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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67화 (67/175)

67화 끝나지 않은 전쟁 (1)

성을 출발한 준의 마차는 바로 누아로 향하지 않았다. 잠시 들를 곳이 있었다.

마차가 멈춘 곳은 바로 마이더스 상단 켈세타 지부였다.

“일 마치고 바로 나올 테니 다들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날 거야.”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면 안 될까요?”

반짝거리는 아그네스의 눈을 확인한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바로 누아로 가니 당분간 켈세타엔 못 올 테니까.

“한 시간 뒤에 출발할 테니 늦지 않도록. 하룬. 아그네스와 동행해라.”

“옙.”

“루치아 선생은?”

“전 여기에 있을래요. 왠지 피곤해서.”

마차에서 먼저 내린 준이 상단 입구로 걸었다.

처음에 봤던 배 나온 문지기 두 명이 똑같은 위치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준을 알아보곤 바로 문을 열었다. 비상한 기억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무원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준남작님.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사무원이 웃으며 앞장을 섰다. 기별을 하지 않았는데 오는 걸 알고 있다니. 정보력도 출중하다는 것인가?

묘한 흥미를 느끼며 지부장실로 향했다.

마치 상단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정보조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 인력을 통해 정보망을 구축하는 시대였다. 대륙 전체에 유통망을 가진 거대한 상단이라면 자체적인 정보조직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부장님. 강준 준남작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안으로 들어가니 알파는 모노클을 끼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감색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모노클과 썩 잘 어울려 중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연회는 성황리에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데뷔를 축하드립니다. 이제 의학계뿐만 아니라 사교계에서도 선생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겠군요.”

“곧 사그라질 바람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씨익 웃은 알파가 자리를 권했다. 준은 왕진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알파는 준의 몫까지 두 잔의 차를 내오라 시켰다.

“킹스턴의 그레이엄 공자가 쫓겨났다더군요. 영지로 돌아가지 못한 것 같던데. 대체 어떻게 공자를 이긴 걸까요? 그 젊은 루치아 선생이.”

“수련을 끝내면 루치아 선생보다 더 강해져 있겠지요. 강함이란 상대적인 거 아니겠습니까?”

“아뇨. 제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건 누아 진료소의 구성원들 평균 나이입니다. 지나치게 젊은 것 같아서. 두 선생은 많이 봐야 20대 중반, 나머지 조수들은 10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요. 쌓아 올린 업적을 생각한다면.”

제법 눈썰미가 있는 사내였다.

준은 대답 없이 웃었다. 루치아를 두고 교단의 고위 성기사가 아니냐는 풍문까지 돌고 있었다. 굳이 나서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앞으로는 좀 조용히 살아야겠습니다. 주목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세상일이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선생도 많은 곳에서 제안을 받으셨더군요. 냉정하게 봐도 누아에 계신 것보다 훨씬 나은 제안이었는데…… 모두 물리친 이유가 뭡니까?”

“그냥 내키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것뿐?”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인생이 짧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하하하하!”

재미있다는 듯 알파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젊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기에. 하지만 준은 진심이었다.

곧 따뜻한 차가 나왔다. 준이 차향을 즐기기도 전에, 알파가 본론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계약서에 조항을 몇 개 추가했습니다. 이 조건을 맞춰주실 수 있다면 마이더스 상단과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호오?”

준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런데 알파는 추가한 조항을 확인하지도 않고 뒷면에 서명했다. 나머지 한 부에도 서명을 하고 하나를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꼼꼼한 사내라 추가 항목을 체크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계약서를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선생은 합리적인 사람이고, 어떤 조항을 추가한다고 해도 우리의 이익이 매우 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뭔가 큰 사업을 계획하고 있으신 모양이군요.”

“차근차근 알게 되실 겁니다. 종합감기약 정도는 몸풀기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만 알려 드리지요. 누아에 새 진료소 건물이 완공되면 바로 시작해 봅시다. 아마 선생도 그걸 원하실 테고.”

“좋습니다.”

마치 계약서를 살펴본 것처럼 알파는 준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지부장이 이 정도라면 그 윗선은 얼마나 배짱이 있는 자일까?

그렇게 아무런 협상 없이 용건이 모두 끝났다.

준은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마차를 출발시키려면 적어도 30분 이상은 이곳에서 보내야 했다.

“이제 누아로 바로 돌아가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그전에 조금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한판 어떠십니까?”

준이 체스판을 가리켰고, 알파는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곤 체스판과 말을 준비했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준 일행은 누아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행이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자경단장 바이런이 묵직하게 군례를 올렸다.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준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준남작위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간의 결례는 용서하시길.”

“소문이 굉장히 빠르군요.”

“허허허. 어제 켈세타에서 온 전령이 그 소식을 전하고 갔지요. 마을에 경사가 생겼다면서.”

촌장 아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말을 높이는 것을 제외하곤 변한 게 하나 없었다.

“이제 이 마을에서 유일한 귀족이 되셨으니 누아 마을의 관리 권한은 준남작께 드려야겠지요. 전 이제 물러나 편히 쉬겠습니다.”

“아닙니다. 마을 관리는 지금처럼 촌장님께서 계속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 진료소 하나로도 벅차니까요.”

“그럴 순 없지요.”

“그럼 이 훈장은 영주님께 반납해야겠군요.”

준의 은근한 협박에 아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준남작님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영주님께 벌을 받지 않으려면.”

