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뒤통수? (2)
목적지에 도착한 준은 걸음을 멈췄다.
주변은 고요했다. 높은 절벽과 나무가 적당히 펼쳐져 있는, 누아 마을에서는 굉장히 흔한 지형이었다.
이곳에도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솨아아!
준은 손을 휘둘렀고, 순간 눈발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길을 만들었다.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나타났다.
「저긴 어떻게 들어가죠?」
“방법이 있겠지.”
부딪쳐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준은 일단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바로 끝이 보일 정도로 짧았다. 벽에 손을 대니 가벼운 저항감이 느껴졌다.
“생각보단 쉽겠어.”
준은 벽에 손을 댄 채 마나를 흘렸다.
순간 마치 벽이 액체로 변한 것처럼 몸을 빨아들였다. 그렇게 준은 벽 너머에 위치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은 따뜻했다. 그리고 밝았다. 곳곳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큰 돌을 깎아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거나, 바위를 적당히 다듬어 침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돌침대 위에 카이엔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대가 여긴 무슨 일로?”
“방해해서 미안하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해라.”
“혹시 이 근처에 던전을 만들었나? 지하 동굴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어. 누아 마을 자경단원 중 한 명이 크게 다쳤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볼카누스가 이 장면을 봤다면 시치미를 뗀다며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준의 어깨에 앉아 있던 릴리가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무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마계의 대공이었다. 힘을 잃었다고 해도.
“후후후. 귀여운 꼬맹이로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준은 손짓을 해 릴리를 뒤로 물렸다.
“아무래도 던전은 네 전문이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본 거야. 혹시 모르니까. 네가 무리해서 던전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마족이 만들었을 수도 있잖아?”
“둘 다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다른 마족이 왔다면 내가 그쪽으로 갔겠지.”
“만약 그 마족도 부상을 입어 기척을 느끼기 어려웠다면?”
날카로운 질문에 카이엔은 묵묵히 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부상을 당했다면 기척을 읽기가 어렵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알았다. 네가 한 짓이 아니라니 안심이 되는군.”
“마계의 대공은 약속을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 온 김에 진료나 하자.”
준은 왕진 가방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었다. 카이엔은 가부좌를 풀고 돌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준이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눈을 감은 채 카이엔이 물었다.
“볼카누스, 그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너와 싸울 날만 기다리고 있지.”
“역시 그런가.”
카이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20주 뒤가 걱정되나?”
“나와 싸운다면 분명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게 될 터인데…… 그는 치료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카이엔이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상당히 공허해 보였다.
“내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치료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안 그런가?”
“마계 대공이 이렇게 상냥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모든 걸 잃었지만 그는 아직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설마 거기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준은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옆에 볼카누스가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웠다.
“그런 얘기는 볼카누스가 옆에 있을 때 하면 좋겠군. 아니면 좋은 술 몇 병 사서 레어로 찾아가든가.”
“발을 내딛는 순간 브레스가 날아오진 않을까?”
“겉으론 경박해 보이지만 그도 용족의 로드다. 약조를 쉽게 저버리진 않겠지. 적어도 20주 내론 안전할 거다.”
이번 대화를 통해 준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카이엔은 그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상황만 잘 풀 수 있다면, 두 강력한 존재의 충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준은 차근차근 꼬인 실타래를 풀어 보기로 했다.
“자, 이제 끝이다. 오늘은 편히 쉬면 돼. 내일 진료 받으러 오는 거 잊지 말고.”
“고맙다. 강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무엇이?”
“마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오늘이 두 번째야. 왠지 너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닌가?”
“세상일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니던가? 어둠이 없다면 빛도 없겠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
모호한 말이었지만, 그 진의를 파악한 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왕진 가방을 들고 동굴을 나섰다.
* * *
대기실엔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폭설이 사람들의 발을 묶은 모양이었다.
데스크에서 하룬 대신 접수를 보던 마리가 밖으로 나왔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왕진 다녀왔다. 카이엔이 오기 어려울 것 같아서.”
“카이엔 씨는 어디에 묵고 계세요?”
“마을 근처에서 지내고 있다. 눈이 많이 와서 꼼짝없이 갇혀 있더군.”
“가방 이리 주세요.”
마리는 준의 왕진 가방을 받아들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루치아가 환자를 보고 있었다.
“미끄러지신 것치곤 크게 안 다치셨네요. 운도 좋으셔라.”
“뚝 하는 소리가 났는디?”
“괜찮아요. 뼈는 멀쩡하고, 근육이 조금 놀란 것 같아요. 마법으로 치료해 드릴 테니 염려 놓으세요. 깨끗이 나을 거예요.”
믿음직한 한마디에 나이 지긋한 노인이 침상에 몸을 뉘었다.
루치아가 통증이 있는 부위에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덕분에 보조를 서던 아그네스에게 잠시 여유가 생겼다. 그녀가 준에게 다가왔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환자가 많이 왔나?”
“아뇨. 오늘은 한가로워요. 눈이 많이 와서 환자분들이 별로 안 올 것 같아요. 근데요, 선생님.”
아그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게.
“카누 씨요. 어제 열이 있어서 종합감기약을 받아 가셨는데 좀 마음에 걸려서요.”
“어떤 부분이?”
“배탈 증세가 좀 있었거든요. 혹시 감기가 아니라 다른 병이 아닌가 싶어요. 진료소에 와야 하는데 눈 때문에 못 오고 계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준은 마리가 놓고 간 왕진 가방을 아그네스에게 건넸다.
