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만성 두통의 단서 (1)
바스티엔 공자는 주인공 자리를 기꺼이 준에게 양보했다. 그가 먼저 나서서 준을 맞이했다.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소개 멘트는 내가 직접 지시했는데 어때, 마음에 드시오?”
“금칠도 적당히 해 주셔야지요. 깜짝 놀랐습니다. 듣는 분들이 오해할까 걱정이군요.”
“치유술만이 아니라 조만간 겸손도 신의 경지에 오르시겠군.”
“하하하!”
대공자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악단의 지휘자가 손을 움직였고, 음악이 다시 깔리기 시작했다.
“한잔 드시겠어요?”
시녀가 둥그런 쟁반에 담긴 술잔을 내밀었다. 준은 여유롭게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바스티엔 공자가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오늘은 환자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시오.”
“알겠습니다. 대공자님과 백작 각하의 건강을 위해, 사우던 가문의 영광을 위해!”
준이 선창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잔을 들어 화답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마치 연회를 취미처럼 즐기는 사교계의 스타처럼 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왕국 남서부의 귀족들이 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구면은 없었다. 하지만 준의 비상한 기억력은, 그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모조리 기억했다.
언제 어디서 이들과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관계를 만들어 놓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반가운 만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깐 어딜 그렇게 급히 가셨나?”
그중엔 아마데우스 백작도 있었다. 그는 술잔을 들고 제법 거만하게 다가왔다. 살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자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어서 급히 진료실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용서하시길.”
“으음? 그런 일이 있었나? 저런, 안 됐군. 아니, 잘된 일인가? 자네라면 뚝딱 치료해 낼 수 있으니까. 하하하!”
“애초에 아프지 않아야 하는 게 잘된 일이겠지요.”
준이 정색하자 무안해진 아마데우스 백작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름 회심의 농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누아에 정착했다고 들었네. 지낼 만한가? 시골이라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전원생활도 나쁘지 않더군요.”
“언제 킹스턴에 한번 들르시게나. 도시의 즐거움이 뭔지 내 친히 알려 주지.”
은근히 작업을 개시한 아마데우스 백작.
하지만 준은 미소만 지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간다는 이야기인지, 얘기는 잘 들었는데 안 갈 거라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아마데우스 백작의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조급증이 든 것이다.
“자네, 그거 아는가? 우리 킹스턴의 병원은 켈세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지. 자네가 온다면 자리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음? 이보게. 강준 경?”
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기둥에 기댄 채 시시한 표정으로 어떤 귀공자와 말 상대를 하는 루치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한 박자 늦게 강준이 아마데우스 백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이거 실례 많았습니다. 뭐라 하셨습니까?”
“크흠!”
왠지 두 번 말하기 좀 그런 제안이었다. 때마침 사우던 가의 가신들이 근처를 지나가는 중이기도 했기에, 백작은 살짝 말을 돌렸다.
“어느 아카데미 출신이냐고 물었네.”
“저는 독학으로 치유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누아 마을에 자리를 잡은 거고요.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그런 시골 마을에 가지 않았겠지요.”
“흐음, 출신지는?”
“과거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또 허탕을 친 건가. 루치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준의 뒷모습을 보며 아마데우스 백작은 혀를 찼다.
「마스터 인기 좋은데요? 벌써 두 번째 영입 제안이네요.」
준을 탐낸 것은 아마데우스 백작만이 아니었다. ‘북부의 늑대’라고 불리는 칼스버그 자작도 준에게 가문의 주치의를 제안했다.
물론 정중히 거절했다.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피곤하다. 어서 누아 마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다리 뻗고 잠 좀 자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유능하래요? 적당히 게을러야 편하지.」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요즘 들어 릴리의 헛소리 빈도가 줄어든 느낌.
그런데 그때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그쪽으로 다가가는 그 짧은 사이에 젊은 사내 하나가 또다시 루치아에게 말을 걸었던 것.
근사한 금발을 가진 남자였는데, 복장이 대단히 화려했다.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 같았다.
그는 마치 귓속말을 하려는 듯 제법 대담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루치아는 젊은 사내의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흠칫 놀란 사내는 다시 용기를 내어 접근하려고 했는데,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준이 도착했던 것.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당신이 옆에 없으면 꽤 피곤하다고요. 이래저래 파리가 꼬이니 원.”
순식간에 파리가 된 젊은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 준은 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몇 명째야?”
“열 명? 아니, 방금 날아간 파리까지 열한 마리.”
“생각보다 적군.”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밤은 길어요.”
“그거 악취미야.”
“됐으니 술이나 줘요.”
준이 들고 있던 술잔을 루치아에게 건넸고, 마침 지나가던 시녀에게 잔을 하나 더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가볍게 건배했다.
근사한 예복을 걸친 루치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못 보던 옷이네?”
“대공자께서 직접 골라 주셨어요. 어딘가의 누구는 신경도 안 써 줘서 말이죠.”
“미안해.”
“괜찮아요. 나야 뭐 대충 입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으니까.”
준이 직접 골라 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꿈이었다. 준은 옷 보는 눈이 없었다. 차라리 대공자에게 부탁하는 게 나았다.
