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62화 (62/175)

62화 결투

“루. 무슨 일이야?”

준은 일부러 루치아를 애칭으로 불렀다.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두 사람은 생각을 교환했고, 같은 결론을 내렸다.

― 이번 기회에 킹스턴 쪽의 접촉을 아예 없애야겠어. 도와줄 수 있나? 싸움을 걸게 할 생각이다.

― 바라던 바예요. 안 그래도 이 남자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준은 그레이엄 공자를 분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아마데우스 백작의 집착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아들에게 빚을 지게 해 자신에게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이 무례를 끼친다면 그걸 핑계로 삼을 수 있으니까.

루치아도 아마데우스 백작이 준을 가신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신 왔어요? 늦잠 잔다더니 이제야 일어났나 보네. 어젯밤에 많이 힘들었죠?”

“힘들게 뭐 있어. 서로 좋았으면 됐지.”

“그래도요. 오랜만이라서…….”

얼굴을 붉힌 루치아는 준과 팔짱을 꼈다. 일부러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교태를 넣었다. 그레이엄을 도발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이었다.

‘젠장할!’

그레이엄은 제대로 걸려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그레이엄의 상상 속에선 엉뚱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밤늦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한다면 뻔하니까 말이다.

루치아가 준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아침은 들었어요?”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고 안 먹고 다니면 어떡해요? 치유사라는 사람이 자기 몸을 돌볼 생각도 안 하네. 내가 간단히 뭐라도 만들어 줄게요. 응?”

“곧 대회가 시작되니까 그것만 보고 가지.”

“다음부턴 잘 먹고 다녀야 해요. 알았죠? 후훗.”

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그레이엄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지고 있었다.

차갑기만 하던 루치아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교태를 부리니 더욱 애간장이 끓었던 것. 정복욕이라고 할까. 어떻게든 이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한편, 킹스턴 가의 기사들은 조용히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단장님.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상대는 우리 영주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 자다. 사우던 가의 사람이기도 하고. 사고가 터지기 전에 꼭 막아야 한다. 어서 움직여!”

“옛!”

그레이엄의 수행 기사들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험에 근거해 막내 공자가 사고를 칠 가능성을 느낀 것이다.

세상은 불합리하다. 만약 막내 공자가 사고를 친다면, 그 벌이 막내 공자에게 가는 게 아니라 수행 기사인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확실히 그레이엄의 얼굴은 점점 노기로 붉어지고 있었다. 준은 그런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면이지요? 어제 파티에서 잠깐 뵌 거 같은데. 아닙니까?”

어제 루치아가 했던 말이 선명히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분명 열한 번째 파리라고 칭했었다. 그때는 부끄러워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레이엄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비굴함과 부끄러움은 차마 감추지 못했다.

“그레이엄이오. 뭐 문제라도?”

“그냥 반가워서 물었습니다. 어제 너무 빨리 가 버리셔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군요. 제 이름은 강준입니다. 그레이엄 공자시라고요? 종종 인사드리지요.”

준도 씨익 웃어 보였다. 루치아가 곁에 있으니 그것이 승자의 미소처럼 보였다.

그레이엄은 젊은 혈기를 누르지 못했다.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요?”

“종종 인사드린다는 게 왜 무시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표정이 비웃는 거잖소!”

“표정?”

강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여러 귀족들이 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준비하고 있던 킹스턴 가의 기사들이 그레이엄을 말렸다.

적어도 그들은 사리 분별을 하는 데 그레이엄보다 훨씬 뛰어났다. 지금은 누가 봐도 공자의 잘못이 컸다.

게다가 상대는 아마데우스 백작이 탐내는 인재가 아니던가?

결국 킹스턴 가의 기사단장도 나섰다.

“공자님. 진정하십시오. 좋은 자리가 아닙니까? 이러지 마시고 잠시 저쪽으로 가시지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저자가 나를 비웃었단 말이네!”

“공자님!”

“지금 저자라고 하셨습니까?”

준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주변이 웅성거렸고, 킹스턴 가의 기사단장의 표정이 더욱 절박해졌다.

준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공자. 표현이 거칠군요. 제가 준남작이라고는 하나 사우던 가문에서 녹을 받는 몸. 예의를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예의? 지금 예의라고 했소?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할 말인지 모르겠군.”

“좋은 날에 좋은 손님을 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우던 가문의 주인이신 드뇌르 백작 각하의 뜻. 더욱이 킹스턴의 가주께서도 그 자리를 빛내 주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 그 자리를 망치려고 하는 겁니까?”

흥분한 사람에겐 정론이 제대로 먹히는 법이다. 준의 한마디가 묵직하게 그레이엄을 때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헛소리라니. 공자와는 말을 나눌 가치가 없을 것 같군요. 루. 가자.”

준이 돌아서자 루치아도 경멸스러운 눈으로 그레이엄을 바라보더니 몸을 홱 돌렸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툭!

뭔가가 날아와 준의 등에 부딪혔다. 순간 준은 미소를 지었다. 뜻하는 대로 일이 벌어졌다.

“세, 세상에!”

“큰일이다! 어서 백작 각하께 알려!”

“서둘러라!”

주변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기사와 가신 몇 명이 바쁘게 자리를 떴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준과 그레이엄의 주변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연무장으로 들어온 아그네스와 하룬, 그리고 마리도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레이엄이 던진 장갑이 준의 등에 맞고 말았던 바로 그 장면을.

“장갑은 왜 던지는 거지? 어라. 저분 우리 선생님 아니야?”

“저거…….”

