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뒤통수? (1)
“추워 죽겠는데 아침부터 작전이라니. 쳇.”
하룬은 투덜거리며 장비를 챙겼다. 힘들게 진료소까지 왔는데 자경단 본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검과 방어구를 다시 착용했다.
아그네스가 물었다.
“무슨 작전인데?”
“새벽에 눈이 많이 왔잖아. 주변에 조난당한 사람이 있거나 위험한 곳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하시네. 최근에 준 선생님 덕에 외지인들이 많아져서 그래. 카이엔 씨도 그렇고.”
“그런데 조사하다 오히려 네가 조난당하면?”
“자경단의 에이스는 쉽게 당하지 않아.”
하룬의 손은 재빨랐다. 마을과 주민들을 위한 마음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 이거 빌려줄게.”
아그네스는 자신이 하고 있던 털 귀마개를 하룬에게 씌워 주었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하룬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뭘 이런 걸 다…….”
“오해하지 마. 동상에 걸리면 치료하기 귀찮으니까 빌려주는 거야.”
“누가 오해를 한다고 그래?”
장비 착용이 모두 끝났다.
이젠 가죽 갑옷과 장검이 그럴듯하게 보였다. 대신 플레이트 메일에 붉은 망토를 휘날리면 어떨까.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그네스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조심히 다녀와. 다치지 말고.”
“감히 이 하룬 님을 다치게 할 자 그 누구인가!”
“허세는.”
싱겁게 웃은 아그네스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벽난로를 정리하고 불을 붙였다. 안이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아그네스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모든 것이 새하얬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그네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감탄이 아니라 한숨이었다.
“적당히 좀 오지. 이걸 언제 다 치운담?”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녀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렸다. 여행자라면 모를까, 차라리 눈은 안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창고로 가서 제설 도구를 꺼냈다. 진료소와 마을로 이어진 길을 전부 치우진 못하겠지만, 마당이라도 정리해야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슥슥슥―
아그네스는 부지런히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쌓인 눈을 옆으로 퍼내 길을 확보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리가 뻐근해질 무렵 문이 열리더니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은?”
“일어나셨어요. 지금 세안하고 계세요.”
“근데 어디 가려고? 멋지게 차려입었네.”
마리는 켈세타에서 준이 만들어 준 ‘무한의 지팡이’와 ‘심연의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이젠 마법사처럼 보였다.
“안 추워?”
끄덕끄덕.
마리가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눈은 제가 치울게요.”
“눈을? 아.”
무한의 지팡이에 달린 큐브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아그네스는 마리의 의도를 눈치챘다.
위이이잉!
큐브의 회전이 점점 빨라졌다. 눈을 감은 마리는 나직이 주문을 읊조렸고, 성스러운 푸른빛이 지팡이에 맺혔다. 곧 지팡이로 바닥을 탁 내리쳤다.
쿵!
쏴아아아!
지팡이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마나의 파동이 순식간에 눈을 녹였다. 정확히는 눈을 물로 바꾸었다. 물이 쏟아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목격한 아그네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마리는 생활 마법을 정말 잘 다뤘다. 속성에 대한 감응력이 좋은 탓도 있지만 응용력이 비상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펼친 마법도 불을 전혀 이용하지 않은, 순수한 마나로 속성을 변환시킨 것이었다. 수준 낮은 마법사들이나 화염구를 날렸을 터다.
“덕분에 살았네. 고마워. 이거 언제 다 치우나 걱정했는데.”
마리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글쎄. 과연 그럴까?”
루치아였다. 그녀가 물로 흥건한 마당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엔 눈을 녹이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란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더 위험해지거든. 그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 잘 봐 둬.”
딱!
루치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흐르던 물이 일순간 증기가 되어 증발해 버린 것이다.
마당에 있던 모든 물기가 사라졌다. 마치 이곳만 눈이 오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마리까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그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좀 더 공부하도록 해. 꼬마 아가씨.”
“네…….”
준이 이 장면을 봤다면 짓궂다고 말할 정도로 얄밉게 웃은 루치아가 진료소로 돌아갔다.
무한의 지팡이에 달린 큐브가 점점 느려지더니 멈췄다. 어느새 마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완벽한 패배였다.
아그네스가 마리를 달랬다.
“기운 내. 너도 루치아 선생님 나이 정도 되면 대단한 마법사가 될 테니까. 응?”
“열심히 연습할 거예요.”
“맞아. 열심히 하면 못할 게 뭐 있겠어?”
아그네스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울고 있었다. 배부른 고민이 이런 건가 싶었다. 자기도 조금이라도 마나를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조금은 특별한 진료소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 * *
눈이 많이 온 탓인지 환자가 많이 줄었다. 아마 진료소까지 오는 것도 쉬운 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대기실이 소란스러웠던 것은, 신축 진료소 공사장 인부들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폴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중년 인부를 진찰한 준이 한눈에 진단을 내렸다.
“동상이군요.”
“이쪽도요.”
루치아도 동일한 증상을 지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발가락이 붉게 부어 있었고, 통증이 있었다.
현장 책임자인 폴링은 난처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폴링 씨의 잘못은 아니지요. 급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마음이 앞설 수도 있고 장비도 부실할 수도 있으니까. 거기에 날씨까지 도와주질 않았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금방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루치아도 한몫 거들었다.
