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엘누아르의 가신들
진료실의 불이 밤늦게까지 켜져 있었다. 오늘은 아그네스가 일찍 쉬러 올라갔을 텐데. 누굴까 궁금했다. 준은 진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공은 루치아였다. 종소리가 울리자 그녀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며칠 걸릴지도 모른다면서.”
“일이 잘 풀렸어. 오는 길에 카누 씨 댁에도 들렀고.”
“탕약은 잘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퇴원한다고 해서 좀 곤란했는데.”
“괜찮아. 잘하고 있더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암영초 쪽은 어떻게 풀었어요?”
“카이엔을 찾아갔지.”
루치아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로 자리를 옮긴 준은 카이엔의 은신처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볼카누스의 레어에 던전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도 따라갈 걸 그랬네.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네요. 볼카누스 씨가 가만히 있던가요?”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어? 지금쯤이면 던전이 완성되었을 텐데. 아마 며칠간은 잠도 못 자겠지.”
“불면증 치료제라도 미리 처방해 놔야겠어요.”
“굳이 약까지 쓸 필요 있나. 술 몇 병이면 돼.”
책상에 앉은 준은 종이를 꺼냈다. 필기도구와 함께. 준은 쓸 내용을 구상하며 루치아에게 물었다.
“아그네스는 계속 잠들어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죠? 내려오거나 하진 않았어요. 저녁은 마리가 방으로 가져다줬고요.”
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더는 거기에 대해 언급이 없자 루치아가 살짝 불만을 표했다.
“너무 무심한 거 아녜요? 나름 수제자잖아요.”
“이런 일이 있을 땐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열여덟 살이면 어른이나 다름이 없지.”
펜을 꺼낸 준은 필기를 시작했다. 대체 이 늦은 밤에 무얼 쓰는 걸까. 궁금했던 루치아가 가까이 다가와선 옆에 앉아 구경했다.
“뭐 하는 거예요?”
“곧 드뇌르 백작께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엘누아르 가문이 세워졌으니 가문의 구성원을 채워 넣어야 해. 아비루나 왕국의 관습이라고 하더군.”
“뭐뭐 들어가는데요?”
준은 미리 받아온 서류 양식을 보여 주었다. 가족관계, 재산 현황, 근로자 현황 등 가문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가는 듯했다.
루치아가 주목한 부분은 가족관계 항목이었다. 본처는 물론, 후처와 첩의 이름까지 모조리 적어야 하는 듯했다.
“저는 본처로 들어가나요, 후처로 들어가나요?”
“당연히 공란이지.”
“아, 서운하다. 엄청나게 서운하다.”
“어차피 별로 상관없잖아? 외부에서는 네가 남작 부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그런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준과 루치아는 드뇌르 백작의 연회에 참석했고, 극찬을 받을 만한 멋진 춤까지 보였으니까.
게다가 아마데우스 백작의 막내아들인 그레이엄 공자와 얽힌 일이 컸다.
그레이엄 공자는 루치아를 준에게서 빼앗아 오기 위해 결투를 신청했다. 그 일 때문에 루치아는 준의 여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남은 것은 그 관계를 인정하는 것인데, 아직 준은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마음이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행동 하나로 관계를 진전시키기에는 두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았다.
어쨌든 수만 년 동안 함께 퀘스트를 해 온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가문 구성원이 너무 허전한 거 아니에요? 서류상으로나마 몇 명 올리는 게 좋아 보이는데. 그래야 다른 가문에 무시를 안 당하죠.”
“생각해 둔 건 있어.”
“뭔데요?”
준은 대답 대신 서류에 직접 기입을 했다.
가문의 기사에는 하룬이, 그리고 마법사에는 마리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문의 사무를 책임지는 자리엔 아그네스의 이름을 올렸다.
누아 진료소의 직원들이 공식적으로 임관하는 순간이었다.
“인맥 정치의 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네. 그런데 서기관으로 아그네스를? 그럼 포지션이 좀 애매해지지 않겠어요?”
“나중에 초급 치유사 자격을 획득하면 수석 치유사로 올려주면 되지.”
현재 수석 치유사로는 루치아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럼 나는요? 자리를 뺏기면 본처 항목으로 이동하나요?”
“글쎄. 가문의 식객은 어때?”
“식객치곤 너무 고급인력이란 생각은 안 들어요?”
“호칭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때쯤 되면 우리 관계도 뭔가 변해 있겠지.”
준이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루치아는 한숨이 나왔지만, 준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준은 평소보다 일찍 직원들을 소집했다. 아그네스가 내려올까 걱정되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멀쩡히 나타났다.
“흐아아암. 졸려 죽겠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부르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룬이 불평을 했지만, 아그네스와 마리는 진지하게 임했다. 준이 이렇게 일찍 부른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준은 즉시 엘누아르 가문의 인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남작위를 받으며 엘누아르 가문이 세워졌다. 앞으로 내가 누아 마을을 포함한 일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지. 남작 가문인 만큼 앞으로 나와 함께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을 선발했다. 우선 서기관으로 아그네스.”
멍하니 있던 아그네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요?”
“그래. 너.”
피식 웃은 준은 서기관의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서기관은 가업을 책임지는 자리다. 손님 접객은 물론, 행정적인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지. 무척 중요한 자리니 앞으로 수고해 주도록.”
