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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68화 (68/175)

68화 끝나지 않은 전쟁 (2)

“상태가 악화되었군.”

마르다 마을의 던전에서 진찰을 했을 때보다 내상이 심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의를 걷어 보니 복부에 상처가 아문 흔적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처를 살피며 진단을 내렸다.

“다툼이 있었나?”

“오는 길에 도적들을 만났다. 숫자가 많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

“그곳에서 나올 때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한 모양이군.”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준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던전을 굳이 그곳이라고 표현했으니까.

지금은 힘을 거의 잃었지만, 한때 그는 마계의 브레인이었다.

루치아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새파랗게 어린 견습 치유사는 자신의 이름만 알고 있다. 아마도 그녀를 위한 연막 같았다.

마계의 대공은 아그네스를 한번 힐끗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장신구를 좀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된 모양이야. 오다가 모두 버렸다.”

“어디에?”

“한적한 호수에.”

강이 아니라 호수에 버렸다는 건, 언젠가 그것을 되찾겠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마계 대공의 성물을 아무에게나 넘겨주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복부에 남은 상처를 손으로 쓸어 만지며 살펴보던 준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그런데 이 상처는 언제 입은 거지?”

“사흘 전이다. 얼마 안 됐지.”

“고작 사흘? 자연적으로 아문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치유사를 만났나?”

“어떤 젊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다. 마침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며 나를 치료해 주겠다고 하더군. 이걸로.”

카이엔이 주머니에서 응급처치 키트를 꺼내 준에게 건넸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누가 만든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아그네스도 마찬가지였다.

누아 진료소의 응급처치 키트는 특별하다. 장인 펜터가 손수 만든 목제 상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외관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어? 이거 우리 진료소에서 만든 키트 같은데요?”

“아무래도 우리와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군. 젊은 친구라면…… 혹시?”

단서를 잡은 준이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며칠 전 켈세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흠칫 놀랐다.

“설마 그레이엄 공자님?”

“맞나?”

“그래. 그 이름이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그네스는 벌린 입을 가리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혹시 몰라 건네준 키트가 한 생명을 살렸으니까.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그런데 공자님은 어디로 가셨어요?”

“특별한 목적지는 없어 보였다. 대륙을 돌며 실력을 더 쌓은 다음 루치아 선생에게 결투를 신청할 거라더군.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 같았지.”

“어머. 그래요?”

루치아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얼마든지 도전을 받아 주겠다고.

“일단 내상을 다스려야 할 것 같군. 루치아 선생. 좀 도와줘.”

우우웅!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손을 뻗어 아낌없이 마나를 쏟아 냈다. 정순한 마나가 치유 마법으로 변환되어 카이엔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후…….”

카이엔의 입에서 편안한 날숨이 흘러나왔다.

엉망이 되었던 내부가 차차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누아 마을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

잠시 후 치료가 모두 끝났다.

워낙 많은 마나를 쏟아 내서인지, 준과 루치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그네스는 손수건으로 두 선생의 땀을 닦아 주었다. 누아 진료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이후로 준이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건 처음이었다.

“일단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나 요법으로 내상을 다스릴 계획이야. 그 이후에 약재를 쓸 생각이고.”

“완치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나?”

“변수가 없다면 20주. 처음 진단했을 때보다 4주 늘었다.”

카이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준이 물었다.

“그런데 머물 곳은 구했나? 오래 치료를 받으려면 당분간 정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여비도 떨어졌으니 근처에서 한번 구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상한 건 만들지 말고.”

준이 지칭한 건 바로 던전이었다.

마계가 사라졌다고 해도 카이엔은 마계 대공의 권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힘이 허락하는 대로 던전을 생성할 수 있다.

단순히 만들기만 하는 건 큰 문제가 없다. 던전은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는 법.

우연이라도 던전이 발견된다면 마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준은 그의 권능을 빌려 던전을 하나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긴 했다.

일부 희귀한 약초는 마족이 만든 던전에서만 채집 가능하다. 그래서 카이엔에게 부탁해 약초 채집용 던전을 하나 생성할 생각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하룬과 마을 자경단원들의 수련 장소로 사용해도 적합하다. 난이도를 적절히 조절한다면 큰 부상 없이 실전 경험을 쌓게 할 수 있다.

문제는 볼카누스였다.

과연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그가 카이엔의 존재를 용납할 것인가? 준이 잠시 그 고민을 하는 사이 카이엔은 던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네 걱정은 기우로 끝날 거라고 약속하지. 내 이름을 걸고.”

“이름까지 걸 필요는 없고. 일단 갈 곳이 없으면 입원실을 하나 내줄 테니 여기서 머무는 건 어때?”

“괜찮다. 나는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다.”

준은 더 붙잡지 않았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테니까. 아그네스가 몇 번 더 진료소에 머물기를 권했으나 카이엔은 거절했다.

그런데 돌연, 진료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카이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기운은 분명…….”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진료실을 나서더니 대기실에 멈춰 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홀로 전장에 선 장수처럼 외로워 보였다.

