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63화 (63/175)

63화 진정한 승자

“이럴 수가.”

가장 놀란 것은 바로 그레이엄 공자 본인이었다.

지금까지 닿는 건 모조리 잘라 버렸던 강력한 검기였다. 그런데 장식용 레이피어가 그것을 막았다. 너무나도 간단히.

레이피어는 찌르기용 검이다. 검날이 가늘고 약하기 때문에 정면으로 검을 튕겨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치아가 생긋 웃었다.

“생각보다 강하네요? 수련을 오래 한 느낌. 하지만 아직 애송이네.”

“닥치시오!”

부웅!

그레이엄의 검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루치아는 마치 산보를 나온 것처럼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이어지는 공격도 사뿐히 피했다.

“오오!”

냉정하게 대련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긴 탄식을 흘렸다.

그레이엄이 과연 루치아의 목숨을 거둘지 말지를 걱정하던 그들이었는데, 이제는 승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 오히려 루치아의 우세를 점치는 자들이 늘었다.

“대체 저 레이디의 정체가 뭐란 말이오? 치유사 아니었소?”

“마치 엘프의 몸놀림을 보는 듯하군요. 놀랍습니다!”

“과연 공격은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귀족들이 저마다 품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무엇보다도 루치아는 아직 제대로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큰 변수였다. 만약 그녀가 검기를 쓸 줄 안다면 상황은 바로 역전될 것이니까.

‘보통이 아니야. 치유사라고 속인 것인가? 젠장. 어딘가에서 활약 중인 성기사가 분명해!’

그레이엄은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이게 끝?”

루치아가 검을 다시 까딱였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말려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했다.

그때, 그레이엄의 눈이 부릅떠졌다.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마데우스 백작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

막내에 서출이라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왕립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해 좋은 성적으로 수료했다. 자신도 가문을 이을 자격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문의 위신을 떨어트린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레이엄 공자는 각오를 다졌다.

싸움은 자신이 걸었다. 여기에서 지면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루치아가 욕망의 대상에서 쓰러트려야 할 적군으로 보였다. 호흡이 차분해졌고, 검세가 보다 매서워졌다.

“어머나, 눈빛이 달라졌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리셨나요?”

“이제 봐주지 않을 거요. 죽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내가 할 이야기를 대신해 줘서 고맙네요.”

눈매를 좁힌 그레이엄이 검을 꽉 쥐었다.

“하앗!”

그가 기합과 함께 앞으로 짓쳐들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루치아는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레이엄 공자의 연격이 펼쳐졌다.

콰과과광!

검기가 세 갈래로 쏟아지며 루치아를 노렸지만, 그녀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제법이군.”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이 정도 공격도 못 피하면 바보지.”

“그 여유도 이제 끝이오!”

기사들 무리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레이엄의 특기인 ‘속공’이 시작된 것이다.

쉬익! 쉭쉭쉭!

엄청나게 빠른 연격이 쏟아져 들어갔다. 킹스턴 가의 비전이 담긴 검술이 강력한 검기와 함께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루치아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녀는 계속 피하는 대신 검을 퉁겨 냈다.

땅! 따다다당!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치명상을 입을 공격이 쏟아졌다. 상대가 온 힘을 다해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집중을 해야 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하룬이 덜컥 겁을 먹었다.

“선생님! 이대로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왠지 밀리는 것 같은데.”

“루치아 선생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래도요!”

한옆에서 마리가 숨겨 둔 마나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준이 어깨를 짚어 그만두게 했다. 아그네스는 그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선생님! 제발 다치지 마세요!”

아그네스가 염원을 외치는 사이 속공이 모두 끝났다.

파팟!

뭔가가 잘렸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던 그것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루치아의 머리카락이었다. 가문의 비전과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 만든 유일한 유효타.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짧은 머리카락이었지만, 루치아의 눈에 노기가 섞였다.

“내 소중한 머리카락이…….”

“헉, 허억! 헉!”

온 힘을 쏟아부은 탓에 후유증이 심각했다. 그레이엄은 검세를 취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틈이 보였다. 루치아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챙! 챙챙!

그레이엄이 견제했지만, 루치아의 레이피어가 가볍게 걷어 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가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정확히 그레이엄의 목을 향했다.

손에 땀을 쥐던 아마데우스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그만!”

“커헉!”

목을 꿰뚫을 기세로 질러오던 검 끝이 뚝 멈췄다. 루치아의 살기도 그곳에서 끝났다.

놀랍도록 정교한 공격이었다. 검날이 살갗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목에 바람구멍이 났을 것이다.

“으으…….”

그레이엄 공자가 검을 떨어트렸다. 루치아는 레이피어를 거두었고, 공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드뇌르 백작이 엄숙히 선언했다.

“이번 결투는 루치아 선생의 승리. 그레이엄 공자는 패배를 승복하라.”

“제가…… 졌습니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마치 무술 대회 결승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패배한 쪽인 아마데우스 백작은 달랐지만.

“흥이 다 깨져 버렸군. 영지로 돌아가자.”

“영주님! 공자님은…….”

“저딴 놈은 내버려 둬!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

그레이엄 공자가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마데우스 백작은 냉정히 연무장을 나가 버렸다. 수행 가신들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구경하던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루치아의 검술을 보고 감탄한 자들이었다. 여인, 그리고 치유사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니 후폭풍이 그만큼 컸다.

“선생의 실력에 감복했습니다! 대련을 한번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검기도 없이 어떻게 공자의 검을 막은 겁니까?”

