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족발은 언제나 옳다
카이엔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몸이 멀쩡한 걸 보니 볼카누스와 다투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준이 펜을 쥐며 물었다.
“상태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다. 확실히 내상이 치료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군.”
준은 차트에 ‘경과 양호’라고 적었다. 그리고 몇 가지 소견을 덧붙일 때 카이엔이 물었다.
“치료 기간은 당겨질 수 있나?”
“얼마든지. 모든 병은 생활환경과 심리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아. 그래서 아플 땐 마음 편히 푹 쉬는 게 중요하지. 볼카누스도 진단보다 빨리 치료가 됐다. 아직 약을 좀 더 먹어야 하지만.”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은퇴한 것 치고 꽤 바쁘게 지내는 것 같다. 밖에 환자들이 굉장히 많더군.”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지.”
“만족스럽나?”
“만족스럽지 않다고 어쩔 수 있나. 즐기는 수밖에.”
빤히 준을 바라보던 카이엔이 눈을 감았다.
준은 홀로 치유마법을 전개했다. 루치아가 거들 때보다 더 오래 걸리겠지만, 그녀도 환자를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볼카누스가 찾아오진 않았나?”
“찾아오진 않았지만 기척은 느껴지더군.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지.”
“꽤 신경 쓰이겠네.”
“그 정도도 감수하지 못할 거였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고개를 끄덕인 준은 치료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치료가 끝난 이후, 카이엔은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만 하고 진료소를 떠났다.
마리가 다음 환자를 데리러 나간 사이 릴리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카이엔 저 마족 있죠. 예전에 제가 알던 그 마족이 아닌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뭔가 되게 순하다고 해야 할까…… 카리스마도 없고 물러 터진 느낌이잖아요. 그 철혈의 대공이. 설마 늙어서 그런가? 마스터는 못 느꼈어요?」
‘내상 때문에 그래. 20주 뒤에는 완전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거다.’
「헐? 그럼 예전처럼 그 무서운 마족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글쎄.’
장담할 수는 없었다. 마계가 소멸했다는 변수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의 눈동자에는 허무함이 담겨 있었다. 준도 느꼈었던.
그때 마리가 들어왔다. 혼자 들어왔다는 건 환자가 없다는 의미다.
“선생님. 잠깐 쉬셔도 될 것 같아요.”
“그래.”
옆쪽을 보니 진료를 끝낸 루치아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준은 식당으로 향했다. 거대한 솥의 뚜껑을 여니 돼지족발이 펄펄 삶아지고 있었다. 군침이 도는 냄새를 풍기며.
‘좋아. 아주 잘 익었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준이 가장 실한 돼지족발을 집어 솥에서 꺼냈다. 그것을 도마에 올린 뒤 커다란 칼을 잡고 얇게 썰었다.
그때, 냄새에 홀린 아그네스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와, 진짜 맛있을 거 같아요. 이건 무슨 요리예요?”
“족발이라는 거다. 돼지 발을 특제 소스에 푹 삶은 요리지. 마을 분들이 놓고 간 재료를 가지고 한번 만들어 봤어.”
“아침에 드신 스튜가 정말 맛이 없긴 했나 봐요. 이런 걸 다 만드시구.”
아그네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준은 아그네스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마리는?”
“하룬이 스튜 먹다 뿜어서 좀 상처받은 것 같은데, 이젠 회복됐어요. 그런 걸로 의기소침할 애 아니잖아요. 오히려 요리를 배우겠다고 의욕이 넘치던데요?”
“잘 가르쳐 줘. 아무튼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해결해라. 많이 삶았으니까 내일까지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때, 종소리가 울려 아그네스가 급히 대기실로 나갔다. 잘 썰린 족발을 그릇에 가득 담은 준은 통째로 아공간 창고에 넣었다.
오늘 밤 볼카누스를 찾아갈 생각이었고, 족발은 그에 곁들일 안주였다. 술 하나로 그의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아그네스의 외침에 준은 손을 털고 밖으로 나갔다.
* * *
오늘 진료도 무사히 끝났다.
