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암영초(暗影草) (2)
이미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어 그는 손쉽게 카이엔의 은신처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준은 뭔가 달라진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대단하군.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마계의 대공이라는 건가?’
내부는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기운이 사뭇 달라졌다. 예전보다 농도가 짙었다. 보통의 사람이 들어온다면 피를 토하며 쓰러질 정도로.
그것은 다름 아닌 마족의 마기였다.
카이엔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면서 그가 가진 고유의 기운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엔은 그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밖으로 자유롭게 방출하면서 자신의 내상을 최대한 스스로 다스리고 있었다.
“왔는가? 요즘 따라 자주 나타나는 느낌이군.”
“그러게. 나도 자주 오고 싶지는 않은데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방해해도 괜찮겠나?”
“이미 방해를 해놓고서 그렇게 뻔뻔히 말할 것까지야.”
피식 웃은 카이엔이 가부좌를 풀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준은 카이엔을 유심히 살폈다.
변한 것은 은신처의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그가 풍기는 기운도 마족스럽게 변해 가고 있었다. 말투도 그랬고.
하지만 준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변해가는 모습이 그가 생각하던 마족의 이미지와 닮아 있었으니까. 물론 카이엔도 그를 위협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상을 다스리고 있었나?”
“그래. 그대가 아주 훌륭하게 치유해 주고 있지만, 나도 스스로 기운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말이지.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
“괜히 무리하지 마라. 기운이 꼬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니까.”
“그런 잔소리는 아랫것들에게나 필요하겠지.”
“그런데 얼마나 힘을 되찾은 거야? 순수한 마족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던데.”
“아직 멀었다. 던전 정도야 하나 만들 순 있겠지만 손실이 있겠지. 걱정은 하지 마라. 약속을 깰 생각은 없다.”
카이엔이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
그가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썩 반갑게 들렸다. 준도 왕진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부탁한다면 던전을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안될 건 없지만 그가 가만히 있을까?”
카이엔이 말한 그는 바로 볼카누스였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잠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던진 건 아닌 거 같은데.”
“좀 곤란한 일이 생겼다.”
준은 암영초를 던전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일반 던전은 어렵고, 마계 귀족이 만든 던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카이엔을 통해 던전을 만드는 것이 현재로서 유일한 방법이다.
“암영초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걸 모르는 마계 귀족은 없지. 매우 중요하게 쓰이는 약초니까.”
“그걸 던전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하지만 던전에서 암영초를 재배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지. 운도 필요하고 말이다.”
암영초는 마계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고급 약초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던전에서 암영초를 재배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고위 마족이 던전을 생성할수록 그 확률이야 올라가긴 하겠지만, 아직 카이엔이 힘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한참의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가능성이 있는 건 다행이지만…… 이름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그가 힘을 사용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
그래도 준은 한번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실은 우리 진료소에 위중한 환자가 생겼는데 치료에 암영초가 필요하다. 그래서 찾아온 거야. 마계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던전 이야기를 꺼낸 거로군.”
“구할 수 있겠나?”
“글쎄.”
그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카이엔이 상념을 끊고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청객의 등장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구 쪽 벽이 일렁거렸다.
카이엔이 흥미로운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벽을 가뿐히 넘어 이곳으로 발을 들인 자는 바로 볼카누스였다.
“쥐새끼 같은 놈! 이런 곳에 숨어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냐?”
“볼카누스. 네가 왜 여기에?”
준도 제법 놀랐다. 누구보다도 카이엔을 증오하던 볼카누스였다. 그런 그가 은신처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왜라니? 언제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모를 위험한 놈인데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싸우려고 온 것 같진 않았다.
그의 표정에서 궁금증과 걱정이 묻어나 있는 게 보였다. 누구보다도 속마음을 뻔히 알 수 있는 드래곤이었기에 가능했다.
분명 카누의 병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는 아그네스가 자책하는 것을 걱정해서일 것이고.
“후후후. 그대의 입에서 잘못 뿜어진 브레스가 오히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겠지.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건 그대의 입이 아닌가?”
“더러운 마기가 술술 흘러나오는데 눈 감고 가만히 지나갈 수가 있어야지?”
“그건 심각한 어폐로군. 이곳은 특수한 공간이다. 내 마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해. 아무리 그대가 용족의 로드라고 해도 말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하여간 마족 놈들은 창의력이 부족해요. 그러니까 전쟁에서 탈탈 털리지. 엉?”
“전쟁 초기에 전선을 이탈한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뭐라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싸움이 날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준은 자신의 자리를 볼카누스에게 양보하며 일단 앉으라고 권했다.
그제야 볼카누스가 헛기침을 하며 화를 참았다. 팔짱을 끼며 준에게 슬쩍 물었다.
“그래서. 약초는 어떻게 됐어?”
