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끝나지 않은 전쟁 (3)
싸리로 만든 빗자루 소리에 준은 눈을 떴다.
“음…….”
어제 잠을 설친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억지로 몸을 풀며, 창가로 가서 밖을 살폈다. 겨울용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른 아그네스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마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건가?’
늘 둘이 함께 마당을 쓸곤 했는데 마리 대신 자경단원 하나가 아그네스를 돕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아 마을을 오래 떠나 있었으니 부모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준은 직원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휴가나 휴식에 관대했다.
그때,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루치아인 줄 알았는데, 예상이 정확히 빗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마리였다. 준은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좀 이상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시긴 했는데…… 복장이 그게 뭐야?”
마리는 간호복 대신 켈세타에서 루치아가 사준 프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으니 묘하게 메이드 같은 느낌을 풍겼다.
“오늘부터 선생님의 시중을 들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에요. 이제 선생님께서 준남작이 되셨으니, 시중을 드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냐고 촌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쓸데없는 짓을.”
“영주님께서 전령을 보낼 때 그렇게 명령하셨대요.”
당차게 대꾸한 마리가 들고 있던 물통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준이 세안에 쓸 물이었다. 그녀는 손을 살짝 집어넣고 주문을 외웠다.
“버닝 핸드(Burning hand).”
부글부글.
마리의 손에서 발생한 강렬한 열기가 물통에 있던 물을 뜨겁게 만들었다. 마리는 다른 손으로 냉기 마법을 일으켜 온도를 적당히 맞췄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마리는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
“식사는 만들어 뒀으니 내려오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혹시 촌장님이나 너희 부모님께서 네게 일을 맡기신 거니?”
마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자원했어요.”
“네 병을 치료해 줘서 그러는 거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치유사라면 누구든 치료를 해 줬을 거야.”
마리는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마탑에 들어가는 견습 마법사들은 스승의 수발을 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마나를 다룰 줄 아니까 청소든 뭐든 쉽게 할 수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하는 건, 오히려 낭비 아닐까요.”
“흐음.”
아무래도 마리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준은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그럼 내려가서 준비하고 있을게요.”
마리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준은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세안을 하고 백의를 걸쳤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대기실로 내려오니 구수한 스튜 냄새가 났다.
때마침 진료실에 있던 루치아가 반갑게 웃으며 대기실로 나왔다.
“잘 쉬었어요?”
“그럭저럭. 아침은?”
“이제 먹으려고요. 그런데 마리가 시녀 역을 맡기로 했다면서요? 와아, 좋겠다. 어린 여자랑 붙어 다니고.”
“그럼 선생도 어린 남자 붙여달라고 해. 준남작이잖아?”
“아쉽게도 가상의 가문이라서요.”
두 사람은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식당으로 이동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리가 커다란 주걱으로 스튜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서 그런지 의욕이 넘쳐 보였다.
마리는 스튜를 그릇에 담아 테이블에 올렸다. 빵도 함께였다.
스튜의 색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각종 재료가 먹기 좋게 잘 썰려 있었다. 그런데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도 눈에 보였다.
루치아가 그것을 가리켰다.
“이게 뭘까요?”
“글쎄.”
루치아는 영 미덥지 못한지 빵을 먼저 집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가 요리를 해 본 적이 있던가? 문득 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많이 드세요.”
“그래. 잘 먹으마.”
준이 스튜를 한 숟갈 떠먹었다. 마리가 긴장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잠시 맛을 음미하던 그가 웃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내일부터 음식은 아그네스 언니에게 맡기는 게 좋겠구나.”
“죄송해요…….”
첫날부터 시무룩해진 마리였다.
* * *
식사를 모두 끝내고 식당을 나서려던 그때, 무장을 한 하룬이 안으로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을 보니 아침 일찍부터 훈련을 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열심이네. 마음은 굳힌 건가?”
“1차 목표라고 할까요? 우선 사우던 가의 기사단 시험을 치기로 했습니다.”
켈세타 성에서 받은 연수가 하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견고하게 조직된 기사단의 문화와 기강에 감탄했고, 좀 더 수련을 해서 하급 기사 시험을 치기로 했다.
일단 사우던 가의 기사로 활약하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왕실기사단의 문을 두드려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실 영향을 받은 건 하룬만이 아니었다. 아그네스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아그네스는 초급 치유사 시험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고, 마리는 마법 수련과 마법공학 공부에 몰두하는 중이다.
“언제 시간 괜찮으시면 검세 좀 봐 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이따 점심에 잠깐 보도록 하지.”
“근데 오늘 아침 메뉴는 뭐예요?”
“빵하고 스튜.”
“이야! 마리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던데 맛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어서 가 봐야겠어요.”
준은 스튜를 먹을 때 조심하라는 조언을 해 주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때마침 진료소의 문을 열고 낯익은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호프만 씨.”
“아이구, 준남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허.”