“선생님. 전 행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치유술 공부하기도 벅찬 상황인데…….”
“너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재능이 있다. 그리고 서기관은 영주의 측근이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임명되어야 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한마디가 아그네스의 표정을 변하게 만들었다. 한없이 자신없어 하던 표정이 변했다. 긍정적으로.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다음으로 가문의 기사는 하룬. 그리고 마법사는 마리를 선임한다. 영지의 치안과 직결되는 자리이니 모쪼록 신경 써서 임무를 수행하기 바란다.”
“옛! 주군!”
“저도 열심히 할게요.”
두 사람은 충분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직위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경험이 부족할지 몰라도 실력이 출중하니 준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엘누아르 지방은 지도상으로 고립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우던 가문이 건재한 이상 외부의 공격을 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
물론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은 있긴 했다.
‘금광 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 있겠지.’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만약 최상급의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날파리들이 꼬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준은 다른 보안책을 준비했다.
“이제 슬슬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때마침 자경단장 바이런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 같았다.
오랜만에 붉은 망토까지 걸쳤다. 젊은 시절에 쓰던 것이었는데 상당히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엘누아르의 기사단장직은 바이런 자경단장에게 맡긴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바이런이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취했다.
“일어나십시오. 바이런 경.”
“예. 주군.”
“하룬과 마리는 아직 경험적으로 미숙합니다. 그 부분을 경께서 잘 헤아려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마음이 든든해졌다.
모든 인선을 발표한 준은 뒷짐을 지고 연설을 시작했다. 루치아와 바이런은 예외였지만, 아직 어린 세 사람에게는 꼭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제 너희들은 엘누아르의 준남작급 귀족이다. 자고로 귀족이란 누리는 지위 이상으로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하며, 때로는 앞장서 자신을 희생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고귀한 신분에는 그만큼의 사회적 책무가 따르는 법이니까. 부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예!”
세 사람이 결의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자신들에게 찾아왔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리라 다짐했다.
그제야 준이 진지한 표정을 풀고 온화하게 웃었다.
“그럼 조례는 여기까지. 참, 바이런 경. 이제 기사단장이 되셨으니 자경단 조직은 새로 개편해야 할 겁니다. 승격 방안에 대해 보고서를 올려 주시길.”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중으로 보고드리지요.”
군례를 취한 바이런이 진료소를 나섰다. 그렇게 진료소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루치아를 포함한 의료진들이 오전 진료 준비를 시작했다. 준은 아그네스를 잠시 따로 불렀다. 어제 눈물을 쏟은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요.”
“그런 감정은 숨기지 않는 게 좋다. 진료에 영향을 줄 테니까. 힘든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봐.”
“아뇨. 저 정말 괜찮아요!”
아그네스는 여유 있는 미소를 보였다. 좀 의외였다. 심성이 여린 편이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극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호프만 씨의 대동맥류를 진단하셨던 그때요.”
팔짱을 낀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었다.
“그때 소중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치유사가 되고 싶냐고 물으셨고요. 그리고 마리가 치료를 받으며 처음으로 말을 했을 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이래서 치유사가 되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요.”
“흐음. 확실히 그랬었지.”
“카누 씨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 실수를 탓하기 전에 병을 완치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해요. 그래야 훌륭한 치유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목표는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것은 바로 준이 원하던 정답이었다. 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그네스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어제 카누 씨 왕진을 다녀왔었다. 카누 씨는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직접 왕진을 와서 친절하게 병을 봐 줬다면서. 실제로 네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왕진을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스캐너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너의 그 의심 자체가 진단에 도움이 됐다는 얘기야. 그러니 좀 더 자신감을 갖도록 해.”
“감사해요. 선생님.”
“그리고…… 아니다. 됐다. 나가 봐.”
준은 일부러 암영초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암 치료법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점심 식사를 마친 준은 진료소 옆에 있는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마침 인부들도 막사에 모여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폴링은 사무관이었지만 인부들과 함께 어울려 늘 식사를 같이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그럼요.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남작께서는요?”
“저도 맛있게 먹었지요. 괜찮으시면 앞으로 진료소에서 함께 식사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사우던 가의 사무관이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명색이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인부들이 무엇을 먹는지 직접 혀로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쉽게 알 수 있고요. 여러모로 좋지요.”
그 말을 듣다 보니 더욱 탐이 났다. 진정한 리더십이 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폴링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공사 현황에 대해 보고드릴까요?”
“아닙니다. 그거야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요.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좋습니다.”
날씨가 추워 밖을 거닐기는 적당하지 않았다. 준과 폴링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곳에서 몸을 녹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혹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광산 사업을 한번 해 보려고 합니다.”
“아! 소식은 들었습니다. 소문이 꽤 퍼져 있던 모양인데요?”
“폴링 씨가 왕립 아비루나 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주변 인맥도 꽤 많고.”
“그렇긴 하지요. 아무래도 그쪽 일을 오래 해 오다 보니까요.”
“한번 저와 사업을 같이 해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마침 좋은 자리가 하나 났거든요. 폴링 씨라면 아주 멋진 성과를 내실 것 같은데.”
좋은 자리?
갑작스러운 제안에 폴링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 준은 모닥불에 손을 뻗으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