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준, 의심하다
“이름이 강준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혹시 페르디낭 각하십니까?”
“호오. 안목이 제대로군. 명의라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야.”
페르디낭 후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예를 취했다.
아비루나 왕국의 후작은 몇 없다. 게다가 그는 왕실의 친척으로 요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기왕 만났다면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잠깐 좀 걷겠나?”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드뇌르 백작을 만나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그게 아니니 천천히 해도 되겠지.”
그 한마디로 준은 페르디낭 후작의 권세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보통 사내가 아니다.
드뇌르 백작은 아비루나 왕국에서 나름 유력 인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성에 도착하자마자 자신과 시간을 보내려 하니 그럴 수밖에.
페르디낭 후작이 손으로 복도 너머를 가리켰고, 준은 순순히 그의 곁을 따랐다. 시녀가 따라붙으려 했지만 페르디낭 후작이 손짓해 물리쳤다.
그렇게 두 사람은 켈세타 성의 넓고 긴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는 길에 그대에 대해 간략히 알아봤네. 출신지도, 행적도 불분명하더군.”
“방랑 생활을 오래했습니다. 남아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요.”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의 근본이 궁금하다는 게 아니야. 정계의 요직에 앉기 위해서는 때때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 중요할 때가 있거든. 발목을 붙잡는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
생각 이상으로 대범한 사내였다. 아직 소개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에도, 페르디낭 후작은 준을 어떤 말로 쓸지 이미 구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준은 낚이지 않았다. 상대의 야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계략일 수도 있으니.
“지금은 하루하루 늘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누아에 새로운 진료소가 완공된다면 더욱 바빠지겠지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없습니다.”
“흐음. 파비안이 왜 입이 닳도록 자네를 칭찬하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은데?”
묘한 미소를 지은 후작이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편지봉투 하나가 딸려 나왔다.
후작이 그걸 준에게 건넸다.
“다음 달에 왕립학술원 정기 총회가 열리네. 아비루나 왕국에서 이름 있는 학자들이 모이는 경연장이지. 왕립학술원장으로서 자네가 로가리듬의 법칙을 그곳에서 발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치유사입니다. 파비안 남작께 논문을 드린 것도 치료의 일환이었지요. 너무 대단히 봐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단하게 본 적은 없네. 단순히 흥미가 돌았을 뿐이지. 선택은 자네의 몫이야. 나는 강요엔 흥미가 없어서.”
준의 어깨를 다독인 페르디낭 후작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예쁘장한 시녀를 발견하고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후작이 남긴 초청장을 내려다보던 준은 그것을 주머니로 챙겼다.
마음이 동하진 않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돈 안 드는 보험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 * *
준이 남작위를 받고, 엘누아르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드뇌르 백작은 전령을 보내 이 소식을 널리 알렸다.
당연히 그 소식도 누아 진료소에 당도했다.
진료실에서 한가롭게 수다를 떨던 세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루치아는 예외였지만.
“아아. 우리 선생님이 너무 먼 곳으로 가 버리셨어…….”
아그네스가 체념한 듯 책상 위로 엎드렸다. 반면, 하룬은 기세가 등등했다.
“남작위에 봉토까지 받으시고 엘누아르 가의 가주가 되셨다니! 이것은 운명. 켈세타로 진출하기 전에 몸풀기로 엘누아르의 기사가 되어 볼까?”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확실히 바로 사우던 가의 기사단 시험을 치는 것보다는 자리를 옮기는 게 더 쉬울 테니까.”
“바로 그겁니다! 잉그바르식 쾌검술을 마스터했으니 어떤 적이든 쉭쉭 베어 넘길 수 있겠죠.”
“당연하지. 우리 가문의 쾌검술은 어떤 검술에도 뒤지지 않는단다. 호호호.”
루치아가 바람을 넣자 하룬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우리 선생님, 아니지. 우리 주군께서 오시면 한번 말씀드려 봐야겠습니다. 이제 더욱 귀한 분이 되셨으니 든든한 호위기사가 필수죠.”
“퍽이나 든든하겠다.”
아그네스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리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하룬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거기 수습 나부랭이는 좀 조용히 하시죠. 어디 감히 엘누아르의 기사님께 막말을.”
하룬은 이미 엘누아르의 기사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곁에서 빤히 그를 바라보던 마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때 진료실로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
“우리 가문의 호위기사가 되겠다고?”
“서, 선생님!”
준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마차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언제 온 걸까.
진료소 안으로 들어온 그가 외투를 벗었다. 마리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말로만 하는 누구와는 다르게 행동으로 측근임을 입증하는 그녀였다.
준이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았다.
“그래. 남작위를 받고 가문을 세웠으니 기사를 뽑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후후후. 역시 제 진가를 알아봐 주시는군요.”
“하지만 그냥 뽑을 수는 없지.”
“……네?”
“검술로 나를 이겨 봐. 지켜야 하는 사람보다 약하다면 호위기사를 두는 의미가 없지 않겠어? 세금 낭비지.”
“죄송함다.”
하룬이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마르다의 던전에서 가고일을 물리칠 때 준의 실력이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덤볐다가 몸이 상할지도 모른다.
덕분에 진료소에 한바탕 웃음꽃이 폈다.
루치아가 말했다.
“기사는 그렇다 치고 서기관 같은 가신들은 임명해야 하지 않아요?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도 필요하고. 하나 짓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임명은 나중에. 그리고 이런 마을에 저택은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만 느껴지겠지.”