그는 누아 마을의 여관 겸 주점인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장이었다. 일전에 복부에 생긴 대동맥류 치료를 받고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져 있었다.
하대를 하던 그가 갑자기 존대를 하는 게 좀 어색했지만, 그건 앞으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전처럼 하대를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일 테니까.
“진료받으러 오신 겁니까?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진료소에 안 오셨던데요.”
“아아, 어디 불편해서 온 건 아닙니다. 작위 받으신 거 축하드리려고 이렇게 달려왔지요.”
“요즘 손님이 많아서 바쁠 텐데 이렇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준남작님 덕분에 우리 가게에 손님도 많이 늘고, 요즘은 방이 없어서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도 제법 생겼지요. 조만간 객실을 좀 더 늘릴 생각입니다.”
“잘됐습니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오, 내 정신 좀 봐! 자. 이거 받으십시오.”
“술입니까?”
준은 그가 건네는 커다란 병을 받았다. 제법 귀한 술인지 술병 위에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제가 좋은 날 먹으려고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던 건데, 마을에 경사도 생기고 이젠 술도 안 먹기로 해서 준남작님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하하. 왕도에 있는 친구가 보내 준 멋진 술이지요!”
“잘 마시겠습니다.”
양이 좀 적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볼카누스에게 선물한다면 좋아할 것 같았다.
‘아니, 카이엔 때문에 지금은 역효과가 나려나? 술병이 아니라 통을 가져오라고 할 것 같은데.’
준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매일 약초를 캐서 갖다 준다고 했으니 아마 오늘도 올 것이다. 이따 분위기를 봐서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준은 다시 호프만을 주목했다. 혈색과 체형 등 여러 가지를 살폈다.
“못 본 사이에 살이 좀 빠진 거 같은데요?”
“그럼, 당연하지요. 술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흠흠, 실은 마누라한테 들켜서…….”
“아픈 곳이 있으면 가능한 주변에 알리는 게 좋습니다. 뜻밖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신 김에 잠깐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요.”
준은 그의 배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렸다. 전에 볼카누스의 비늘로 처치한 부위가 느껴졌고,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마나를 거두고 손을 뗐다.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시술 부위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네요.”
“예전 생각만 하면 참 부끄럽습니다. 준남작님의 실력도 몰라보고 켈세타까지 왜 갔는지…….”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지요.”
그 이후로 호프만 말고도 몇몇 손님들이 더 왔다.
어제 환영식에 참석하지 못한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식용 채소나 빵 같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놓고 갔다.
준은 기쁘게 받았다. 보석과 돈 같은 것들이 아니라 더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선생님들! 잠깐 밖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그네스의 목소리에 진료실에서 준비하고 있던 준이 밖으로 나왔다. 루치아도 함께였다.
수많은 짐마차와 인력들이 진료소 옆 공터에 속속 모이고 있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낯이 익은 인물은 켈세타 성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폴링이었다.
“준남작님!”
폴링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정작 켈세타에 갔을 때 보지 못해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준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루치아를 폴링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미 소문이 다 퍼졌는지 그녀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새 진료소 공사가 오늘부터 시작되는 겁니까?”
“네! 도중에 좀 문제가 있어서 늦어졌는데 오늘에야 시작할 수 있게 됐네요. 켈세타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어떠셨습니까?”
“덕분에 편히 쉬다 왔습니다. 안 갔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하하하. 다행이군요.”
준은 폴링과 나란히 서서 인력과 자재 규모를 살폈다. 새 진료소 건물이 그렇게 크진 않지만, 워낙 시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 회관에 이어 가장 큰 건물이 될 것 같았다.
준이 물었다.
“완공은 언제쯤으로 예상하십니까?”
“봄이 오기 전에 끝내보려 합니다. 최대한 서두를 겁니다. 마이더스 상단 쪽과도 연결이 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그쪽에서도 공사를 좀 서둘러 주라고 하더군요.”
“봄이 오기 전이라.”
딱 좋은 시기였다. 그때쯤이면 상비약 개발도 진척이 있을 거고, 던전을 만들어 희귀 약초도 채집할 때다.
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건장한 일꾼들이 자재를 나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부상자가 생기면 우리 진료소에서 책임지고 치료를 해드리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상자가 생기지 않는 게 우선이니 면밀히 관리하겠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폴링은 당분간 누아 마을에 머물며 현장 감독을 한다고 한다. 중요한 임무이고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잘해 낼 것 같았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폴링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인부들을 모아 놓고 작업을 지시했다.
“우리도 슬슬 가야지?”
“그래요. 하, 아침을 조금밖에 못 먹었더니 기운이 안 나네요.”
“아그네스한테 간식이라도 좀 챙겨 달라고 하든가.”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진료소로 들어갔다.
일찍 찾아온 환자들이 데스크에서 접수를 하고 있었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지만, 누아의 진료소는 여느 때와 같이 환자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