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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78화 (78/175)

78화 암영초(暗影草) (1)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스캐너는 인체의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특별한 장비다.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뭔가 의심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

마침 준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하지 마라. 혹시나 해서 검사하려는 거니까.”

“그럼 제가 보조할게요.”

“마음대로.”

아그네스는 직접 스캐너를 세팅했고, 마리는 환자를 검진용 침상에 눕게 했다.

아그네스는 왕진 때 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험도 부족한데 마나까지 사용하지 못한다면 분명 한계가 있다. 복부를 촉진하는 것도 그냥 하는 것과 마나를 실어서 하는 것의 차이가 크니까.

슬라임 윤활제의 준비가 끝났고, 스캐너의 유리판에 영상이 제대로 맺히는지까지 확인한 아그네스가 보고했다.

“선생님. 준비 다 됐어요.”

“좋아.”

환자는 배를 깐 채 겁먹은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게 중요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두려움이 가중되니까.

가까이 다가온 준이 환자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카누 씨. 이 장비로 카누 씨의 위장관을 들여다볼 겁니다. 통증은 없고 조금 차가울 수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설명이 끝나고 준이 스캐너의 핸들을 쥐었다.

우선 위장을 관찰했다.

새로 접수된 환자가 없어 루치아도 팔짱을 끼고 뒤편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

그때, 루치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모니터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매끈해야 할 표면에 이상한 조직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일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출혈이 있는 데다 정상 조직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건…….”

모니터를 바라보던 준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딸깍.

그는 핸들에 달린 스위치를 조작해 영상을 저장했다. 그리고 핸들을 움직였는데, 배 쪽이 아닌 가슴 쪽을 향했다. 폐를 관찰하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도 비정상적인 조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꽤 심각하군.’

준은 왜 자신의 직감이 꿈틀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감기나 배탈 같은 사소한 병이 아니었다. 정상이라면, 이런 조직이 있어선 안 됐다.

준은 핸들에 더욱 강력한 마나를 불어 넣어 감도를 올렸다.

우우우웅!

그런 식으로 환자의 배 안을 샅샅이 살폈다. 위장만이 아니라 간과 췌장 등 다른 장기도 확인해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검사는 다 끝났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죠?”

“예에. 괜찮습니다.”

“우선 윤활제를 좀 닦으시고 이쪽으로 오시죠.”

아그네스가 수건으로 슬라임 윤활제를 닦아 주었다.

잠시 후 카누는 다시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은 차트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선생님. 저…… 몸살감기가 아닌 건가요?”

“일단 몇 가지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기침은 정확히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잔기침은 오래전부터 하긴 했는데…… 열이 나고 아픈 건 며칠 전부터였지요.”

“살도 많이 빠지시고?”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옷이 많이 헐렁해지긴 했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준이 그 사실을 모두 차트에 기입했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아도 진단은 끝나 있었다. 다만 확인 차 물은 것일 뿐.

잠시 머뭇거리던 준이 차분히 말했다.

“검사 결과 카누 씨의 위장과 폐, 간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암이지요.”

“암……이요?”

“전이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습니다. 복수도 차고 있고. 상태가 좋지 않아요.”

카누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울이라 감기몸살에 걸린 줄 알았다. 그전에도 몸이 좀 좋지 못했지만, 단순히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암이라니.

“뭐,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암이라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카누 씨. 안타깝지만 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를 할 수 있어요.”

“그런…….”

카누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만약 준이 시골 마을의 평범한 치유사였다면 결과를 믿지 않고 켈세타의 병원을 찾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마나 유저라고 들었습니다. 마법으로 치료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안타깝게도 암은 마나 요법으로 치료하지 못합니다. 약을 써야 하지요. 이렇게 전이가 심한 경우는 특수한 약초가 필요합니다.”

“특수한 약초라면…….”

“일단 우리 진료소에는 없습니다. 아마 켈세타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워낙 귀한 약초라.”

“아아!”

카누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준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에게 집중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선 보존적 치료를 하겠습니다. 암의 전이를 억제하면서 약초를 구할 시간을 벌어야 할 것 같군요.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시간을 번다고요? 그렇다면 약초를 구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신다면 그 믿음에 꼭 보답할 겁니다. 약속하죠.”

“제발 부탁드립니다…… 딸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습니다. 어미 없이 자라 불쌍한 아이인데…… 갈 때 가더라도 시집가는 모습은 꼭 보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준은 카누의 손을 잡고 힘을 내라며 등을 두드렸다. 흐느끼는 소리에 진료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준이 지시했다.

“마리. 카누 씨를 입원실로 안내해 드려라.”

“예. 선생님.”

환자가 나갔음에도 진료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특히 아그네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카누의 이상 징후를 발견한 것은 그녀였다. 단순 감기인 것 같아 종합감기약을 처방해 줬고, 그 이후에 왕진도 다녀왔다. 이렇게 큰 병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그네스라면 죄책감을 심하게 느낄 것이다. 준이 알기로 그녀는 마을 주민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그네스.”

“선생님…….”

