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금 징수 (2)
“이런 시펄! 던전을 왜 허락도 없이 확장시키는 거야! 이 노망난 늙은이야!”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볼카누스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긴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카이엔이 던전의 규모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코어를 조종하던 카이엔은 차분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시시각각 던전의 코어가 색을 바꿔 가며 반응했다. 암흑 에너지가 새롭게 추가된 공간으로 빠르게 흘러가 그곳을 가득 메웠다.
“노망난 늙은이라니. 그대에겐 명예와 체통이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군.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곧 자신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것이기도 하다네.”
“지금 날 가르치려는 거냐?”
카이엔은 눈을 감고 던전의 코어를 조작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암흑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 던전을 넓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이곳은 차원의 틈. 무한에 가까운 공간이 있는 곳인데 말이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말을 좀 먼저 하면 어디 덧나냐고. 어?”
“아무리 생각해도 시빗거리가 떨어진 거 같은데.”
“마계의 브레인이라는 놈이 핵심을 못 잡네. 야. 입장 바꿔 놓고 생각을 해 봐. 어? 네가 살던 마계 저택에 내가 레어 깔면 기분 좋냐? 거기에 개집까지 하나 넣고?”
“흐음, 그건 매우 불쾌하지.”
카이엔은 단호하게 인상을 굳혔다. 말도 안 된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러니 볼카누스는 더욱 마음만 답답해졌다.
이렇게 쉽게 비유를 해줘도 알아먹지를 못하다니.
“그러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라는 거야. 엉?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러잖아. 그냥 레어도 아니고 안식처 중심에 코어를 박았잖아! 내가 큰 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어? 서로 예민한 일인데 미리 상의 좀 하면 어디 덧나냐고? 시펄. 내가 진짜 마족 새끼한테 상의라는 단어를 쓸 날이 올 줄이야.”
“쯧. 용족의 로드가 이리도 옹졸하다니. 애석한 일이야. 이런 자들에게 우리 마족이 패배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너 보니까 딱 견적 나온다, 이 새끼야.”
참다못한 볼카누스가 카이엔의 멱살을 잡으려던 그때, 준이 절묘하게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충돌을 막았다.
“응? 뭐야. 돌팔이. 언제 왔어?”
“괜히 도발에 말려들지 마라. 마계의 브레인이 반대 입장도 생각 못 할 거 같나?”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널 도발하고 있다는 얘기지.”
준이 명쾌하게 맥을 짚어주자 볼카누스는 더욱 화를 냈다. 코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준은 이번엔 카이엔에게 한소리 했다.
“너도 적당히 해라. 기왕 빚을 갚을 거면 조용히 갚아도 되잖아?”
“노력해 보지.”
“노력은 필요 없어. 잘해라.”
“호오. 흥미로운 일이군. 그대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러니까 잘하라고.”
준은 두 사람을 적당히 떨어트렸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볼카누스의 성정상 만약 충돌했다면 가까스로 만든 던전의 코어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았을 터다.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 던전은 카이엔이 자신의 마력을 쥐어짜서 만들었다. 내상이 심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무하게 날릴 만한 던전이 아닌 것이다.
“너희들이 나중에 치고받고 싸워도 아무런 간섭 안 할 테니까 제발 암영초는 어떻게든 잘 좀 만들어 봐.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가?”
“당연히 어려운 부탁이지.”
“그렇지.”
처음으로 용족과 마족이 합심했다.
그렇다 보니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준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이엔. 잠시 던전을 둘러봐도 되나?”
“얼마든지.”
준은 던전의 코어를 통해 던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습도도 적당했고, 토양의 질도 꽤 좋았다.
생장이 빠른 약초들은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약초를 다양하게 재배하려면 여기에 몬스터를 풀면 된다. 생태계가 복잡할수록 재배할 수 있는 약초들이 늘어난다.
“과연 마계의 대공다운 솜씨군. 상당히 정교한 던전이야. 마르다에 만들었던 던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데?”