“네가 와서 잘되던 일이 꼬이고 있다. 돕고 싶다면 성질 죽이고 가만히 좀 있어.”
“흥. 누구 덕에 목숨을 연명했는데 방법이 없더라도 알아서 구해 와야지!”
하지만 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번 일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준도, 자신도 아닌 카이엔이었다. 어쨌든 암영초가 필요한 상황이니까.
암영초를 구해 아그네스에게 약을 만들게 하고, 그걸로 환자를 치료해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녀를 충격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말이다.
준과 볼카누스의 뜨거운 시선이 카이엔 쪽으로 몰렸다.
“이거 참 부담스럽군. 신마전쟁이 다시 시작된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확률은 낮지만 암영초를 구할 방법은 분명히 있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나?”
“마계가 소멸했으니 서식지에서 채집하는 건 일단 불가능하다. 애초에 개체가 많은 약초도 아니니 설령 마계가 멀쩡했더라도 시간이 걸리는 일일 것이다.”
“그건 나도 알아.”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또 다른 마계를 만들면 된다.”
다소 충격적인 말에 엿듣고 있던 볼카누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계를 만든다는 것은 또다시 전쟁을 준비하겠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으니까.
하지만 준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또 다른 마계라…… 공간은 다르지만 마계와 비슷한 곳을 만든다는 의미인가?”
“어차피 약초는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받는 식물이지. 생태계를 마계와 똑같이 만들어 주면 재배할 수 있을 거다. 그게 실제 마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해는 말아라. 내가 말한 곳은 진짜 마계가 아니라 던전이니까.”
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자는 볼카누스뿐이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여기에 던전을 만들겠다는 거냐? 감히 나의 레어가 있는 이 신성한 뒷산에?”
“넘겨짚지 마라. 아직 카이엔이 만들어 주겠다고 하지도 않았어. 방법이 있다고만 했지.”
준이 카이엔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굳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카이엔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씨익 미소를 지은 카이엔이 물었다.
“모든 협상엔 대가가 필요하지. 하지만 그대에게 큰 빚을 진 상태라 뭘 요구하기는 좀 어렵고. 그런데 암영초가 필요한 환자가 누구지? 인간 귀족인가? 마족들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초를 누구에게 쓰려는 건지 궁금하군.”
“평범한 마을 주민이다.”
“의외인데?”
준은 간단히 환자에 대해 설명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힘들게 딸을 키워 온 카누라는 이름의 사내를.
아그네스가 중간에 왕진을 다녀온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어 지금 심각한 자책감에 빠져 있다는 것도 말했다.
“카누 씨는 딸이 시집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눈을 감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3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거야.”
“네 치유술이라면 그 정도는 버티게 할 수 있지 않나?”
일리 있는 지적이었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자가 불행했던 만큼 이제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는 있으니까 말이야.”
“허황되긴 하지만 멋진 말이군.”
“나는 치유사로서 내 힘이 닿는 대로 그를 도울 생각이야. 3개월이 아니라 3년, 아니 30년을 살게 해서 손자까지 보게 할 거야.”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 듣기에 카누의 일생은 평범했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볼카누스도 카이엔도 필멸자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자들이다. 인간의 불행한 삶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준을 만난 이후로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다.
오히려 반신의 경지에 올라 모든 것을 주무를 수 있는 그였지만, 이름도 없고 하찮게만 보이는 사람들을 전심전력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가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런 사건들도 몇몇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준의 마지막 말에 볼카누스와 카이엔은 공감했다.
실로 엄청난 내적 변화였지만 정작 두 존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좋아. 암영초를 위해 던전을 생성하겠다. 규모는 작을 거다. 어차피 약초 재배가 목적이라면 크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안 그래?”
준이 볼카누스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는 인상을 완전 구기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의 뜻을 표했다. 준이 개입해서가 아니라 아그네스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그런데 조건이 하나 충족되어야 한다.”
이번엔 준이 아니라 볼카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볼카누스는 지지 않으려는 듯 마계의 대공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카이엔이 말을 이었다.
“암영초를 다른 곳에서 재배하려면 마계와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한 말, 기억하나?”
“물론.”
“그렇다면 이곳에 던전을 만드는 건 의미가 없다. 마계와 비슷한 환경을 구축하려면 차원의 간섭을 이용하는 게 좋지.”
“차원의 간섭이라.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습도, 날씨 등 그런 내부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외부 세계가 가하는 에너지까지 고려하려는 것이다. 카이엔이 이번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볼카누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차원을 찢고 거기에 던전을 만들겠다는 게야?”
“비슷하다. 마침 이곳 뒷산에 차원 사이에 끼어 있는 공간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네놈! 설마…….”
“그래. 그대의 레어 내부에 던전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지.”
“이런 미친 새끼!”
볼카누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은신처를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