 단장님 아주 작정을 하셨더라고요. 농담이 아니라 유서라도 미리 써야 할 판입니다.”
꽤 힘든 훈련이라는 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룬의 얼굴과 온몸이 자잘한 상처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룬의 표정은 쾌활했다.
그가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날씨가 추울 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신체 활동이 둔해지니까. 훈련 전에 준비 운동도 충분히 해야 부상을 입지 않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부상을 입어 드러누워 버리면 큰일 나죠. 뒤처지니까요.”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군.”
기사가 된 것은 하룬만이 아니었다. 준은 일부러 몇몇 경쟁자들을 선정했고, 그 효과가 톡톡히 발휘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친하다고는 하지만 기사가 된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다. 지위가 굳어지기 전에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입증해서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다.
“근데, 주군. 재미있는 소문이 하나 돌던데요?”
주군이라는 표현이 썩 듣기 좋진 않았지만, 하룬에게만 허락했다. 기사단의 기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소문? 뭔데?”
“왕실에서 초청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마을에 소문 쫙 퍼졌어요. 사실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초청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왕실의 초청을 받은 건 아니야. 왕립학술원에서 초청을 받은 거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왕립학술원도 왕실의 조직이니까.”
“엄연히 다르다. 왕립학술원장의 우두머리는 후작급 귀족이니까. 반면 왕실은 국왕 폐하지.”
그제야 하룬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게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 언제 왕도로 출발하실 겁니까?”
“안 갈 생각인데?”
“그게 무슨!”
하룬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요? 이제 루치아 선생님도 완전히 자리를 잡으셨는데 진료소는 맡겨 두고 다녀오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카누 씨와 약속했거든. 내가 어떻게든 낫게 해 주겠다고. 그런데 별일 아닌 일로 오래도록 마을을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 참. 그랬었죠.”
웬일로 하룬이 쉽게 납득했다. 마을 토박이라면 카누의 일을 누구도 쉽게 보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 카누 아저씨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더라고요.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근데 암영초는 언제쯤 구해지는 겁니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최근 볼카누스의 레어에 들르지 않았다. 게다가 볼카누스도 신경이 쓰였는지 약초 채집을 더 이상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집을 비우기가 신경 쓰이는 것이다.
카이엔이 치료를 받기 위해 하루에 한 번 오긴 하지만, 일이 진척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볼카누스와 다르게 호들갑을 떠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준이 주도한 술자리가 제법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어서 좋은 소식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준은 하룬과 함께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 * *
카이엔은 늘 그렇듯 던전 코어에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던전 안에 퍼져 있는 암흑 에너지를 측정하고 있었다.
“어이! 패잔병!”
“…….”
카이엔이 한숨을 내쉬며 코어에서 손을 뗐다. 볼카누스가 소리를 지른 덕에 측정하던 자료가 싹 날아갔다. 용언의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라고 했던 충고는 잊어버렸나? 자신이 용족임을 망각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늘.”
“허허허! 그게 뭐 하루아침에 고쳐지나? 다시 하면 되지 뭐 그렇게 까칠해?”
볼카누스는 껄껄 웃으며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일부러 그런 것 같지만, 지금은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암흑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카이엔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손에 흑마력이 뭉쳐지며 던전으로 이어진 코어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던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이 움푹 꺼지기도 했고, 벽이 허물어지기도 했다. 마치 거대한 손이 던전을 쥐고 뒤트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던전 내부가 대격변을 맞이하고 있던 그 순간 카이엔이 눈을 번쩍 떴다.
“됐다!”
카이엔의 손에서 흑마력이 거둬졌다. 조금 무리를 했다. 숨이 가쁘고 복부가 욱신거렸지만, 그 이상의 결과를 얻어 냈다.
드디어 암흑 에너지가 한곳으로 모이는 장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드디어 암영초를 재배할 터전을 마련했다.”
이 정도라면 준도 잔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엔은 전투에서 이긴 것 이상의 성취감을 느꼈다.
“뭐야. 뭔가 된 거냐?”
볼카누스가 나타났다.
그러나 카이엔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흑마력을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내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운용하는 것이 좋았다.
그 모습을 보며 볼카누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간덩이가 큰 놈이란 말이지. 이렇게 적이 눈앞에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마나를 돌리다니.”
볼카누스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과연 마계의 대공다운 배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볼카누스는 카이엔이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후 카이엔이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암영초 어쩌구 하더만.”
“던전의 균형을 모두 맞췄다. 이제 암영초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지.”
“그래? 그럼 어서 돌팔이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지 뭐 하고 있어?”
카이엔이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싹을 틔우고 나서가 진짜 시작이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직접 던전에 들어가 작업을 해야 한다. 오늘은 진료소에 다녀온 이후에 작업을 해야 할 것 같군. 내상이 좀 있었어. 치료를 받아야 할 거 같다.”
“내상이? 얼마나?”
볼카누스가 걱정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카이엔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웬일로 그대가 내 걱정을?”
“당연히 걱정되지. 18주 뒤에 박살을 내야 하는데 늦어지면 곤란하잖아?”
“후후후. 한결같아서 마음에 든다.”
“꺼져라. 사내새끼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가만히 볼카누스를 바라보던 카이엔이 말했다.
“재미있는 거 한번 해 보지 않겠나?”
“말 참 소름 돋게 치네. 꺼지라고 했잖아 방금. 남자한테 관심 없다고.”
“아그네스 양을 위한 일이다.”
볼카누스는 슬슬 짜증이 났다. 이제 틈만 나면 카이엔은 아그네스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양’이라는 의존명사까지 붙여 가며.
더욱 짜증이 나는 건 그럴 때마다 카이엔의 흐름에 따르게 된다는 현실이었다.
“얘기는 한번 들어주지.”
“용족의 힘을 암영초 재배에 이용해 보려고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무척 특별한 암영초가 탄생할 거다.”
“뭐?”
“자세한 건 진료소에 다녀와서 설명해 주지.”
씨익 미소를 지은 카이엔이 옷깃을 바로 하고 레어를 나섰다. 볼카누스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 궁금증이 들었다.
‘망할 놈의 늙은이 같으니라고! 패잔병 주제에 감히 나를 농락해? 크흠…… 그런데 궁금하긴 하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렇게 분을 삭여 가며 카이엔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