“그때는 정말 급하게 만들었으니까. 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
“그렇군.”
준은 다시 던전 내부를 관찰했다.
트랩이나 마물은 없었지만 던전에 흐르는 암흑 에너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준은 이와 비슷한 환경을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마계.
카이엔은 고작 던전 하나로 마계의 생태계를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볼카누스의 레어라는 향신료가 더해지긴 했지만.
“파종은 필요 없나?”
“필요 없다. 암영초의 근원은 암흑 에너지 그 자체니까. 이제 암흑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한 장소에 모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된다.”
“말만 그렇게 쉬운 거지?”
“아무래도 그렇지. 마나가 정제된 기운이라면 암흑 에너지는 야생 그 자체니까.”
준이 카이엔만 상대하자 왠지 소외감을 느낀 볼카누스가 은근슬쩍 그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두 존재의 대화가 끝나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냐? 환자 때문에 늘 바쁘다던 놈이.”
“너희들에게 줄 선물이 있어서.”
“선물?”
볼카누스야 뭘 주고받는 걸 좋아했으니 그렇다 쳐도, 던전 코어를 컨트롤하고 있던 카이엔조차 고개를 돌려 준을 주목했다.
준이 가방을 열고 서류 두 장을 꺼냈다. 그리고 각각 한 장씩을 두 초월자에게 나눠주었다.
“이게 뭐야? 세금? 허!”
그것은 엘누아르 가문의 서기관의 이름으로 발행된 세금 고지서였다. 아그네스의 이름이 맨 하단에 적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장까지 찍혀 있었는데, 그 인장은 가신이 된 기념으로 명공 펜터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원래 세금은 특별한 고지 없이 영지민들이 정해진 기간에 납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두 존재들은 예외라 고지서를 발행하게 했다. 사실 아그네스에게 납세의 원리와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긴 하지만.
“이제 이 영지는 내 소유다. 마땅히 영지에 머무는 자들에게 세금을 걷어야겠지. 너희들은 허가 없이 내 영지를 점유하고 있지만 특별히 봐 주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대가를 치러라.”
“허……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세금을 내라는 거지? 이 위대한 드래곤 로드에게?”
볼카누스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공물을 받아온 입장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세금을 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좋아. 그래. 다 양보한다 치자. 그런데 엘누아르의 영주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세금을 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난 오히려 누아 마을을 돕고 있다고.”
“누아 마을 진료소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잖아. 너보다 더 큰 혜택을 누린 환자가 또 있던가?”
그렇게 대꾸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치명적인 내상에서 거의 회복한 볼카누스였다. 이건 그 어떤 대가로도 지불할 수 없는 기적이라 할 만했다.
볼카누스가 잔머리를 굴렸다.
“그거, 뭐냐. 그 비늘 많이 뽑아줬잖아?”
“많이? 드래곤은 덩치에 비해 셈이 짜네. 정확히 네 개다.”
“그 정도면 많지! 성물을 하나 만들고도 남겠다!”
“수백 개는 더 뽑아도 되는 상황이었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치료까지 해 주고 특별한 물건까지 줬는데. 안 그래?”
그건 맞는 말이었다. 절대악의 정수까지 얻었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애꿎은 세금 고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볼카누스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아그네스의 이름이 여기에 적혀 있는 거냐?”
“우리 가문의 서기관으로 취임했다. 이제 시골 마을 소녀가 아니야. 어엿한 귀족 가문의 가신이지.”
“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네놈의 가신이라는 게 유일한 결점이긴 하지만. 으음, 우리 아그네스가 세금을 내라고 하니까 내야겠지? 어디 보자…….”
준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단순할 줄이야.
볼카누스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투명하게 반짝이는 돌을 꺼냈다. 엄지손가락만 한 다이아몬드였다. 그것을 준에게 던졌다.
“이번 달 세금이다. 어때. 그걸로 충분한가?”