하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비루나 왕국에서 자신의 장갑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결투 신청을 의미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두 사람은 입회인 하에 결투를 치러야 하고, 서로의 생명을 취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자경단장 바이런에게 들은 적이 있어 하룬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선생님께 결투를 신청했어!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어서 가 보자!”

깜짝 놀란 세 사람이 준에게 달려갔다. 하룬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선생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늦었구나.”

준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장갑이 던져진 초유의 사태였는데, 그는 마치 진료실에 앉아 진료를 준비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물러나 있어라. 저 공자께서 나와 한판 붙자고 하시는구나.”

“괜찮으신 거죠?”

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전에 던전에서 보여 준 그의 실력이 있기에 하룬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강준 경! 결투를 받지 마십시오. 경은 치유사가 아닙니까? 그레이엄 공자는 왕립 기사 아카데미를 수료한 분이시오!”

보다 못한 사우던 가의 브로그뉴 기사단장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거기까지는 몰랐다.

‘왕립 기사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면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어쩐지, 각오하고 달려드는 느낌이다 했어.’

적어도 눈앞의 공자는 실력도 없이 입만 나불대는 그런 위인은 아니라는 이야기.

하지만 어디 출신이든 문제는 없었다. 목숨을 취할 생각은 없었고, 가볍게 혼만 내주고 끝낼 생각이었으니까.

준이 브로그뉴에게 대꾸했다.

“결투를 받지 않으면 사우던 가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질 겁니다. 사우던 가의 가신으로서, 제 위신과 관계없이 가문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허! 치유사가 어떻게 기사를 상대한단 말입니까!”

브로그뉴가 만류하자 오히려 그레이엄은 자신감을 얻었다. 희멀건한 치유사 따위, 한 방에 날려 주마.

“검을 들어라! 레이디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 여기에서 결판을 내자!”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희고 가냘픈 장갑이 갑작스레 날아들었다.

철썩!

날아간 장갑이 뺨을 치듯 그레이엄의 얼굴을 때렸다.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장갑을 던진 주인공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바로 루치아였다.

* * *

“무슨 짓이야?”

각본에 없는 일이었다. 깜짝 놀란 건 준도 마찬가지였다.

브로그뉴와 다른 기사들도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결투를 거는 것은, 적어도 사우던 가가 세워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루치아가 앞으로 나섰다.

“누가 누구를 차지한다는 거예요? 불쾌하군요. 내가 물건인가요?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레이디! 그건……!”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요. 자, 검을 뽑으시죠? 굳이 강준 선생을 상대할 필요 없어요. 나부터 쓰러트리세요.”

그때 두 무리의 사내들이 연무장에 들어왔다. 한쪽은 드뇌르 백작의 무리였고, 다른 한쪽은 아마데우스 백작의 무리였다.

연무장을 확인한 두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닥에 두 쌍의 장갑이 널려 있었다. 이미 상황이 벌어진 이후라는 것을 직감했다.

드뇌르 백작이 빠르게 걸어와 브로그뉴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결투가 성사되었나?”

“그렇습니다. 한데…… 루치아 선생이 그레이엄 공자에게 결투를 걸었습니다.”

“뭐라?”

아마데우스는 자신의 핏줄이, 드뇌르 백작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관여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루치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드뇌르 백작이 재차 물었다.

“루치아 선생이 검을 다룰 줄 아나?”

“파악된 바 없습니다. 그러나 치유사가 검을 잘 쓴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상대는 기사 출신의 마나 유저가 아닙니까?”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하니…… 내가 입회를 서는 동안 강준 선생을 자리에서 피하게 하게. 지금은 상황을 진정시키는 게 중요해.”

“루치아 선생은 어떻게?”

“그레이엄 공자도 생각이 있다면 죽이거나 하진 않겠지.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터이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순식간에 손익 계산을 끝낸 드뇌르 백작이 나섰다. 아마데우스 백작이 채 나서기도 전이었다.

“이 결투는 내가 입회인으로 서겠소. 두 사람 모두 이 결투에서 벌어질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겠소?”

“얼마든지요.”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드뇌르 백작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 결투가 성사되었음을 선언했다.

스릉!

그레이엄이 허리춤에 걸린 보검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번쩍였다.

사실 그레이엄은 루치아를 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관용을 베풀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하하하. 레이디. 손이 비어 있군요. 설마 무기도 없이 싸우겠다는 말입니까?”

“여자라고 봐주지 않을 거요, 라고 하실 거면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나도 봐주지 않을 생각이거든. 그런데 난 검이 없는데 뭘로 싸운다?”

루치아가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있는 레이피어가 눈에 들어왔다. 루치아는 손을 뻗어 레이피어를 집었다.

그때, 바스티엔 공자가 나섰다.

“루치아 선생. 그건 장식용이라 실전에서 쓰긴 어렵소. 금방 부러지고 말 거요. 괜찮다면 내 검을 빌려주겠소.”

“마음만 받을게요.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니까.”

“흥. 다치지 않게 살살해 드리지!”

그레이엄이 검세를 취했다.

몇몇 기사들이 감탄했다. 못 본 사이에 수련을 열심히 했는지 검세가 올라와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진한 검기가 검에 맺혔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정도로 강한 검기였다. 물론, 그레이엄 공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레이엄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 보잘것없는 검으로 이 검기를 막을 수 있겠소? 내 검기로는 무쇠도 자를 수 있소.”

“말로는 뭘 못한담?”

루치아가 검끝을 까딱였다. 도발에 걸려든 그레이엄이 앞으로 도약하며 검을 흉하게 휘둘렀다.

까앙!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어찌 저런 일이!”

기사들은 물론, 드뇌르 백작과 아마데우스 백작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범한 레이피어가 검기를 품은 보검을 너무나도 간단히 튕겨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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