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66화 (66/175)

66화 기적의 처방전

그레이엄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자신에게 조금 유리하게 포장해도 모를 텐데, 그는 솔직했다.

한마디로 딱한 일이었다. 여자 문제는 가장 조심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일이. 안됐군.”

“아뇨. 오히려 잘됐습니다.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 수 있었고. 또 제가 가진 배경이 얼마나 허망한 건지도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수련을 떠나시겠다?”

그레이엄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돌며 실력을 더 쌓은 다음 다시 누아 진료소로 가서 루치아 선생과 결투를 할 겁니다. 그때는 꼭 이기고 말 거라고요!”

그레이엄은 두 눈을 빛내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는 남자로서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그녀를 꺾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엔은 불가능할 거라고 단정했다.

루치아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도 은퇴한 것 같지만, 천족이라는 바탕이 있는 이상 보통의 인간이 꺾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 힘든 싸움이 될 것이네.”

“그렇겠죠. 고작 장식용 레이피어 하나로 제 검기를 받아 냈으니까. 그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누아 진료소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도 좀 알고 있거든.”

“어르신께서도요?”

그레이엄은 깜짝 놀랐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켈세타 근방에서 준은 정말 유명했으니까. 기적의 치유사로.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엄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나도 그대처럼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날 치료해 줬어. 결투에서 패한 그대처럼 말이오.”

“역시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자신이 만든 던전에서 과거의 적으로 만났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은 물론, 눈앞의 젊은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진 못할 테니.

다행히, 그레이엄은 아예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곤란하시면 괜찮습니다. 너무 제 생각만 한 것 같군요. 하하하.”

카이엔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레이엄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모닥불에 조용히 장작을 찔러 넣기만 했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자연 생각이 깊어졌다.

그때 강준은 자신에게 치료를 권했지만 누아 마을에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신마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은퇴를 했다고 해도 어쨌든 그는 자신의 적이었다.

‘그런데 결국 또다시 도움을 받게 된 건가.’

그들이 그레이엄 공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또 키트를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또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가혹하다고 믿었던 그 운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혹은,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에 강준의 존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다.’

카이엔이 결심을 굳혔다.

그가 갑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깜짝 놀란 그레이엄이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떠나겠소.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

“잠깐만요! 어르신. 오늘 밤은 일단 이곳에서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날씨가 제법 춥습니다. 밤이라 위험하기도 하고요.”

“밤의 어둠은 나의 고독을 누르지 못하지.”

철혈의 대공의 의지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 그의 정체를 모르는 그레이엄의 눈에도 막을 수 없는 당당한 결의가 느껴졌다.

“어르신!”

그레이엄은 배낭을 풀러 이것저것 꺼내더니 카이엔에게 달려왔다. 건량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로브, 그리고 숏 소드 하나였다.

그가 챙겨 온 것을 카이엔에게 건넸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건 위험합니다. 이 근방엔 몬스터들이 제법 나오니까요.”

카이엔이 받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레이엄은 일단 로브를 그의 몸에 걸쳤다. 그리고 숏 소드와 건량 주머니를 허리춤에 걸어 주었다.

그제야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이건 그대가 사용해야 할 물건이 아니오?”

“전 괜찮습니다. 모닥불을 피워 주신 덕에 추위는 피할 수 있으니까요. 내일 해가 뜨면 근처 마을에 들러 보급하면 됩니다. 돈은 제법 가지고 나왔거든요.”

물끄러미 그레이엄을 바라보던 카이엔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그레이엄입니다. 킹스턴 가문의 막내고요. 아, 이제는 아니지만.”

“나는 카이엔. 그대의 기억이 허락한다면 이름을 잘 기억해 두시오. 오늘 받은 은혜는 잊지 않을 테니.”

카이엔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조심하라는 외침이 들렸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이 방향을 바로 잡았다. 누아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누아 마을을 목적지로 삼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 * *

파비안 남작의 저택은 소박했다. 말이 좋아 소박이지, 다른 귀족들이 봤다면 초라하다고 평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일반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더라면 이와는 달랐을 것이다. 사우던 가문의 책사로 일하고 있고, 평판이 좋은 남작이었다. 봉토에서 나오는 수입도 제법 괜찮았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학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결벽증적인 그의 성격도 한몫했다.

그런데 그 초라한 저택 앞에 화려한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건 바스티엔 공자였다. 저택의 집사가 깜짝 놀라 그를 바로 남작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대공자님!”

“하하하. 잘 지내셨소?”

바스티엔이 집무실에 나타나자 파비안 남작은 적잖이 놀랐다. 대공자는 차기 영주였다. 그의 행보는 하나하나 주목을 받는다.

파비안 남작이 펜을 내려놓고 달려 나와 예를 갖췄다. 대공자의 스승이라고 해도, 그는 자만에 빠지거나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연락도 주지 않으시고요.”