“대체 검술은 누구에게 전수받은 거죠?”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루치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준에게 돌아왔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미안하군. 내가 나서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마지막에 방심해서 머리카락이 좀 상한 게 아쉽긴 하지만. 그런데 다들 모여 있었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요. 결투가 막 시작될 때 왔거든요.”

아그네스가 대답하자 루치아가 재미있다며 웃었다. 팔짱을 끼면서.

“그럼 어디 감상을 좀 들어 볼까?”

“정말 마음 졸이면서 봤어요. 치유술도 대단하신데 검술까지 그렇게 뛰어나실 줄은 몰랐거든요.”

“맞습니다. 기사로 전업하셔도 되겠던데요? 아니면 누아 마을로 돌아가서 자경단장 자리를 물려받는 것도 괜찮아 보이고요. 하하하!”

“저도 검술 배우고 싶어요.”

제자들이 각각 소감을 밝혔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뭔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래?”

“잠깐만.”

아그네스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쫓았다. 아그네스는 홀로 남겨진 그레이엄 공자를 향해서 뛰었다.

가까이 다가간 아그네스는 즉시 응급처치 키트를 꺼냈다.

그레이엄 공자의 오른손바닥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님. 다치신 거 같은데 제가 좀 봐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대는…….”

“누아 마을의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는 아그네스라고 해요. 아직 견습이지만 이 정도는 많이 치료해 봤어요. 일단 피가 많이 나니까 상처를 치료할게요.”

“필요 없다. 이제 난 검을 들 수 없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지. 패배자니까.”

“다음에 이기면 되잖아요?”

한마디를 툭 내뱉은 아그네스가 응급처치 키트의 뚜껑을 열었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고운 약재를 상처에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그레이엄 공자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마치 결투를 보지 않은 사람처럼 자신을 챙겨 주었다.

“자, 이제 됐어요.”

야무지게 붕대의 매듭을 지은 아그네스가 손을 털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나를 상처에 흘려 주면 더 잘 낫는데, 전 못해요. 마나를 다루지 못하거든요. 그래도 마음만큼은 빨리 낫게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공자님도 포기하지 말고 더 강해지세요. 기회는 아직 많잖아요.”

“……그런가.”

그레이엄 공자는 씁쓸히 웃었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 같다. 이제 가문에서 쫓겨날 텐데 훌쩍 수련이라도 떠나 볼까.

가문의 위세가 자신에겐 족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성스럽게 감긴 붕대를 살펴보던 그레이엄 공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그네스와 눈을 마주하며 조용히 물었다.

“누아 마을의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나?”

“예. 공자님.”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아그네스.”

공자가 자신의 검을 챙겨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아그네스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 기뻤다.

기뻐한 사람은 아그네스만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결투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요. 제자 하나는 정말 잘 키웠네요.”

“내가 키운 거 아냐. 타고난 재능이지.”

“타고났다니 더 분하네.”

준과 루치아였다.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보듬어 주는 견습 치유사. 어느새 훌쩍 성장한 제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무술 대회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최종 승자는 사우던 가문의 기사단장 브로그뉴가 차지했다.

적수는 없었다. 아마데우스 백작이 도중에 자신의 영지로 떠난 탓에 란델로프 경과 검을 나눌 기회가 사라졌던 것이다.

루치아가 뜻하지 않게 실력을 보여 주목을 받은 게 좀 불편했지만, 준은 아마데우스 백작과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조금 머리 아픈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검술을 익히고 싶다고?”

끄덕끄덕.

마리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치아가 사준 프릴 원피스를 입어서인지 더욱 귀엽게 보였다.

준은 잠시 턱을 괴며 침묵했다.

“더 강해지고 싶어요.”

“넌 이미 충분히 강해. 거기에 지팡이와 로브까지 있으니 마법사라 불려도 흠이 없을 거야. 마음만 먹으면 귀족이 될 수도 있을 거고.”

“마법은 완전하지 않아요. 검술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예요.”

마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운 나쁘게 마법 공격에 면역이 있는 상대를 만난다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신마전쟁 이전 시대의 이야기다.

마법 공격에 면역이 있는 상대를 꼽으라면, 마왕급의 일부 마족 정도니까.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루치아 선생님에게 지지 않을 거예요.”

마리는 늘 솔직히, 직설적으로 말하곤 했다. 이번에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법을 수련하고, 마법공학을 익히며 정서적으로 상당히 성숙한 경지에 오른 그녀였다. 이제 루치아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정도 이유로는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없다. 내가 납득할 수 있을 이유를 찾아온다면 그때 가르쳐 주마.”

“네. 스승님.”

꾸벅 인사한 마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숨을 내쉰 준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루치아가 웃으며 나타났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가르쳐 줄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어. 마법공학도 전수를 해야 하는데 검술을 배울 시간은 없다.”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잖아요. 뭐, 저는 상관없어요. 당신의 고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부인을 여러 명 둘 수 있으니까. 첫째든 둘째든 난 상관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농담이 지나치군.”

“농담이라고 단정하지 마시고.”

생긋 웃은 루치아가 방을 나갔다. 이제야 홀로 남겨진 준은 머리를 꾹 눌렀다. 왠지 파비안 남작의 두통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잠깐, 파비안 남작?’

준은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연회는 모두 끝났고, 이제 사흘 뒤면 누아 마을로 떠난다. 그 전에 파비안 남작을 위한 특별 처방을 해야 했다.

준은 시녀를 불렀다.

“종이와 펜을 준비해 주세요. 종이는 넉넉하게. 그리고 내일 하루는 아무도 방으로 들이지 말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