준은 호프만이 주고 간 술병과 왕진 가방을 손에 들고 진료소를 나섰다.
옆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인부들은 폴링의 정열적인 지휘하에 열심히 움직였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초 예상 인원의 두 배가 이번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마이더스 상단이 빠른 완공을 위해 인력을 투자한 것이다.
그 대목에서, 준은 그들이 상비약 사업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오히려 진지하게 나오는 쪽이 좋다. 제대로 한판 벌일 수 있을 테니까.
「볼카누스 아재네 레어로 가려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산길로 접어들자 릴리가 나타났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잖아. 오늘 약초 배달도 안 왔고. 분명 레어에 틀어박혀 분을 삭이고 있을 게 틀림없어.”
「약초 채집을 매일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는데 하루 정도는 쉬는 거겠죠. 농땡이에 특화된 성격이잖아요.」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숙적이 나타났는데 마음 편히 약초나 캐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카이엔이 어디에 짐을 풀었는지는 파악하고 있을 거다. 그도 감시를 받고 있다고 했고.
그렇게 레어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준은 볼카누스가 본격적으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컹컹!”
“못 보던 놈이군.”
문지기 하수인이 두 마리로 늘었고, 심지어 두 마리 다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준은 늘 그렇듯 아공간 창고에서 돼지고기 덩어리를 꺼내 던져 주었다.
평소였다면 멍멍거리며 달려들었을 텐데, 두 마리의 화염 늑대들은 고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위풍당당하게 보초를 섰다.
준은 바닥에 나뒹구는 돼지고기를 다시 아공간 창고 안에 집어넣고 하수인들을 지나쳤다.
그런데 레어 안은 그보다 더욱 심각했다.
야생화로 풍요로웠던 레어 내부가 지옥처럼 변해 있었다. 꽃과 풀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가끔 땅이 흔들리며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엉망진창이네요. 볼카누스 아재, 상처가 도지거나 하진 않을까요? 이러다 화병 나겠는데.」
“거의 회복되었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야. 문제는 카이엔이 완치된 이후다.”
「확실히 그건 그렇죠. 마계의 대공과 용족의 로드. 두 존재가 충돌하면 누아 마을 정도는 지도에서 지워지겠죠?」
“누아 마을 하나로 끝나면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이 세계에 사는 모든 것들이 소멸할 수도 있어.”
두 존재는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들 정도의 권능을 가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 하나를 황폐화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마스터는 쫄지 않네요.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요?」
준은 그저 웃기만 했다. 릴리는 확신했다. 그의 미소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어차피 물어봐도 안 알려 줄 테니 릴리는 잠자코 있었다.
곧 준은 안식처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웅장한 산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번뜩인 두 개의 안광. 볼카누스는 본체의 모습으로 안식처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목 아프다니까. 왜 그러고 있어?”
― 20주 후를 준비하고 있지.
볼카누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평소의 어딘가 헐렁해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은 말투가 아니었다. 그만큼 진지하다는 것이었다.
“20주면 한참 멀었어. 다섯 달이야. 다섯 달. 그때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야?”
―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지.
드드드드드!
볼카누스가 몸을 일으키자 안식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 볼카누스와 준 사이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영상이 나타났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카이엔의 모습이 마법진을 통해 비치고 있었다.
동굴이라기보다 절벽에 구멍이 뚫린 곳이었는데, 놀랍게도 카이엔이 막다른 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술법이었다. 던전을 만들 때 쓰는 술법을 응용한 것인데,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던전처럼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나도 거의 소진되지 않는다. 카이엔의 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 크르르르…… 겁도 없는 놈! 감히 내 레어가 있는 산에 도피처를 만들어?
볼카누스는 정말 화가 났는지 입과 코에서 증기를 뿜어냈다. 한편 영상을 보던 준은 턱을 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산에 거처를 만든 건가? 과연 대공다운 대범함이야. 뭐, 어차피 20주 동안은 안전할 테니까 그랬겠지. 안전은 네가 보장했잖아?”
― 역시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내버렸어야 했는데!
“화 좀 풀고 술이나 한잔하자.”