“오히려 방치했다면 더 큰 일이 났을 거예요. 폴링 씨는 너그러운 분이라 이렇게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셨겠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하지만 폴링은 전혀 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인부들이 동상에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공사에 차질이 생긴다.
준은 그 속내를 꿰뚫어 보곤 처방을 내렸다.
“간단한 마나 요법으로 금방 치료가 될 겁니다. 중요한 건 예방인데, 이것도 같이 해결을 해 드리죠. 진료소 밖에 있는 인부들을 한곳에 모아 주십시오.”
“한곳에요? 예. 알겠습니다.”
“마리.”
준이 눈짓을 하자 마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폴링을 따라나섰다.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그네스였지만, 준이 치료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준과 루치아는 동상 환자를 치료한 다음 마법을 걸어 온몸에 온기가 유지되도록 했다. 이제 웬만한 추위에도 끄떡없을 것이다. 인부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건강하게 진료실을 나섰다.
“남은 인부들은?”
“없어요. 다른 환자분들도 안 계시고요.”
그때 문득 하룬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자경단원들은 괜찮을지 모르겠군. 하룬도 작전에 나갔다고 했지?”
“아침 일찍 나갔어요. 엄청 불평하면서.”
“엄청 걱정되는 건 아니고?”
“아, 아니거든요!”
새침하게 몸을 돌린 아그네스가 밖으로 나가 차트를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준은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루치아가 의자를 끌어다 옆자리에 앉았다.
“당신, 피곤하면 올라가서 쉬어요. 내가 대신 진료 볼 테니까.”
“됐어. 무슨 대가를 치르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요.”
“하라고 한 말 아니었나?”
그렇게 한가로운 대화가 오갈 때, 밖에서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하룬의 목소리였다. 꽤 다급해 보여 모두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뭐야?”
“배런이 순찰 중 부상을 당했어요!”
“어서 안쪽으로.”
조심스레 침상에 배런을 눕혔다. 자경단의 배런은 예전에 약초 채집을 나갈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준도 잘 알고 있는 청년이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상태가 꽤 심각했다. 양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두 다리가 완전 뒤틀려 있었다. 중상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지하 동굴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눈으로 덮여 있어서 안 보였던 모양이에요. 응급처치 키트를 쓰긴 했는데 상처가 너무 심해서 바로 진료소로 달려왔습니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숨 좀 돌려. 이봐, 배런. 치료를 시작할 거다. 몸에 힘 풀고 마음 편히 먹어.”
“으……으윽! 다리가…… 다리가!”
“알고 있어. 다시 걸을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준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갑옷을 해체했다. 가위로 자를 수가 없어 마나를 이용해 손쉽게 잘라냈다. 나머지 부분은 가위로 깨끗이 잘라냈다.
양쪽 팔의 살점이 찢겨 있었다. 출혈량에 비해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루치아 선생. 팔을 부탁해. 나는 다리를 맡지.”
“알았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외상은 빠르게 아물었다. 문제는 뒤틀린 다리였다. 준은 뼈가 빨리 붙을 수 있도록, 뒤틀린 다리를 절묘하게 돌려가며 마나를 불어 넣었다.
두드드득!
“으아악!”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참아 봐. 이 정도도 못 참을 정도로 훈련이 무르진 않았을 텐데?”
“윽!”
배런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 냈다.
곧 틀어진 두 다리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마나를 거둔 준은 아그네스가 건넨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운이 좋구나. 마나 유저가 둘이나 있는 진료소에 실려 오다니. 마나로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을 거다.”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침대에 누워 쉬는 게 좋겠어. 하룬, 배런을 입원실로 옮겨라.”
하룬과 동료 자경단원은 침상을 들어 2층 입원실로 옮겼다.
‘지하 동굴로 떨어졌다고?’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준은 곧 입원실로 올라갔다.
잠시 후, 하룬은 착잡한 표정으로 입원실을 나서다가 깜짝 놀랐다. 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 동굴은 뭐야? 누아 마을 근처에 그런 동굴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 없는데.”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눈이 가득 덮여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한 4미터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
“단장님은?”
“조사단을 꾸린다고 합니다. 동굴처럼 통로가 있고 꽤 깊어 보였거든요.”
턱을 괸 준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그런 동굴이라면 위험 요소가 많을 것이다.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누군가 만든 곳이라면 트랩이 존재할 수도 있다.
“혹시 던전은 아니겠죠? 마르다 마을에서도 비슷한 게 있지 않았습니까?”
“확인해 봐야 아는 일이다. 천연 동굴일 수도 있고, 광맥일 수도 있지. 일단 지금 단장님께 가서 조사단 파견은 보류해 달라고 말씀을 드려라. 상황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서 전하겠습니다.”
“배런은 아무런 문제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는 거 잊지 말고.”
하룬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나타났다.
「설마 그 마족 할배가 던전을 만든 걸까요? 와, 그런 거라면 제대로 뒤통수인데!」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해도 아직 그만큼 힘을 비축하지 못했을 텐데……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약한 척 연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고요! 속으면 안 돼요!」
결심을 세운 준은 왕진 가방을 들고 진료소를 나섰다.
목적지는 뒷산에 있는 카이엔의 밀실이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지만, 준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볼카누스가 보여 줬던 그 영상의 위치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