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위험한 동거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일이었다.
드래곤 레어는 차원과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크고, 또 충격이 가해져도 외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에 마족의 던전을 만들겠다니.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분명했다.
“레어 안에 던전을 만들겠다고? 하하하하! 정말 걸작이군!”
준은 감탄했다. 그 방법은 자신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철혈의 대공’이라는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말 천재적인 대범함을 지니지 않은 자가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이봐 돌팔이. 지금 웃을 때야? 엉? 내 편을 들어 줘야지!”
“나조차 생각도 못 한 일이라서 말이야. 레어에 마족의 던전을 만든다면 확실히 가능성이 커지겠지. 차원의 간섭을 이용할 수 있으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이건 내가 아니라 우리 용족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야! 안식처에 더러운 마족의 코어를 박겠다는 얘기잖아! 빌어먹을!”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볼카누스는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주변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반면 카이엔은 한가로웠다.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 나는 다만 성공률이 좀 더 높은 방법을 그대들에게 알려줬을 뿐.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겠지.”
“무슨 속셈이냐? 솔직히 불어. 그렇게 던전을 키워서 또 다른 마계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전쟁은 모두 끝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마계를 다시 만들 수는 없어.”
그렇게 대꾸한 카이엔이 뒷짐을 지고 고고하게 걷기 시작했다. 대공이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고상한 걸음걸이였다.
“나는 강준에게 큰 빚을 졌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갚을 생각이지만, 아그네스 양에게도 개인적으로 진 빚이 있어서 말이야. 이 기회에 한번 도와주고 싶군.”
“무슨 빚을 졌기에 그렇게 똥폼을 잡으시나?”
“그대에게 일일이 보고할 의무는 없다만?”
아그네스의 이름이 나오자 볼카누스가 더는 화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의외였다. 카이엔이 아그네스를 생각할 줄이야.
볼카누스도 그녀를 위해 도와줄 방법이 없나 싶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유력한 방법이 하나 나왔고, 그것을 제시한 자신의 적이 아그네스를 언급하고 있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고.
“망할!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
한참을 고민한 볼카누스가 짜증을 버럭 내더니 몸을 홱 돌려 입구로 걸어갔다.
“어디 가?”
“레어로 돌아간다. 이런 기분 나쁜 곳엔 도저히 못 있겠군. 폐가 썩어들어 가는 느낌이라서.”
하지만 볼카누스는 마지막 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돌연 한숨을 내쉬더니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박살 내려다 간신히 참았다.
그가 주먹을 내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이, 패잔병! 이따 밤에 내 레어로 와라. 준비해 놓을 테니까. 젠장! 드래곤 레어에 던전을 만들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한참을 투덜거린 볼카누스가 은신처를 떠났다.
“이해해라. 겉으론 거칠어도 마음씨는 따뜻한 드래곤이니까.”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이긴 해.”
“예전에도 몇 번 자기 비늘을 뽑아서 치료에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치유사 전직도 한번 제안해 봐도 좋을 거 같아.”
“그런 일이 있었나?”
카이엔은 흥미를 보이더니 다시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이만 돌아가라. 던전을 만들려면 밤까지 어떻게든 마력을 모아야겠어.”
“그 전에 치료부터 받아야지?”
“그렇군.”
카이엔은 침상에 누웠다. 준은 평소보다 훨씬 큰 마력을 아끼지 않고 카이엔에게 쏟아 넣었다. 던전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모든 치료를 끝낸 준이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밤에 레어로 오나?”
“글쎄. 별일 없으면 참관하러 가고 싶지만 요즘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던전이 안정화되고 나서 보러 와도 늦지 않으니 시간 되면 한번 들러라. 아마 당분간은 볼카누스 그자의 레어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재미있겠군.”
씨익 웃은 준이 은신처를 나섰다.
그리고 그날 밤, 볼카누스 레어의 내부에 카이엔이 만든 던전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누아 마을 크기의 절반 정도 되는 작은 던전이었다.
그런데 볼카누스가 예상하지 못한 큰 문제가 하나 더 생기고야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냐?”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했다간 바로 브레스를 날리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당연히 카이엔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암영초 재배에 성공할 때까지 레어에 머물겠다고 했다만?”
볼카누스는 죽일 기세로 카이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이엔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얄미울 만큼 당당했다.
“지금 만든 던전을 안정화시키려면 내가 직접 코어를 조정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지. 던전의 기후를 제대로 조절하지 않으면 암영초는커녕 다른 약초도 자라게 할 수 없을 거야.”
“이놈아! 그런 건 만들기 전에 미리 얘기했어야지!”
“미리 얘기한다고 더 달라질 일이 있을까? 네 머리만 아플 뿐이겠지.”
카이엔은 태연히 대꾸했다. 가만 보면 볼카누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허…….”
볼카누스는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레어 내부에 던전을 만드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허락을 했는데 꼴 보기도 싫은 놈을 매일 봐야 한다니.
“후우…… 좋다. 좋아! 양보하는 김에 통 크게 하지. 대신 암영초를 만들지 못하기만 해 봐라. 아주 작살을 내줄 테니까.”