“아, 신경 쓰지 마시오. 지나가던 길에 한번 들렀소. 요즘 성에도 안 오시는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난 괜찮지만, 각하께서 서운해하시니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책사께서 곁을 지켜 드리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할 것이오. 그나저나 두통은?”

“발작이 있을 때마다 강준 경이 주고 간 향초를 쓰고 있습니다. 효과가 제법 괜찮습니다.”

준은 전에 진찰 도중 사용한 찔레가시와 적솔잎 혼합제를 남작에게 주고 갔다. 효과가 좋긴 했지만 완전한 치료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약재를 향초로 만들어 심리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만족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확실히 강준 경은 대단하더군요! 인성도 그렇고, 지식도 출중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좀 그렇지만, 진찰을 받는 것보다 연구실에서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즐겁더군요. 전문 분야는 서로 달라도 묘하게 영향을 준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소. 왠지 강준 선생과 경이 잘 통할 것 같았거든. 하지만 아직 선생에 대해 평가하기엔 이른 것 같소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바스티엔 공자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파비안 남작에게 건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작은 일단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꺼내 보시오. 강준 선생이 경에게 남기고 간 특별한 처방전이오.”

“처방전이요?”

“경이 치료를 포기하는 일은 있어도 자기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걸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했소. 나는 열어보지 않았으니 경이 먼저 확인해 보시오.”

바스티엔은 바로 저택을 떠났고, 파비안 남작은 자리로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소논문이 하나 들어 있었다. 손으로 직접 제본한 얇은 원고였다. 앞면을 확인한 파비안 남작이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로가리듬의…… 법칙?”

생전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첫 장을 넘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보통의 처방전이 아니었다. 약초 이름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니까.

대신 들어가 있는 것은 수식과 숫자였다.

그런데 둘째 장, 셋째 장을 넘길 때마다 파비안 남작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표정에 놀라움이 들어차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믿을 수가 없군!”

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논문에 실려 있는 로그 계산법은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는 대단한 발명이었다. 계산의 어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파비안은 성급하지 않았다.

“검증이 필요해.”

그는 천성 학자였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소논문을 한쪽으로 치우고 빈 종이를 꺼내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어느새 그는 환자가 아니라, 학자로서 준이 남긴 처방전을 대하고 있었다.

모든 가설이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증명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이 가설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전까지 이 원고는 메모에 불과한 것이다.

남작은 얼마 전 계산을 끝낸 15자리 두 수의 곱셈 결과를 놓고 검증을 시작했다.

펜과 종이를 이용한다고 해도 쉽게 계산할 수 없는 자릿수였다.

준이 기록한 대로 수의 곱셈은 로그의 덧셈으로 계산이 가능하므로, 주어진 방식대로 하나하나 계산을 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은 준이 만든 표에 결괏값을 대입했다.

‘오, 신이시여!’

잠시 멍하니 결과를 바라보던 그는 급히 외투를 걸치고 집사를 불렀다.

“나리.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마차를 준비시켜라.”

“마차요? 어디로 행차하십니까?”

“누아 마을로!”

“예?”

파비안 남작의 집사는 잠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켈세타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누아로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강준 경을 만나러 가야겠다. 어서, 서둘러! 이 망할, 서두르라는 말 못 들었나!”

저택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손이 바빠졌다. 누아 마을은 마차로도 꽤 먼 곳이었다. 호위도 필요했고, 식량과 약품도 준비해야 했다.

집무실을 오가며 조급해하던 파비안 남작이 소리 높여 집사를 불렀다.

“준비는 아직인가?”

“죄송합니다. 누아 마을까지는 먼 길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빨리 움직여! 그리고 각하께 전령을 띄워라! 당분간 켈세타를 떠나 있겠다고.”

“각하께서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아까 대공자께서도 성에 들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병가를 내지.”

파비안 남작은 그 자리에서 병가를 청하는 편지를 작성해 전령에게 넘겼다. 저택 사람들은 의욕에 넘치는 남작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그에게 뒤늦게 봄이라도 찾아온 걸까?

그건 아닐 터다. 만나러 가는 상대는 준이었으니까.

곧 집사가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나리.”

“얼마나 저택을 비울지는 모르겠다. 내가 없는 사이 저택을 맡아라.”

집무실을 나선 파비안 남작은 뭔가 잊었던 걸 떠올렸는지 다시 돌아와 준의 소논문을 품에 넣었다.

‘이 논문은 내가 받아야 할 물건이 아니야! 왕립학술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어야 할 논문이지!’

어느새 파비안 남작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지쳐 있던 눈빛이 번뜩였다. 학자로서의 총기가 빛나기 시작했다.

남작의 마음은 벌써 누아 마을에 도달해 있었다.

마차가 곧 출발했다.

품에서 소논문을 꺼낸 남작은 준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상상해 보았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지적 쾌감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아! 대단히 흥미롭군!’

그때까지도, 파비안 남작은 자신을 수십 년간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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