준이 자리에 앉아 아공간 창고에서 술상과 술잔을 꺼냈다. 그리고 가져온 술을 그 위에 올렸다. 그런데도 볼카누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
“안 마실 거냐? 이거 꽤 좋은 술이라던데.”
볼카누스의 거대한 두 눈이 술상 위에 놓인 술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확실히 못 보던 술이었다.
지금까지 준이 가져온 술 중 맛이 없는 것은 없었다. 특히 이 술은 뭔가 고급스러워 보였다.
볼카누스가 머뭇거리자 준은 아공간에서 뭔가를 하나 더 꺼냈다.
족발이었다.
“이건 족발이라는 건데, 술안주로는 아주 기가 막히지. 너 많이 먹으라고 잔뜩 삶아 왔으니까 같이 먹자.”
족발?
뭔지는 모르겠지만 볼카누스의 굳건하던 두 안광이 순간 흔들렸다. 특제 소스에 졸인 돼지고기.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준은 젓가락으로 살점을 하나 집어 새우젓에 푹 찍었다.
“그냥 먹는 것도 구수하니 좋지만, 이렇게 소스에 찍어 먹는 것도 아주 기가 막히지.”
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술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크, 죽이는군.”
― 음…….
“진짜 안 마실 거야?”
― 패잔병 놈도 거처로 사라지고 했으니 딱 한 잔만 할까.
곧 빛이 번뜩이며 볼카누스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그는 젓가락질이 서툴러 포크로 족발을 공략했다. 입 안을 족발로 가득 채운 그는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허! 제국의 황제로 유희를 나갔을 때도 먹어보지 못한 진미로군!”
“술안주는 이거 말고도 많아. 종종 한잔하자고. 같이.”
준이 술잔을 들어 건배하자는 시늉을 했다. 볼카누스도 잔을 들어 건배했다.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는데, 과연 독한 명주였다.
“나를 설득하러 온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마음을 이미 굳혔으니까.”
“설득할 생각 없다. 그냥 약속 지키러 온 거야. 켈세타에서 돌아올 때 맛있는 술 구해 오라고 한 거 잊었나?”
“음…… 그랬었지.”
괜히 무안해진 볼카누스였다. 혼자 술을 따라 벌컥 마셨다. 답답한 모양이었다. 준은 천천히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잔이 오가고 두 사람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준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그럼 고향에는 20주 뒤에 돌아가나? 카이엔과 한판 해야 하니까.”
“흥, 그래야겠지. 패잔병을 눈앞에 두고 맘 편히 갈 수야 있나?”
“또 바빠지겠군. 둘 중 하나, 아니 둘 다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테니. 그렇게 회복되면 또 싸우고, 회복되면 또 싸우고 왠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할 것 같아.”
“그럴 일은 없다. 단 일격에 소멸시킬 거니까.”
준은 대꾸 없이 홀로 술잔을 들이켰다. 윤기가 흐르는 족발 두 점을 집어 상추에 올린 뒤 쌈장과 같이 싸서 입에 넣었다.
“놈은 어디에서 만났나?”
“마르다 마을에 던전이 열렸었다. 탐사해보니 카이엔은 지하 코어에 앉아 있었지.”
“그곳에서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나 보군. 하여간 넌 착해서 탈이다.”
“아니, 그는 죽여 달라고 했다.”
“뭐라?”
“그것도 명예롭게 죽여 달라고 했었지.”
의외의 한마디에 놀란 볼카누스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그 입이 열리며 의문을 토해 냈다.
“근데 왜 살려줬어? 명예롭게 죽여 달라며.”
“왠지 우연히 그를 만난 것 같지 않아서. 마치 누아 마을 뒷산에서 너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운명 같은 걸 논하고 싶은 거냐?”
“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들더군. 이자를 치료해 주고 싶다고. 그래서 누아 마을로 오라고 했다. 그가 널 쫓은 게 아니니 오해는 말고.”
내막을 모두 들은 볼카누스는 다소 화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과거의 준은 신족의 첨단에서 적과 싸우던 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적개심이 아닌,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대체 왜?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볼카누스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애꿎은 술과 족발만 잔뜩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