“만약 암영초를 만들어 낸다면?”
뜻밖의 역공에 볼카누스가 흠칫 놀랐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볼카누스가 살짝 당황하며 말을 받았다.
“만들어 내면 만들어 내는 거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내 치료가 늦어지는 것을, 그리고 그대에게 다양한 인격적 모독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던전을 만들었다. 누아 마을 진료소의 인간을 돕기 위해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만약 암영초 재배에 성공한다면, 내 청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다. 일족의 로드로서 말이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철혈의 대공이 청을 들어달라고 하다니?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족은 힘이 센 만큼 자존심도 센 종족이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볼카누스로서도 흥미가 가는 일이었다.
“좋다. 말해 봐.”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건 목표가 달성되면 이야기하도록 하지.”
볼카누스는 끓어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청이라니? 좀체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19주 후에는 카이엔을 박살 낼 테니까.
볼카누스가 한껏 비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목숨을 구걸하려는 것이라면 꿈 깨라고. 넌 반드시 이 세상에서 소멸할 테니까.”
“마계의 대공은 어느 상황에서든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흥! 입만 살아가지고는!”
그래도 더는 카이엔을 비난하지 않았다.
일전에 준이 해 줬던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다. 마르다 마을의 던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명예롭게 죽여 달라고 한 것은 바로 카이엔이었다.
적어도 그는 명예를 아는 마족이었다.
그런 자를 비난하는 것은 결국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볼카누스는 조용히 카이엔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는 던전의 코어를 조작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 * *
준은 카누의 집에 들렀다.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는데, 이곳에서 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카누는 바로 퇴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이라도 딸과 함께 지내고 싶다면서.
올해로 열일곱이라고 했던 그의 딸은 어디 하나 특출나지 않은, 말 그대로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마당에서 탕약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지 않고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다.
“어머, 남작님!”
엘레나가 깜짝 놀라 달려 나왔다. 준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탕약을 만들고 있었나 보구나.”
“루치아 선생님께 들은 대로 해 보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잘하고 있다. 냄새가 딱 좋아.”
준은 카누의 병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좋은 약재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약인 월영초도 함께 처방했다.
“아버지는 안에 계시니?”
“예. 지금 누워 계세요. 잠시만요. 아버지! 남작님 오셨어요!”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준은 엘레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방이 전체적으로 차가웠다.
준이 갑작스레 찾아오자 카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였다.
치유사도 나름 귀한 직업인데, 준은 남작위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엘누아르 일대를 통치하고 있는 영주이기도 했고.
“아이고. 영주님.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이렇게 기별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된 것 같아 송구하군요.”
“송구라니요. 무슨 그런 황송한 말씀을…….”
카누는 격하게 기침을 했다. 폐에 침범한 암이 악영향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은 그의 등을 쓸어 주며 편하게 기침을 하도록 했다.
“암영초를 재배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무척 실력이 뛰어난 분들께서 이번 일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아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시간이 좀 필요할 겁니다. 그때까지 힘내 주십시오.”
준은 카누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말에 감동한 카누도, 엘레나도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드래곤 로드와 마계의 대공이 당신을 위해 협력하는 중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놀랄까. 하지만 그건 상상에서 끝냈다. 심장 마비라도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그때, 눈치를 보던 카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영주님. 그렇게 귀한 약초라면 돈이 많이 드는 거 아닐까요?”
“아시다시피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는 마을 주민분들께 치료비를 받지 않습니다. 약초도 마찬가지고요. 마음 편히 계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에게도 고맙다고 말 좀 전해 주십시오. 전에 왕진 왔을 때 정말 상냥하게 잘 봐 줬거든요. 괜히 제가 큰 병에 걸려서 녀석이 자책할까 걱정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단과 다른 병이 나오면 치유사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아그네스를 고마워하면서도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누아라는 마을 공동체의 힘이겠지.’
준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에 처할 수도 있는데, 그때마다 큰 도움이 되곤 하니까. 늘 혼자서 퀘스트를 수행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진료소까지 직접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오거나 다른 의료진에게 왕진을 지시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가야지요. 어찌 선생님들을…….”
“다 카누 씨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쪼록 제 말대로 따라 주시길.”
직접 배웅을 나오려는 걸 만류하고 준은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 대신 엘레나가 따라 나왔다.
“방이 좀 차더구나. 난방에 문제가 있니?”
“땔감을 태워도 온기가 잘 퍼지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제 시간 내서 수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한번 보자.”
엘레나가 난방 설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온돌 방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간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준은 어설프게 타고 있던 장작을 모두 제거했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 고강한 마나가 응집되었다. 준은 장작 대신 마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았다. 이제 마나가 조금씩 열에너지로 바뀌며 방 전체에 훈훈한 열기를 전달할 것이다.
“한 달 정도는 문제없을 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얘기해. 아버지 잘 챙겨 드리고.”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지금은 아버지의 병세를 생각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손을 들어 보인 준은 카누의 집을 나섰다.
‘지금쯤이면 던전이 완성되었을 거 같은데, 한번 가 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준은 진료소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그네스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볼카누스의 레어엔 다음에 찾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