“근데 어디 갔다 왔어요? 믿을 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어떤 시녀랑 재미 좀 보고 있다던데?”
그녀가 말한 ‘믿을 만한 정보통’이 순식간에 기척을 감췄다.
“아그네스 좀 보고 오느라 늦었어.”
“그래서 하룬이랑 마리가 안 왔군요. 당신도 곁에 있어 주지 그랬어요.”
“진심이야?”
“그럼요. 아그네스는 당신이 제일 아끼는 수제자인데.”
“말에 가시가 있군.”
때마침 드뇌르 백작이 연단에 올랐다. 이번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는 것을 시작으로 지루한 연설을 이어 갔다.
그 사이에 준의 업적을 언급했다.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준은 가벼이 웃으며 잔을 들어 보였다.
“나가요. 왠지 좀 갑갑하네.”
“그래.”
준과 루치아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아그네스요. 참 귀엽죠?”
“귀엽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야. 이상한 오해로 나랑 이을 생각은 하지 마.”
의외로 루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 지켜보면서 깨달았어요. 아그네스는 당신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동경과 애정을 착각할 만한 나이기도 하죠.”
“역시 신의 전령인가.”
“제가 당신보다 마력이 약할지는 몰라도 눈썰미는 더 좋다구요?”
“인정해. 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거야.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지.”
“알아요. 오히려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건 마리죠.”
준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벤치에 등을 기댄 루치아가 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리만 제거하면 당신을 독차지할 수 있으려나.”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
“서운하네요.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만났잖아?”
루치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동시에 그녀의 커다란 눈이 일렁거렸다. 촉촉한 물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준이 깜짝 놀랐다.
“울어?”
“누가 울어요? 나 그렇게 헤픈 여자 아니에요.”
“헤프진 않지만 거짓말은 잘하는 여자지.”
“치.”
멋대로 내려온 건 너잖아.
그런 말을 자연스레 꺼내려 했지만, 준은 본능적으로 말을 삼켰다. 지금 이 말을 하게 되면 왠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루치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뒷짐을 진 그녀가 테라스를 거닐며 말을 이었다.
“내가 찾아가면 당신이 정말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왠지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술에 물 탄 듯 맹숭맹숭하기만 하고. 그냥 그래서 아쉬웠나 봐요.”
루치아가 준을 향해 돌아섰다. 떨어진 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수없이 살아온 그 무미건조한 삶을 이해했어야 했는데…… 아직, 마음이 동하진 않죠?”
“그런 거 같아.”
“내가 좀 더 노력할게요. 당신의 마음이 완전히 움직일 때까지.”
달빛 아래에서 환하게 웃은 루치아의 미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그때, 음악이 바뀌었다.
경쾌한 템포의 춤곡이었다. 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이 루치아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한 곡 출까?”
“벌써 마음이 움직인 건 아닐 테고. 무슨 의미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
그 속뜻을 이해한 루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홀로 들어갔고, 무대 중앙에서 환상적인 춤을 선보였다. 누가 봐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 *
늦은 밤, 켈세타 성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당직 직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준은 그가 깨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히 켜진 촛불이 입원실을 밝히고 있었다.
마리는 보조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하룬은 침상 곁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아그네스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다가간 준이 아그네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많이 내렸군. 내일이면 일어날 수 있겠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은 들었다. 내일까지 연회가 계속되긴 하지만, 메인은 오늘이었으니까.
준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뒤에서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준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아그네스는 눈을 감은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저 꼭 치유사가…… 그리고 선생님께…….”
뒷말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루치아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싱겁게 웃은 준은 병실을 나섰다.
오늘의 연회는 모두 끝났지만,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진료실에서 나온 준은 특별히 사무관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향했다.
작은 문이 달린, 외진 방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문이 열렸다.
문의 크기만큼 작은 방이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책장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창 쪽에 놓인 책상이 전부인 그런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 책상에 누군가가 앉아서 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파비안 남작이었다.
“강준 경입니까?”
“그렇습니다. 남작님. 처음 뵙습니다.”
“아아. 그래요. 시간도 늦었는데 초면에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대공자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무척 예의 바른 사내였다. 혹은 사무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준이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복잡한 수식과 긴 숫자들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연회에 잠시 얼굴만 비추고 돌아갔는데, 지금까지 계산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숫자가 꽤 크군요. 자릿수도 많고. 천문학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행성의 거리와 궤도를 조사하는 중인데…… 후, 이제는 이것도 못 할 짓 같군요. 눈이 침침해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쪽 연산을 놓치면 골치가 아파서 말입니다.”
준은 선 채로 잠시 기다렸다.
그의 연산 과정을 지켜보며 현재의 수학 수준을 가늠해 보았다.
‘로그 계산법은 아직 정립이 되지 않은 건가?’
로그가 없다면 계산이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파비안 남작이 날숨과 함께 펜을 내려놓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쪽으로 자리를 좀 옮겨야겠는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단히.”
준은 그의 피부와 손 등을 살폈다. 영양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간단히’라고 말한 그의 기준이 뭘까 궁금했다.
두 사람은 자리를 한옆에 놓인 테이블로 옮겼다. 준은 맞은편이 아니라 파비안의 좌측에 자리를 잡았다.
왕진 가방을 내려놓은 그가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