“제가 받은 작위는 그저 장식에 불과합니다. 다들 예전처럼 절 편히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아 마을에 있는 한, 전 치유사일 뿐이니까요. 마음의 고향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바이런이 그랬다. 원칙주의자인 그는 준에게 경어를 썼다.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 준이 뭐라 할 수 없었다. 개인의 신념과도 같은 거니까.

준이 바이런에게 물었다.

“그간 마을에 별일 없었습니까?”

“다른 의미로 아주 시끄러웠지요.”

“다른 의미로요?”

“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으니까 말입니다. 몇몇은 여관에 묵고 있다고 하던데, 서둘러 진료소로 가 보셔야 할 것 같군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출발 전 차창을 열고 바이런에게 부탁했다.

“여관에 제가 돌아왔다고 알려 주시겠습니까? 오늘부터 바로 진료를 시작할까 합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왠지 이 상황을 즐기시는 것 같은데. 설마 놀리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이런이 다시금 군례를 취했다. 적잖이 부담스러웠지만, 준은 멋쩍게 웃으며 차창을 내렸다.

그렇게 마차가 다시 진료소로 출발했다.

* * *

진료소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풀 여유도 없이 켈세타 의료진과 교대했다. 그들은 준 일행이 타고 온 마차를 타고 바로 켈세타로 돌아갔다.

아그네스는 차트를 먼저 확인했고, 하룬은 창고를, 마리는 입원실을 정리했다. 준과 루치아는 스캐너와 전기충격기를 다시 원위치시키고 진료실을 정비했다.

아그네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켈세타에서 오신 분들이 잘해 주신 거 같아요. 차트가 더 늘긴 했는데 굉장히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다행이군. 약재는?”

“넉넉해요. 듣기론 볼카누스 씨가 매일 오셔서 약재를 채워 주셨대요.”

준은 피식 웃었다. 귀찮다고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렇게 열심히 해 주고 있을 줄이야.

준이 릴리를 호출했다.

‘레어로 가서 볼카누스에게 전해. 내가 돌아왔다고.’

「집 지키는 똥개는 좀 무서운데.」

‘귀찮은 건 아니고?’

「휴, 알았어요. 가요, 가!」

릴리가 투덜거리며 창밖으로 사라졌다. 준은 진료실 책상에 앉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뭔가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때, 마리가 들어와서 환자가 왔다고 알렸다.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치아 선생. 올라가서 좀 쉬어. 오늘 진료는 내가 맡지.”

“그래도 돼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를 걸친 준은 목에 걸고 있던 엘레나의 조각상을 다시 책상 위에 놓았다. 그 무렵, 마리가 환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앗?”

진료실을 나서려던 루치아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준도 마찬가지였다. 마리가 안내한 환자는 다름 아닌 철혈의 대공 카이엔이었다.

흙탕물에 굴렀던 그의 비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의복은 허름했지만 단정했고, 특유의 기품이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는 살벌할 정도.

“생각보다 일찍 왔네?”

“어제 도착했지. 여관에 머물다 그대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바로 왔다.”

“잘했어.”

아그네스가 빈 차트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카이엔은 쓸데없이 진지했고, 준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치아도 진료실에서 나가지 않았고.

준이 멍하니 서 있던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마리는?”

“올라가서 쉬라고 했어요. 오늘은 제가 보조하려고요. 그런데 환자분하고 아는 사이세요?”

“그래. 아주 잘 아는 사이지. 볼카누스와도 잘 아는 사이고.”

“잘됐네요.”

과연 잘된 일일까? 그건 잠시 후면 알 수 있는 일일 터다. 볼카누스 성격상 준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레어에서 내려올 테니까.

“진찰을 시작해도 괜찮겠나?”

“그전에 하나 묻고 싶다.”

“아그네스. 잠시 자리를 비켜 줘.”

고개를 숙인 아그네스가 재빨리 진료실에서 나갔다. 문이 닫혔고,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카이엔이 질문을 꺼냈다.

“그대는 왜 은퇴했나?”

그건 루치아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었다. 신의 대리인과 절대자가 동시에 은퇴했다. 무슨 의도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내 인생을 살고 싶어서. 지금까지의 인생은 너무 지루했거든.”

“그대도?”

“전 좀 다른 이유지만, 뭐 비슷해요.”

두 사람의 대답을 모두 들은 카이엔은 생각에 잠겼다. 곧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알 수 없는 일이군.”

“그냥 간단히 생각해. 세상엔 이유 없이 흘러가는 일도 많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고.”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하지? 돌아갈 곳을 잃었다.”

“그건 치료를 받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은퇴한 나도 이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너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나?”

잠시 침묵하던 카이엔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받겠다.”

“잘 생각했어.”

준이 아그네스를 불렀다. 그녀가 다시 차트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카이엔을 간단히 소개했다.

“이분은 전쟁 영웅이시다. 오래전 먼 곳에서 큰 전쟁이 있었는데 선봉에서 용감히 싸우셨지. 전쟁이 끝난 지금은 은퇴하셨고.”

“정말요? 어쩐지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어요.”

“그대가 아그네스 선생?”

“아직 선생은 아녜요. 견습인걸요.”

카이엔은 며칠 전 만났던 젊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때 그가 말했던 견습 치유사가 바로 그녀인 것 같았다.

“이쪽으로.”

준이 침상을 가리켰다. 카이엔이 아그네스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에 누웠고, 준은 손을 뻗어 마나를 흘렸다.

순간 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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