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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76화 (76/175)

76화 로드 엘누아르

켈세타로 돌아온 파비안 남작은 곧장 백작의 성으로 향했다. 긴히 의논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니 서둘러 들르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파비안 남작이 집무실 입구로 들어서자 서기관이 반색했다.

“파비안 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모양이군. 자네까지 그러는 걸 보니까. 각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그럼요. 어서 드시지요.”

기사들이 육중한 문을 열자 파비안 남작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조용했다. 드뇌르 백작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왔나? 젠장. 자네의 편두통이 나한테 옮은 것 같아. 분명해.”

“편두통은 전염병이 아닙니다만.”

“음? 뭐야. 자네. 뭔가 달라졌는데?”

변화를 지나칠 백작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그가 변했다는 걸 인지했다. 좋은 방향으로.

백작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다 나은 겐가?”

“말씀드리기 황송하지만, 그 빌어먹을 망원경으로 하늘을 더 열심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오! 잘됐군! 정말 잘됐어!”

드뇌르 백작은 바스티엔 공자의 완치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기뻐했다. 그만큼 파비안 남작은 백작에게 중요한 가신이자 친우였다.

“역시 강준 경은 다르다니까.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좀 있는 편이지. 하하하!”

“그건 그냥 흘려듣기가 좀 어려운 말씀이군요.”

“뭐가?”

“정식 치유사 과정을 밟은 이력도 없고, 출신지도, 나이도 불분명해서 이런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쓸 수 있는지 걱정이 되셨다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흠! 크흠!”

구구절절 옳은 말에 드뇌르 백작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두통이 시작됐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십니까? 누아 마을에까지 전령을 보내실 정도면 뭔가 일이 있다는 건데.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일이 있긴 하지…….”

“흐음. 왠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군요. 일단 좀 앉으시죠.”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를 동안 백작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말 큰일인 모양이었다.

파비안 남작은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막내가 좀 변한 것 같네. 결혼을 하지 않은 자네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공녀께서 변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꾸 누아 마을로 가고 싶다고 하고 있어. 강준 경이 마법공학을 미끼로 막내에게 뭔가 한 것 같은 느낌이야. 혹시 사춘기일까? 역시 자네라고 해도 결혼도 안 하고 애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

“하하하하!”

파비안 남작은 백작이 무안해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딴 일로 전령을 보내서 일단 어이가 없었고, 준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백작이 심드렁히 물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나? 남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와 함께 있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요.”

“뭐, 그랬었지.”

“그는 평범한 치유사가 아닙니다. 학문과 검술에 모두 통달한 천재지요!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름답고, 때로는 심오할 때도 있어요.”

“칭찬에 그렇게 인색한 사람이 왜 그렇게 변했나?”

“변한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파비안 남작은 다시금 강조했다.

그건 드뇌르 백작도 인정해야 했다. 그간의 업적도 홀로 쌓기 어려운 것인데, 자신의 친우의 고질병까지 고쳤다. 이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다.

파비안 남작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는 얼마 전에 엄청난 수학적 발견을 했지요. 누군가 수학사를 저술한다면 이제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왕립학술원에 알렸지요.”

“그런 일이?”

백작이 깜짝 놀랐다.

파비안 남작은 학문적으로도 매우 엄격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발견이나 발명을 후하게 쳐주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바로 왕립학술원에 보낼 정도라니?

“정확히는 페르디낭 후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만간 켈세타에 들를지도 모르겠군요.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젠장! 왜 하필 페르디낭 후작인가?”

“그분이 원장이니까.”

“얼마나 피곤한 사람인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냥 학회에 참석을 시키지 그랬어. 망할! 성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그의 바람기는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파비안 남작이야 주변에 여인이 없으니 상관없다 치더라도, 백작은 아니었다.

“타이밍 참 기가 막히는군. 역시 막내를 누아로 보내야 하나?”

“보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강준 경은 분명 훌륭한 스승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자네보다도?”

“마음이 가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더군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많은 소회가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빤히 친우의 눈을 바라보던 드뇌르 백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겠네. 긍정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지.”

“그럼 전 이만.”

파비안 남작이 예를 올리고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홀로 남은 백작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걱정스러운, 그런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이틀 후, 켈세타 성에 준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 *

“대체 왜 온 거야. 강준 경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나?”

“각하를 뵙겠다는 말만 했습니다.”

백작은 수심에 잠겼다.

준의 방문 목적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을 떠나기 전 그는 가능한 누아 마을에 머물겠다고 했다. 그래서 가신회의에 꼭 참석해야 하나 물어보기도 했었고.