아그네스는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자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루치아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만 올라가서 쉬는 게 좋겠다. 응?”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좋은 경험 쌓았다고 생각해. 어차피 병은 준 선생님이 짠- 하고 치료해 줄 거니까.”

“그래도요. 제가 처음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처음 준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어설픈 약초학 지식을 자랑하던 자신을 호되게 혼내던 그때가.

치유사가 되기도 전에 살인자가 되어 버리면 곤란할 거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은 장염으로 진단한 걸까.

준이 말했다.

“넌 할 수 있을 만큼 했어.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암이라고 진단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도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카누 씨는…….”

“부정적으로 가정할 필요가 있나? 지금은 약초를 구하고 카누 씨의 암을 치료할 생각을 해야지. 보존적 치료도 쉽지 않아. 손이 많이 갈 거야.”

“할게요. 제가.”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루치아 선생 말 들어. 올라가서 쉬어라. 마음이 진정될 때까진 내려올 생각하지 마.”

“…….”

아그네스가 미동도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루치아가 그녀를 억지로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누군가가 진료실로 불쑥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대체 아그네스가 왜 울고 있는 거냐고?”

볼카누스였다.

그는 약초로 가득 든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대답을 안 해 주면 버럭 소리지를 것 같은 얼굴을 하며.

“환자 중에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다. 전이가 꽤 진행되어서 상태가 심각해. 그런데 아그네스가 중간 진찰을 했던 환자야. 자기가 놓친 게 아니냐며 자책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역시나 성미가 급한 볼카누스가 그의 말을 잘라먹고 들어갔다.

“그래서 혼낸 거냐? 망할 돌팔이 같으니라고. 그럴 때일수록 제자를 아끼고 보듬어 줘야지! 아직 초급 치유사 자격도 따지 못한 아이인데?”

“이봐. 부탁인데 말 좀 끝까지 듣든지 성질 좀 죽이든지 하나는 해라 좀. 어?”

웬일로 준이 한마디 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볼카누스가 한 발짝 양보했다.

“크흠. 알았다. 계속 말해 봐라. 말 안 자를 테니.”

혀를 찬 준은 그가 가져온 약초 바구니를 열었다. 그리고 약초를 꺼내 하나씩 분류하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암은 마나로 치료할 수 없다. 마나 요법은 외상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약물 요법 정도인데, 문제는 약초야. 장기별로 암에 효과가 있는 약초는 잘 정립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번처럼 전이가 심한 경우엔 특수한 약초가 필요하지.”

“무슨 약초가 필요한데? 내 레어를 뒤져서라도 바로 준비해 주마.”

“암영초(暗影草).”

볼카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단히 불쾌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젠장! 하필 암영초라니! 월영초로는 치료가 힘든가? 예전에 얼핏 들은 거 같기도 한데.”

“월영초가 도움이 되기는 해. 전이를 억제하는 효능이 있으니까. 하지만 전이가 심한 암은 암영초로 처음부터 강하게 다뤄야 해. 지금 상태로는 어디서 시작된 암인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그 약초가 필요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군.”

볼카누스답지 않게 냉정한 한마디였지만, 준은 이해했다. 암영초는 마족과 관련된 약초였다. 마계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카이엔과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그였기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카이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볼카누스가 물었다.

“그런데 신마전쟁 이후로 마계는 작살났다고 했잖아? 그럼 그 약초도 구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마계에서만 자라는 약초니.”

“이론상으론 그래. 하지만 한번 카이엔에게 물어보려고. 다른 방법이 없는지.”

확실히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볼카누스는 불쾌했다. 진료소의 일에 카이엔이 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최근 그는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채집한 약초를 사람들이 먹고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흥! 인간들의 슬픔과 고통을 훔쳐 먹는 놈들의 우두머리인데 과연 목숨 하나 살리자고 도움을 줄까? 어림도 없는 소리지!”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

“어째서?”

“천하의 드래곤 로드가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위해 이렇게 약초를 캐 오는 걸 보면. 안 그래?”

준이 정리하던 약초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한 방 먹은 기분에 볼카누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곧 그는 헛기침을 하며 진료소에서 도망치듯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아그네스를 찾아가 달래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니까.

잠시 후 루치아가 진료실로 돌아왔다.

“아그네스는?”

“재웠어요. 좀 진정을 한 것 같긴 한데, 충격이 큰가 봐요. 차라리 카누 씨가 다른 마을 사람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어.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줘.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덜컥 약속을 해도 되는 거예요? 암영초는 이 세계에서 구하기가 불가능하잖아요. 당신 아공간 창고엔 보관해 놓은 게 없나요?”

준은 왕진 가방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누아 마을에 와서 치유사 노릇을 할 줄 알았더라면 한 뿌리 정도는 챙겨 놨겠지.”

“응? 어디 가려고요?”

“암영초 구하러.”

루치아는 전직 신의 전령답게 준의 행선지를 바로 파악했다.

“오래 걸릴까요?”

“상황에 따라 며칠 걸릴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 멋쟁이 원장님께서 특근 수당을 지급해 주시면 되겠네.”

루치아가 입술을 달싹이며 생긋 웃었다. 한결같은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든든하기도 했고. 준은 웃으며 진료소를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카이엔의 은신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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