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만성 두통의 단서 (2)
일단 준은 문진을 시작했다.
파비안 남작에 대해 들은 바가 많긴 해도 직접 확인하는 게 좋다. 모든 오진은 ‘알고 있다’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평소에 잠은 얼마나 주무십니까?”
“그게…… 많이 잘 때도 있고 적게 잘 때도 있고. 천체관측을 하는 날에는 밤을 새우는 일도 있지요.”
“드시는 음식은요?”
“빵이나 쿠키 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즐겨 먹습니다. 아까도 그렇게 먹었고.”
파비안 남작은 다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준은 이해했다. 아마 이와 비슷한 문진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했을 테니까. 혹시나 치료된다는 기대감이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어떨 때 두통이 오는 편입니까?”
“그걸 알면 한결 편하겠지요. 자다가 갑자기 생길 때도 있고, 일을 하거나 그럴 때도 가끔 그럽니다.”
“하루에 몇 번 정도 통증이 있지요?”
“그것도 그때마다 달라요.”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인다거나 시야에 어떤 불편함은 없습니까?”
“없군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기록을 이어 나갔다. 특별히 주목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종이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술은 즐겨 하십니까?”
“예전엔 자주 마셨는데 지금은 입에 대지 않습니다. 왠지 마실 때마다 머리가 아픈 거 같기도 해서.”
“잘하셨습니다. 특히 적포도주는 통증을 유발할 수 있으니 피하는 게 좋지요. 아플 때 증상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머리가 욱신욱신거립니다. 이걸 박동성 두통이라고 하나요? 눈이 빠질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럽고 토하는 경우도 있고. 종잡을 수 없죠.”
“증상이 상당히 심한데 연구를 계속하신다니 놀랍네요.”
“뭔가에 집중하면 좀 나아지는 편입니다.”
준은 증세에 대한 질문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비안 남작의 안색이 나빠졌다. 익숙한 통증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다.
잠시 화제를 돌릴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많은 치유사가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비슷한 질문 많이 받으셨지요?”
“솔직히 말하면 아주 진절머리가 날 정도지요. 아예 매뉴얼을 하나 만들어야 할까 싶을 정도로 다들 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가능하면 진료를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영주님과 대공자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악의는 없으니 오해는 마시길.”
준은 차트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그 끝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밝고 푸른빛이 손가락 끝에 맺혔다.
“잠깐 이쪽을 봐 주시겠습니까? 빛을 따라서 시선을 움직여 주십시오.”
준은 손가락을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 파비안 남작의 안구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빛의 세기를 다르게 하며 진찰이 계속됐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번엔 두 손을 파비안 남작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켰다.
준은 눈을 감고 기감을 끌어올렸다.
두피와 두개골 너머의 모든 것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준은 손을 돌려가며 두통을 유발할 수 있는 여러 조직을 살폈다.
‘역시 특별히 이상은 없어 보이는군.’
애초에 종양이 있거나 다른 질환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십수 년간 앓아 온 만성질환이었으니까. 종양이었다면 남작은 벌써 사망했을 것이다.
준은 손을 떼고 그의 팔목을 잡았다. 마나를 흘려 혈압이나 혈액순환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폈는데, 그 또한 정상 범주였다.
“이상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깨끗하군요.”
파비안 남작의 표정에서 일말의 기대감이 사라졌다.
역시 강준이라는 치유사도 똑같은 거였나. 그런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밤이 늦었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파비안 남작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서니 준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작님의 연구실을 한번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아직 진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중얼거린 남작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곧 발작성 두통이 시작됐고, 그의 눈에 노기가 맺혔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또 뭐 볼 게 있단 말입니까!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는 오명이 걱정되시오? 아니면 날 이용해 출세를 해 보려는 거요?”
“둘 다 아닙니다.”
“그럼 왜?”
“전 치유사니까요.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분들이 있다면 도움을 드리는 게 제 일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말했지만, 남작은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얼굴에 노기가 점점 짙어졌다.
준이 덧붙였다.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한번 확인 차 가 보려는 겁니다. 허락해 주시면…….”
“그만두시오!”
남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성큼성큼, 신경질적으로 준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
“윽!”
남작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준이 가까이 다가갔다. 두통 발작이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십시오.”
“으윽.”
준은 의자에 남작을 앉혔다. 그리고 품에서 미리 준비한 약재를 꺼냈다. 적솔잎과 찔레가시를 혼합한 가루였는데, 은은한 향이 좋았다.
준은 그 가루를 남작의 코 밑에 갖다 댔다. 향이 자연스레 남작의 코로 들어갔다.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일그러졌던 남작의 인상이 서서히 풀린 것.
적솔잎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여기에 찔레가시를 혼합하면 속효성 안정제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두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지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좀 어떠십니까?”
“미안하군요. 못 볼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송구하군요. 일단 오늘은 쉬십시오. 다음 기회에 찾아뵙겠습니다.”
“잠깐. 강준 경.”
파비안 남작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준을 올려다보았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했습니까? 내 병에 대해서요.”
“그렇습니다.”
파비안은 물끄러미 준을 바라보았다.
거짓 없는 눈빛이었다. 거기에 당당함까지. 오랜 세월 동안 진리를 탐구한 그의 눈은 진심을 읽었다.
곧 파비안 남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대공자님의 불치병을 고쳤지요. 그리고 마르다 마을에서 기적을 보여 줬고. 경의 실력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이번에도 운이 따를까 궁금하군요.”