그랬던 그가 켈세타 성을 떠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다시 성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마 다른 영지로 떠나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였다.

얼마 전 열린 연회에서 칼스버그 자작과 아마데우스 백작이 준에게 작업을 걸었단 사실을 보고받았다.

아마데우스 백작 쪽은 루치아와 얽히는 바람에 가능성이 희박하게 됐지만, 칼스버그 자작은 다르다. 그는 ‘북부의 늑대’라는 별호답게 출중한 능력과 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내였다.

그러다 문득 파비안 남작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크게 베팅해야겠어. 이러다가 강준 경을 빼앗기면 비웃음만 살 테니까. 시원하게 남작위를 주고 영지도 주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겠지.’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드뇌르 백작이 시종을 보내 준을 불렀다. 곧 문이 열리고 백의를 걸친 준이 집무실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각하께 인사 올립니다.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보이는군. 무슨 일로 성에 온 겐가? 가신 회의는 소집하지도 않았는데.”

“각하께 요청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말해 보게.”

“얼마 전 마이더스 상단과 가정용 상비약 제조 및 유통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좀 더 확장시키려고 하니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음? 현실적인 문제라 하면…….”

“제가 부릴 수 있는 인력과 토지가 필요합니다. 하여, 제게 봉토를 하사해 주시길 정중히 청합니다.”

으레 고개를 숙일 법도 한데, 준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백작과 눈을 마주했다.

백작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기에 쉽게 허락하려 했다.

하지만 본능이 그것을 붙들었다.

‘쉽게 내어주면 다음 것도 쉽게 내어줘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인 법!’

그가 먼저 요청을 해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척 시간을 끌며 내어주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토라…… 영지를 내리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겠지.”

“칼스버그 자작님이나 아마데우스 백작님의 제안을 생각해 보면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켈세타의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나 보군요.”

회심의 일격.

그 한마디에 드뇌르 백작은 꼬리를 내렸다.

“흐음, 남은 영지가 좀 있긴 하네만. 특별히 원하는 곳이라도 있는지?”

“누아 마을이 속한 영역을 다스리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엘누아르 지방이겠군요.”

“의외로군. 켈세타와 가까운 곳을 내어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엘누아르라…….”

백작은 고민하는 척을 했다.

백작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엘누아르 지역은 거의 이익이 나지 않는 곳이다. 인구도 적고 접근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남작은 영지의 법도상 봉토를 가질 수 없네.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따라야 할 절차가 있다면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준은 가진 패를 모두 꺼냈다. 그것은 백작도 마찬가지. 백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에게 남작위를 수여하지. 나의 신민들은 자네를 로드 엘누아르라고 부를 걸세.”

“너그러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누아 마을 주민들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자네의 공을 생각한다면 마땅한 일이겠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준은 작위를 받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덥석 물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드뇌르 백작은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털었다.

파비안 남작에게 또 생각이 많다는 잔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기왕 마음먹은 거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왕도에서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에.

“서기관!”

대기하고 있던 서기관이 급하게 들어왔다. 백작이 지엄히 명했다.

“가신들을 소집하라. 내일 작위 수여식을 개최할 것이다. 강준 준남작의 작위를 남작위로 올릴 것이니 준비하도록. 엘누아르를 봉토로 허락한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서기관이 나가자 드뇌르 백작이 다소 온화한 어투로 준에게 물었다.

“이곳에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파비안 경이 자네를 보면 쉽게 놔 주지 않을 것 같네만.”

“수여식이 끝나면 바로 출발할 계획입니다. 급환이 있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그렇군. 참. 자네와 상의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루드밀라가 자네 밑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곰인형을 말끔히 고쳐 준 것도 그렇고, 마리와의 교류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루드밀라 공녀는 마리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 호기심과 추진력이 대단하다. 으레 수재들이 갖춰야 할 미덕은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준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선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내년 여름쯤이면 괜찮을 것 같군요. 그때 다시 한번 상의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의 뜻이 그러하다면.”

카이엔과 볼카누스 때문이었다.

20주, 아니 이제는 19주가 된 지금 공녀를 진료소에 오게 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차라리 모든 일이 해결된 이후인 여름으로 잡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르침이라면 파비안 경이 계시지 않습니까?”

“파비안 경도 자네 밑에서 배우게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백작은 일단 루드밀라 공녀를 당장 보내지 않아도 될 구실을 찾았다.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준의 말을 그대로 딸에게 전해 주면 되니까.

“숙소는 준비하라 일러두었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백작을 향해 예를 취한 준은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집무실을 나선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근사한 의복을 걸친 낯선 중년 남자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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