“충분하다 못해 너무 많은데?”
“이 알거지 놈 것까지 포함한 거야. 잔돈은 넣어 둬. 영지 발전 기금으로 써라.”
“고맙군.”
준은 거절하지 않고 다이아몬드를 챙겼다. 로드급 드래곤이 소유하고 있는 다이아몬드니 아마 최상급의 물건일 것이다.
뭔가 아쉬웠는지 볼카누스가 준의 양손을 살폈다.
“근데 오늘은 빈손으로 왔냐?”
“하하하. 누가 먹성 좋은 드래곤 아니랄까 봐.”
준은 아공간 창고에서 족발과 술병을 잔뜩 꺼냈다. 족발은 아그네스가 직접 만든 것이었는데 연기를 풀풀 내며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볼카누스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예전에 준이 만든 족발을 한번 맛본 이후로 잠자리에만 누우면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드래곤 체면이 있어 만들어 달라고 하기가 뭐해 참고 있었는데,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이번엔 아그네스가 만들었다. 다들 암영초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것 같아서 준비해 왔지. 이봐, 카이엔. 잠시 손을 뗄 수 있나?”
“한두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
“그럼 한잔하자고. 이렇게 셋이 모여서 술 한잔 기울이는 것도 꽤 역사적인 일 아닌가? 인간, 용족, 마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거니까.”
그렇게 세 사람은 자리에 둘러앉아 가볍게 한잔 걸쳤다.
깐깐하고 고지식했던 카이엔은 족발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곤 연신 감탄했다. 이런 건 마계에서 결코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호오. 정말 흥미로운 맛이군.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겠어.”
카이엔의 솔직한 한마디였다.
* * *
일주일에 한 번, 누아 마을의 진료소는 문을 닫는다.
정식 진료가 없을 뿐이지 응급 환자는 받는다. 그래도 환자들이 거의 오는 일이 없기 때문에 직원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일이 온 것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옛날 일이었다. 준이 작위를 받고 엘누아르 영지를 봉토로 받으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까.
특히 진료소의 세 제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진료소 일은 일대로, 그리고 영지 일은 그것대로 몰려들었다.
그나마 엘누아르 영지가 넓지 않은 곳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실질적으로 누아 마을만 잘 다스리면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뀌지 않는 건 바로 환자에 대한 애정이었다.
아그네스는 이른 아침부터 왕진을 다녀왔다.
카누의 병이 완치될 때까지 그녀는 매일 가서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때로는 말 상대도 해 주면서.
“서기관님!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왕진 다녀오십니까?”
“네?”
공사 현장에 있던 폴링이 말을 걸어 왔다. 멈춰선 아그네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저 부르신 거예요?”
“그럼요. 여기 서기관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만.”
“아,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아그네스는 얼굴이 빨개졌다. 단순히 추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하하하! 그럴 만도 합니다. 평민 출신으로는 아마 최연소 서기관이실걸요? 켈세타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다들 엘누아르 가신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요.”
준이 드뇌르 백작에게 보낸 보고서 때문이었다.
처음 가신 내역을 본 백작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스무 살도 안 된 평민 출신의 아이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작은 영지라고 해도 엄연히 귀족의 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백작은 다시 한번 전령을 보냈으나 틀린 부분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다. 다른 가신이었다면 간섭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준이었다.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셔요? 혹시 편찮으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전에 영주님께서 제안해 주신 사업이 하나 있는데, 준비가 되면 서기관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하셨거든요.”
“그게…… 광산 사업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이걸 좀 봐 주시지요.”
폴링이 서류 뭉치를 건넸다. 꽤 두꺼웠다.
“사업 예산과 인력 구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시간 나실 때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예.”
뭔가 일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으니 일단 한번 읽어 보기라도 할까?’
아그네스는 창고로 향했다. 그곳엔 한쪽을 개조해 만든 공용 집무실이 있었다. 곧 책상에 앉아 폴링에게 받은 서류를 하나씩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