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름 없는 누군가를 위하여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창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곧 진료가 끝날 것 같았다. 준은 커튼을 치고 1층 대기실로 내려왔다.
마침 진료가 끝났는지 아그네스와 마리가 진료대기실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다들 오늘도 수고했다. 대충 정리하고 푹 쉬어.”
“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준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경비를 서고 있는 자경단원 중 한 명에게 명했다.
“바이런 단장께 전언이 있다. 한 시간 뒤쯤 촌장님 댁에서 같이 뵙자고 전해 줘. 중요한 일이다.”
“예. 즉시 전하겠습니다!”
전언을 받은 자경단원이 뛰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설렁설렁 뛰었겠지만, 지금은 빠릿빠릿했다. 준남작의 명이었으니.
준은 문을 닫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반나절 내내 홀로 환자를 상대한 루치아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래도 이런 생활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진료 도구를 치우는 그녀의 표정이 신의 전령 시절보다 훨씬 다양해진 것 같다.
“수고했어.”
“환자가 이 정도만 와도 참 편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근데 당신 오늘 좀 바빠 보이네요? 어디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 같던데.”
“재미있는 걸 하나 발견했거든.”
“얼마나 재미있기에?”
루치아가 눈웃음을 지었다. 준이 엄지로 밖을 가리켰고, 장소를 옮기자는 의미임을 알아챈 루치아는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준의 방으로 들어갔다.
준은 아공간 창고에서 금광석 덩이를 꺼내 루치아에게 던졌다.
“응? 이건 그냥 흔한 금광석이잖아요.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마을 뒷산 근처에서 발견된 지하 동굴 있지? 거기서 캐 온 거야.”
“지하 동굴이라면…… 아! 배런이 굴러떨어졌다던 거기 말인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루치아의 눈에도 흥미가 돌았다.
“그새 탐사를 다녀온 거예요? 부지런도 하시네. 그런데 어차피 금맥이 나오든 다이아몬드가 나오든, 당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 않아요? 아공간 창고에 그것보다 귀한 것들이 많으니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지. 내가 아니라 이 마을을 대입해서 생각해 봐.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요. 홀라당 영주한테 빨아 먹히겠죠.”
이곳 누아는 영주의 자치령이었다. 봉토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주가 직접 관리하고 세금을 걷는다. 당연히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가면 영주의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배런이 크게 다친 의미가 없지 않겠어? 다리가 두 개나 부러졌다면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보람이 있어야지.”
“설마…….”
다리를 꼬고 앉은 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금맥은 내가 먹을 생각이다.”
“어떻게?”
“합법적으로.”
그제야 루치아가 의도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이어 설명했다.
“일단 동굴로 통하는 입구는 막아 둔 상태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입구는 찾았어요?”
“찾았지. 그곳도 적당히 조치를 해 놨어. 내가 먼저 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은근히 다가온 루치아가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준의 얼굴로 밀착시켰다. 싱그러운 그녀의 향기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루치아가 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가만 보면 당신 정말 주도면밀한 부분이 있다니까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단 말이야. 지금처럼.”
“너만 하겠어?”
이대로라면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준이 슬쩍 빠져나왔다.
루치아가 사냥감을 놓친 여우처럼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기회가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준은 그 길로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 * *
촌장의 집은 오랜만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준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자경단장 바이런이 촌장 아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남작이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다른 일을 미루고 곧장 달려온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준남작님.”
두 사람이 일어나 준에게 예를 취했다.
바이런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하 동굴 건으로 자경단은 물론, 마을에 비상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도 마르다 마을에 나타난 던전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그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들었는데 말입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일단 앉아서 느긋하게 차나 한잔하시죠. 날씨가 꽤 춥군요.”
“으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이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호통이라도 쳤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준이 앉자 아론은 끓여 둔 찻물을 찻잔에 따랐다. 그윽한 향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차향을 음미하며 준이 말문을 텄다.
“지하 동굴 탐사를 모두 끝냈습니다.”
“뭐라고요?”
바이런은 찻잔을 놓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반면 아론은 느긋하게 웃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게 사실입니까? 준남작님 혼자서 그곳을 탐사했다고요?”
“별로 위험하진 않은 곳이었습니다. 지형이 조금 험하긴 했는데 몬스터는 전혀 없더군요.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 다니시는 건 위험할 텐데요.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리는 영주님의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동행이 있으면 불편해서.”
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아 마을의 두 어른은 이어질 준의 말에 집중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지하 동굴 안쪽에서 금맥을 발견했습니다.”
“뭐요?”
바이런이 벌떡 일어났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아론마저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금맥은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되찾은 바이런이 다시 자리에 앉아 의문을 표했다.
“금맥? 금맥이라 하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곳에 금맥이 있다는 겁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한번 살펴보시지요.”
준은 가방에서 금광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혜가 풍부한 아론이 아들 대신 감정을 했다.