“운도 반복되면 그것도 실력이지 않겠습니까?”
“내 연구실을 보고 싶다고 했지요? 가서 경의 운을 한번 시험해 봅시다.”
파비안 남작이 앞장을 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남작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에서 준은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치료 방침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
아침 햇살이 얼굴에 닿자 준이 눈을 떴다. 확실히 누아의 진료소보다 잠자리가 편했다. 조금 더 자고 싶을 정도로 안락했다.
준이 몸을 일으키자,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시녀가 다가왔다.
“준남작님. 기침하셨어요? 바로 따뜻한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준은 간단히 세안을 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창가에 섰다.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였다.
시녀는 제법 눈치가 좋았다.
준이 마음에 들어 하던 차를 가져왔다. 찻잔을 받아들며 준이 물었다.
“데인 곳은 괜찮습니까?”
“덕분에요. 다 나았답니다.”
“그럼 붕대는 푸는 게 좋겠군요.”
“아, 이건…….”
준이 손을 잡으려고 하자 얼굴을 붉힌 시녀가 도망가듯 방을 빠져나갔다. 왜 저러는 걸까. 차를 음미하며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또 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군요. 축하해요! 치유사도 역시 할 만한 직업이라니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믿을 만한 정보통’ 씨.”
나지막한 경고에 릴리가 몸을 움찔했다. 불리할 땐 말을 돌리는 게 상책이다.
「그나저나 그 망원경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일정이 끝나고 작업에 들어가야지.”
「제가 보기엔 약이 아니라 청소가 필요할 것 같던데.」
확실히 파비안 남작의 연구실은 엉망이었다. 수많은 메모가 벽면에 붙어 있었고, 흑판에 적힌 복잡한 수식과 수열들로 정신이 없었다.
“약도, 청소도 필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따로 있어.”
「뭔데요?」
준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때, 릴리가 급히 몸을 감췄다.
밖에서 시녀가 바스티엔 공자의 방문을 알렸다. 곧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선생.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셨군. 아침에 왔을 땐 주무시고 계시더니.”
“잠자리가 굉장히 편하더군요. 쉽게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늦게 돌아다니면 으레 피곤해지는 법이지요. 밤엔 어디에 다녀오셨소?”
“일단 앉으시죠.”
창가에 서서 차를 음미하던 준이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앉았다.
“진찰을 하고 나서 남작님의 연구실을 구경하고 왔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군요.”
“병의 원인은 찾았소?”
찻잔을 내려놓으며 준이 웃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데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자 바스티엔 공자가 앞으로 상체를 가까이 붙였다.
“표정을 보니 뭔가 찾은 거 같소만?”
“치료가 쉽진 않을 거 같습니다. 약으로 통증을 경감시킬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을 겁니다.”
“선생이라도 어찌 도리가 없다는 말이오?”
바스티엔 공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준이라면 해낼 줄 알았는데.
“정석적인 치료법으로는 남작님의 병을 고칠 순 없습니다.”
“응?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이오?”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한데,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든 건 남작님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지요.”
준은 다시 찻잔을 들고 차를 들이켰다.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이후로도 바스티엔 공자는 그 생각에 대해 물었지만, 준은 대답을 피했다.
결국 바스티엔 공자는 두 손을 들었다.
“선생은 파비안 경과 닮은 구석이 있군.”
“어떤 부분이 닮았습니까?”
“고집이 소가죽이야! 이 정도로 부탁하면 보통 이야기를 해 주는데 말이오. 말하는 사람의 마음도 생각을 해야지?”
“하하하하.”
준은 곧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바스티엔 공자는 의연히 받았다.
자신을 궁금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파비안 경의 비밀을 지켜 주려는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오히려 사방으로 떠들지 않은 게 고마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볍게 환담을 나눴다.
루드밀라 공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곰 인형을 완벽하게 수리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건넸다.
물론 방문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곧 연무장에서 무술 대회가 시작되오. 참가자들이 아주 화려하지. 함께 가서 관전하지 않겠소? 우리 가문 기사들의 위용을 선생께 꼭 보여 드리고 싶었소.”
“좋습니다. 가시죠.”
두 사람은 방을 나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바스티엔 공자는 준에게 무술 대회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진검을 사용하고, 상대를 상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복한 상대의 목숨을 취할 순 없다. 가끔 사망자가 나오는 본격적인 대회였다.
“좀 걱정스럽군요. 치유사가 대기하고 있더라도 인명피해가 나는 대회는 피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선생이 무술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소. 이건 대련이 아니라 가문의 위신이 달린 일이지. 인명피해는 어쩔 수 없지 않겠소?”
무술에 관심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가문의 위신이라는 것엔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에 죽고 사는 시대가 아니던가.
두 사람이 연무장에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이 관객석에 앉았고, 기사들은 한쪽에서 몸을 풀거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루치아도 미리 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어떤 젊은 남자 때문이었다.
어제 연회에서 열한 번째 파리로 지목된 바로 그 남자였다.
준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 킹스턴의 막내 공자군. 이름은 그레이엄이고.”
킹스턴의 막내라면, 어제 만났던 아마데우스 백작의 막내아들일 것이다. 바스티엔의 애매한 표정을 보니 그의 평판을 알 수 있었다.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하필 마스터의 부인을 건들다니. 운도 참 없는 놈이군요.」
‘나도 모르는 내 부인이 있었나?’
「아니면 말고요.」
그때, 루치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레이엄이 스킨십을 시도한 것 같았다. 준은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