“걱정되면 한번 다녀와 봐. 루치아 선생 보조는 마리에게 부탁하고.”
“제가요?”
“열심히 공부했으면 실력을 발휘할 기회도 있어야지. 무슨 병인지 네 눈으로 확인하고 와라.”
“네!”
아그네스는 준의 왕진 가방을 들고 진료실을 나갔다. 그러다 다시 안으로 들어와 외투와 목도리를 걸쳤다. 마음이 앞서 외출 준비를 까먹은 것이다.
준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환자를 살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네. 다녀올게요!”
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그네스 말대로 환자는 더 올 것 같진 않고. 역시 내가 직접 다녀오는 게 좋겠어.’
이럴 땐 차라리 혼자 움직이는 게 좋다. 동행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준이 조용히 진료소를 나섰다.
「이얏호! 동굴 깊숙한 곳에 어마무시한 몬스터가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간만에 팝콘 좀 튀기게.」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대충 잘게 썰어서 볼카누스 아재네 레어 지키고 있는 강아지들한테 던져 주면 되잖아요?」
나름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동굴에 아무것도 없는 게 더 좋은 일이었다. 과연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까. 가벼운 고양감을 느끼며 준이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치 바람처럼.
* * *
“배런이 크게 다칠 만한데? 상당히 깊어.”
하룬에게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깊어 보였다. 게다가 바닥 면이 고르지 않아 떨어지면 상당히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준은 구덩이 아래로 조심스레 몸을 날렸다.
“라이트.”
머리 위로 하얀 광원이 떠올랐다. 시커먼 어둠이 물러나며 길을 드러냈다. 사방을 살핀 준은 단번에 이곳의 정체를 파악했다.
“천연 동굴이군.”
마르다 마을에 생성된 던전과 비교했을 때 인위적인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세월이 천천히 조각한 아름다운 동굴이었다.
동굴 통로 천장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준이 서 있는 곳 앞뒤로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그래도 몬스터가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준은 손을 하늘 쪽으로 뻗었다. 그가 마나를 일으키자 땅이 흔들리며 구멍이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곧 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 규모의 동굴이라면 어딘가 분명 출구가 있을 것이다. 없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뚫고 나가도 되고.
주변을 한차례 살핀 준이 탐사를 시작했다.
한참을 지나도 길을 막는 존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트랩도 없었다. 간혹 바닥이 미끄러운 곳이 있긴 했지만 자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외길이라 길을 헤맬 염려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은데?”
기감을 상당히 끌어올렸는데도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몇 개 걸려들긴 했지만 그것은 지상에 있는 것들이었다.
「에잇!」
짜증이 난 릴리는 팝콘을 튀기다가 엎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동굴의 끝이 보였다. 그곳도 자연스럽게 폐쇄되어 있었다. 졸졸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은 눈을 감고 방위를 살폈다.
“입구는 반대편인 것 같다. 꽤 깊숙한 곳까지 내려왔어. 여기가 동굴의 끝이야.”
「이 너머에 뭔가 있지 않을까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한번 부숴 봐요.」
“충격을 주면 지반이 무너질 수도 있어. 위험하다.”
「뭐 어때요? 무너져도 마스터는 꿈쩍도 안 할 거면서.」
릴리는 벽으로 날아가더니 날개를 파닥거리며 주먹질했다. 당연히 벽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구석에서 뭔가 반짝였다.
릴리가 내던 빛을 무언가가 반사한 것이다. 돌아서려던 준의 눈에 그 빛이 보였고, 준은 다시 몸을 돌려 막다른 벽으로 다가갔다.
「헐. 진짜 부수게요? 잠시 헬멧을…….」
“뭔가 반짝이는 거 같은데. 이게 뭐지?”
벽 위로 새하얀 돌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준은 안력을 돋웠다. 뭔가가 벽에 묻혀 있었다. 빛에 번쩍이는 광물이 제법 많이 보였다.
정령인 릴리는 그 물질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와우! 이건 수정이네요. 여기 동굴이 아니라 광맥인가 본데요?」
“광맥?”
직감이 준을 움직이게 했다. 그가 막다른 곳에 섰다. 그리고 고민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마나를 듬뿍 담은 주먹이었다.
꽈르르릉!
엄청난 충격에 벽이 무너지며 사방으로 돌덩이가 튀었다. 뽀얀 먼지가 사라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확인한 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금맥이에요!」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수정은 눈속임이었다. 막다른 벽 너머에 숨어 있던 것은 금빛 알갱이가 박힌 암석들이었다.
쾅! 꽈르릉!
준의 주먹이 쉴 새 없이 벽을 파헤쳤다. 그럴 때마다 금광석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파고 들어가도 금광석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날 뿐이었다.
준은 바닥에 잔뜩 깔린 금광석을 바라보았다. 릴리는 옆에서 순도가 굉장히 높은 금광석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배런이 제일 좋아하겠어. 여길 처음 발견한 사람이니까.”
준은 바닥에 떨어진 금광석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아공간 창고에 넣었다.
그 길로 진료소로 돌아온 준은 금광석 샘플을 꺼내 정밀 분석을 시작했다.
곧 결론이 나왔다.
‘순도가 상당히 높군. 이 정도면 최상급 광맥이 분명해.’
금광석을 손에 쥔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는 계획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