“오! 순도가 굉장히 높은 광석이군. 매장량은 얼마 정도로 추측하십니까?”
“남에게 주기 아까울 정도로.”
“허허.”
정확한 수치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아론과 바이런은 직감적으로 엄청난 양의 금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금광석을 준에게 돌려준 아론이 소감을 밝혔다.
“어쨌든 우리 마을과 영지에는 좋은 소식이 분명하군요. 드뇌르 백작께 서둘러 이 사실을 고해야겠는데…….”
“잠깐 보고를 미루는 건 어떻습니까?”
“보고를 미룬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곳 누아는 영주의 자치령. 보고가 들어가게 되면 금맥은 영주님의 것이 되겠지요.”
바이런은 눈을 껌뻑이며 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 그의 아버지 아론은 그제야 준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준남작께서는 이곳을 봉토로 받으실 요량이신 것 같군요. 맞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연회에서 다른 영주들이 남작위와 봉토로 여러 제안을 했었습니다. 그걸 잘 이용한다면 이곳을 봉토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렇군요. 게다가 파비안 님의 만성 두통까지도 해결하셨으니 일은 쉽게 풀리겠지요. 허허허.”
“저는 말입니다.”
준은 말을 끓고 잠시 뜸을 들였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곧 그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금맥을 세상의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쓸 계획입니다. 두 분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협력하겠소이다.”
“아버지!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바이런은 준의 제안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건 영주를 기만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아론은 바이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성에서 공식적으로 탐사를 한 게 아니라 괜찮을 게다. 실제로 우리 눈으로 금맥을 본 것도 아니지 않느냐? 준남작께서 우릴 속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넌 누아 마을의 자경단장이다. 더 이상 왕실의 검이 아니란다. 잊었느냐?”
왕실의 검?
준이 흥미로운 눈으로 바이런을 살폈다.
‘왕실의 검이라면…….’
‘왕실의 검’ 자체는 상당히 모호한 표현이다. 왕실기사단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아비루나 왕실기사단은 누구나 탐내는 고위직으로, 그곳에서 활동했다면 아무리 그가 이런 시골 마을에 있다고 해도 누군가 언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도 바이런의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비밀기사단일 가능성이 크겠군.’
베일에 싸여 있던 그의 과거가 살짝 드러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준은 모른 척하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두 부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두 부자는 한참을 토론했다. 그만큼 바이런의 고집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론의 지혜와 경험을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좋습니다. 협력하지요.”
“잘 생각했다. 허허허. 준남작님. 이제 당신의 뜻을 마음껏 펼쳐 보시지요.”
“두 분이라면 제 의견에 동조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든든하군요.”
찻잔을 싹 비운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과 바이런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좀 더 계시다 가지 그러십니까?”
“갈 길이 바쁩니다. 서둘러 켈세타로 가서 영주님을 뵈어야지요.”
준은 바로 진료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아그네스는 오늘도 진료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료소 안이 무척 고요했다.
2층으로 올라간 준은 루치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루치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준 쪽으로 몸을 돌리니 얇은 잠옷 너머로 속옷이 살짝 보였다. 고혹적인 미소로 준을 바라보았지만, 준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안 추워? 좀 두껍게 입지.”
“참 당신은 낭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네요. 남자 구실 하게 하려면 좀 힘들겠네.”
루치아가 빈 옆자리를 손으로 쓸어 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에요? 응? 뭐라고요? 무서워서 같이 자야겠다고? 좀 어려운 부탁이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이리 와요.”
“켈세타에 다녀올 계획이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 사흘이면 될 거 같은데. 진료소 좀 잘 부탁해.”
“나보고 진료소를 지키고 있으라는 말이에요?”
준은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치아는 몸을 홱 돌려 버렸다.
“싫어요. 나도 내일부터 휴가 가 버릴 거야.”
“루치아.”
“잘 자요.”
루치아가 나가라고 손을 홰홰 저었다. 한숨을 내쉰 준은 뚜벅뚜벅 걸어와 루치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몸이 홱 준 쪽으로 돌아섰다.
깜짝 놀란 루치아가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쥐었다.
너무 가까웠다.
준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아니, 그냥…….”
부끄러운지 루치아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준은 그녀의 턱을 잡고 돌리더니 입을 살짝 맞췄다. 루치아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특근 수당. 이 정도면 사흘 치로 충분하지?”
루치아의 양볼이 빨개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준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딱 사흘이에요! 하루라도 늦으면 파업할 줄 알아요!”
“약속하지. 잘 자.”
그 길로 진료소를 나선 준은 인적이 없는 뒷산의 골짜기로 향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동굴로 들어가 마법진을 그렸다.
그것은 켈세타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이었다.
「축하해요! 드디어 루치아 님의 입술을 훔쳤군요. 이제 다음은…….」
“쉿. 조용히.”
준이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푸른 광채가 쏟아지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파팟!
잠시 후, 그곳엔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