“그건 당신 생각이구요. 백작께서 가만히 안 계실걸요? 남작급 가신이 저택도 없이 이런 누추한 진료소에서 생활한다는 걸 알면요.”
루치아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는 계층이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준이 해법을 찾았다.
“신축 진료소를 엘누아르 가문의 저택으로 삼으면 되겠군. 연구실을 몇 개 이쪽으로 옮기면 생활공간은 마련할 수 있을 거야.”
“참 뭐랄까. 당신다운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뭐, 됐어요. 일이 잘 풀렸으면 그만이지. 축하해요.”
“축하드립니다!”
아직 축하받기는 이르다. 금광의 존재를 알리고 광부를 모아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해야 하니까.
그러나 준은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 일은 조금 더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엘누아르 지역, 특히 누아 마을은 산악 지형이 발달한 곳이었다.
준은 광산을 개발한다는 소문을 퍼트린 다음, 전문가를 섭외하고 자연스럽게 금광을 발견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실제로 작위 수여식 때 만난 다른 귀족들에게 그 계획을 설명하기도 했다. 몇몇 귀족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지만, 다수는 우려를 표했다. 광산 개발 사업은 돈이 굉장히 많이 드니까.
‘광산 개발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 뒤에 따를 이익을 생각한다면. 이미 금광을 발견한 상황이니까.’
이제는 자연스레 소문이 퍼지길 기다린 다음 실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승작 기념으로 휴진하면 안 됩니까?”
“쉬고 싶으면 쉬어라. 밖이 꽤 춥던데 나가서 검을 휘두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아니면 순찰도 좋고. 바이런 단장께 말씀드려 줄까?”
“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죠! 어떻게 진료를 쉴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파이팅!”
본전도 못 찾은 하룬이 대기실로 도망치듯 나갔다. 마리도 따라 나가 준비를 시작했다.
아그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멀리 다녀오셨는데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오후 진료만 하시는 것도 좋고요. 요즘 환자가 좀 줄어서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러게. 켈세타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오늘은 그냥 쉬어요. 진료는 내가 보면 되니까.”
루치아가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특근 수당을 요구하는 것이리라.
가벼이 웃어넘긴 준은 백의를 걸치고 자리에 앉았다.
“아그네스. 카이엔의 차트를 좀.”
자리를 비운 사흘간 루치아가 치료를 어떻게 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재빨리 움직인 아그네스가 차트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기록을 보니 정석대로 치료를 한 것 같다.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볼카누스는 어때?”
“특별히 편찮으신 곳은 없고, 요즘 다시 약초를 가져다 주고 계세요. 매일요.”
준은 의외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족발을 만들어 간 효과가 있었던 건가? 시간은 충분하니 좀 더 노력해 봐야겠어.’
준은 다시 차트를 건넸다.
환자들이 하나둘 진료소를 찾기 시작했다. 세 직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환자를 맞는 사이, 루치아가 물었다.
“봉토를 달라고 했을 때 백작이 의심 안 하던가요? 당신, 세상의 모든 물욕을 초월한 대현자 컨셉이었잖아요.”
“약간 의심하는 것 같긴 했는데 뭐 어쩔 수 있나. 여차하면 떠날 기색을 보이니 바로 양보하더군. 연회에 참가하길 잘했어.”
“당신 요즘 좀 변한 거 같아요.”
뜬금없는 말에 준이 루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입맞춤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준이라고 해도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순 없었다.
“좋은 의미야?”
“나쁜 의미는 아니죠. 적어도 난 당신이 변한 모습이 더 좋으니까요.”
“나쁘다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뭐라구요?”
루치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라고 하기 좀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가 신의 대리인 시절에는 절대 생각지도 못할 장면이었다.
“그건 그렇고 켈세타에서 뭐 재미있는 일 없었어요?”
“있었지.”
준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매우 고급스러운 편지지였는데, 일반 귀족들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까.
루치아는 그 인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흥미를 보였다.
“드디어 올 게 왔군요.”
“켈세타에 있을 때 왕립학술원장을 만났어. 이름이 페르디낭이라고 했던가. 하마터면 하루 늦을 뻔했지. 파비안 남작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건 그것대로 아깝네요. 초과 수당 챙겨야 하는데. 아무튼, 왕도로 갈 건가요?”
“글쎄. 딱히 끌리진 않아서.”
좋은 기회임은 분명하지만, 굳이 나서서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왕도 진출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지금은 금광 개발이 우선이었으니까.
하루아침에 엘누아르 가문의 가주가 되었지만, 준은 평소처럼 들어오는 환자를 미소로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죄송합니다. 또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병세가 꽤 진행된 것 같았다.
“폐라뇨. 무슨 말씀을. 자, 앉으시죠.”
준은 차트를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아그네스가 병세가 의심된다고 말했던, 카누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그때 분명 왕진을 보냈었지. 아그네스의 예상대로 감기가 아니었던 건가?’
처음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핼쑥해졌다. 전체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왕진을 받으셨지요?”
“예…….”
환자는 계속 기침을 심하게 했다. 아그네스는 루치아의 보조를 보고 있어 준은 우선 차트를 확인했다.
‘장염으로 진단을 한 건가? 식욕 부진에 구토. 전형적인 장염이긴 한데…….’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았다는 것은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다면 약을 먹으며 회복을 기다릴 테니까.
준의 직감이 꿈틀거렸다.
“혹시 식사를 하셨습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그렇군요. 검사를 좀 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사요?”
카누는 다소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지시했다.
“마리. 스캐너를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