진료소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볼카누스였다.

“이봐 돌팔이! 좋은 술은 사 왔나? 켈세타에 그렇게 맛있는 술들이 많다며? 하하하!”

걸쭉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볼카누스가 정면에 있는 사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너는?”

“오랜만이군. 볼카누스.”

그제야 미약한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워낙 상대의 내상이 심해 카이엔의 기운을 미리 읽지 못한 것이다.

볼카누스의 인상이 단번에 구겨졌다.

카이엔이 심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선봉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대였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전쟁 초기에 큰 싸움에 휘말려 이곳으로 떨어진 겐가?”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 온 거냐? 설마 나를 추격한 거냐!”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이상했다. 만약 그랬다면 준이나 루치아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고개를 돌려 보니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무대에 선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 전쟁이 끝났다고 들었다.”

그때, 레어에서 준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아마 카이엔도 마찬가지겠지. 그도 고향이 있을 테니까. 마계가 소멸되었다고 해도 어딘가 갈 곳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준에게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볼카누스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 몸 하나 건사해 보시게? 무슨 낯짝으로 여길 들어와? 네놈 때문에 무수히 많은 내 부하들이 희생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손에 스러져간 나의 부하들도 셀 수가 없지.”

카이엔이 차분히 쏘아붙이자 볼카누스는 화가 더욱 치솟았다. 그 와중에 그는 카이엔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마음만 먹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평소라면 바로 본체로 돌아가 브레스를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한 존재가 있다. 볼카누스는 준을 바라보았다.

“놈의 치료는 얼마나 걸리지?”

“20주.”

콧방귀를 뀐 볼카누스가 카이엔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가 오만한 눈으로 마계의 대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좋다. 아량을 베풀어 네놈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 그때 다시 승부를 가리자. 어차피 마계의 패잔병 따위 한주먹거리도 안 되겠지만.”

“전쟁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전쟁이 끝났다고 죽은 부하들이 돌아오진 않으니까.”

“과연 그렇군.”

카이엔은 납득했다.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꼴깝 떨지 마. 제안을 한 게 아니다!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는 선전포고지. 두 선생들, 이번 일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 이건 우리들의 문제다.”

무서운 눈으로 준과 루치아를 쳐다본 볼카누스는 그 길로 진료소를 나가 버렸다. 쿵, 문짝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게 닫혔다.

“나도 이만 가야겠군. 오늘 치료는 고마웠다. 내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도록 하지.”

“괜찮겠나? 볼카누스의 말대로 나는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야.”

“20주 뒤라면 해 볼 만하겠지. 내가 왜 철혈의 대공이라고 불리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카이엔이 진료소를 나갔다. 뒤늦게 아그네스가 따라나서서 그를 배웅했다. 준은 진료실로 들어왔다.

루치아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쩔 생각이에요? 일이 너무 커진 거 같은데.”

“때로는 부딪치지 않으면 깰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낭만적이네요. 그래서 일부러 만나게 한 거다?”

약간 비꼬는 어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준은 조용히 웃으며 듣기만 했다.

“아무튼, 볼카누스 씨가 굉장히 서운해하겠어요. 한때 같은 진영에서 싸웠던 사이인데.”

“과거의 일일 뿐이지. 지금 나는 누아 마을의 치유사일 뿐이야.”

“과거의 일도 현재를 규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에요. 과거의 당신은 당신이 아닌가요? 왜 그렇게…….”

그러나 준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 루치아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던 그의 첫 번째 삶. 그리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윤회를 이어가야 했던 삶.

그 어떤 것도 좋을 게 없어 보였다.

결국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했네. 그래도 아그네스에겐 제대로 설명하도록 해요. 아까 정말 놀랐을 거예요.”

“알았어.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군.”

“괜찮아요. 난 누구보다도 당신 편이니까.”

루치아는 진료실을 나갔다. 잠시 후 아그네스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대단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선생님. 대체 무슨 일인가요? 볼카누스 씨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봐요.”

카이엔의 치료를 보조한 입장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의 숙적이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만난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준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적이다. 각자 자신의 진영에서 선봉장으로 서서 서로 칼끝을 겨눴지. 전쟁이 모두 끝났고,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앙금이 남았을 거다.”

“그런데 왜…….”

말이 생략됐지만, 준은 아그네스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눈치를 챘다.

“치유사는, 아니. 적어도 나는 환자를 골라 받지 않아. 일단 카이엔의 치료에 전력을 다할 거다.”

“제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그냥 모른 척, 지금처럼만 해 주면 된다. 다른 애들에겐 네가 잘 설명해 주고. 밖에 대기 중인 환자는?”

“아직 없어요.”

“그럼 진료는 여기까지 하지. 너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해.”

“예,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아그네스는 차트 정리를 마치고 진료소를 나섰다.

하지만 진료실의 불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준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치유의 여신 엘레나의 조각상을 손에 쥐었다.

“엘레나여.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참을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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