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59화 (59/175)

59화 연회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들 (2)

연회의 참석자를 보면 주최자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성공 여부는 규모가 아니라 참석자인 것이다.

적어도 그 말에 따르면 켈세타의 영주 드뇌르 백작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른 귀족들은 몰라도 라이벌 관계에 있는 킹스턴의 영주까지 참석했으니 말이다.

물론 킹스턴의 영주 아마데우스 백작은 단순히 축하 때문에 온 것은 아니긴 했지만.

아마데우스 백작은 덩치가 정말 컸다. 탐욕의 화신이라는 별명에 어울릴 만큼 살집도 푸짐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데 약간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됐다. 호들갑 떨지 마라.”

마차에서 내리다 균형을 잃은 아마데우스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픈 곳보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대놓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아마데우스 백작은 이 주변에서 영향력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이 빌어먹을 성은 언제 봐도 정이 가질 않는단 말이야.”

“면목 없습니다. 주군.”

“면목은 이곳의 주인이 없어야지.”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라 호위들이 고개를 숙였다. 아마데우스 백작은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드뇌르 백작이 호위를 이끌고 나타났다.

“어서 오시오! 먼 길인데 이렇게 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좋은 소식이 우리 영지까지 당도했는데 응당 와서 인사를 드려야지. 대공자의 완쾌를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하하하.”

“감사하오.”

드뇌르 백작과 아마데우스 백작이 서로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묘했다.

경쟁관계인 데다, 먼 옛날에는 전쟁까지 치렀던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교류를 하고 있으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딱 서로를 이용해 먹는 관계였다.

손을 거둔 아마데우스 백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개가 돌아갈 때마다 턱살이 출렁였다.

“그런데 이번 기적의 주인공은 어디에 있소?”

“아아. 바스티엔은 다른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라오.”

“대공자 말고 강준 선생 말이오. 이번에 준남작위를 받았다고 하던데? 나였다면 준남작이 아니라 남작위를 내렸을 터인데 말이오.”

“크흠!”

드뇌르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간접적으로 바스티엔 공자를 깎아내리며, 교묘하게 강준에게 호감을 드러낸 일석이조의 공격이었다.

과연 킹스턴의 여우라고 불릴 만했다.

“작위가 부담된다고 하더이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당사자를 곤란하게 하는 건 도의가 아니지.”

“그것이 사우던 가의 법도라면야 할 말은 없소.”

“그나저나 저번에 뵐 때보다 더 건장해진 거 같소만? 아까도 마차에서 내릴 때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던데 괜찮으시오? 필요하다면 강준 경의 진료를 주선해 보겠소이다.”

“걱정은 고맙지만 내 관절은 아직 청춘이지. 말에 오르는 것도 문제가 없소.”

말에 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 자체에 문제가 생기겠지.

드뇌르 백작은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신경전이 벌어지자 주변에 있던 가신들이 조심스레 만류하기 시작했다. 연회가 열리는 좋은 날이었다. 오늘만큼은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마데우스 백작도 이해타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다. 이곳은 적진이다.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며 드뇌르 백작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번 무술 대회엔 누가 출전하오?”

“그야…….”

예민한 질문이었다.

보통 연회는 음악과 춤, 그리고 술과 각종 여흥이 따르지만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무술 대회였다. 기사들의 평판이 바로 여기에서 갈리기도 한다.

기사들의 평판 나눔에서 그치면 사실 크게 주목받기 어려웠을 터다. 기사들은 그 영지의 힘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무술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중요했다.

드뇌르 백작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쪽에서는 사이먼 경이 출전할 예정이오. 그쪽은?”

“지크프리트 경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할 거요. 오랜 부상을 이겨 내고 돌아왔지.”

“그거 재미있겠군.”

두 기사 모두 기사단의 2인자들이었다.

하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두 가문의 관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드뇌르 백작 측에서는 사이먼 경이 아니라 브로그뉴 경이, 그리고 아마데우스 백작 측에서는 란델로프 경이 나올 거라 예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중요한 시합에서 2인자를 내세울 리가 없을 테니까.

“아무튼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오. 그럼 이따 연회에서 뵙지요.”

아마데우스 백작은 가신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 와중에도 그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시선을 움직였다.

사실 그는 연회 따위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목표는 오로지 강준이었다.

아마데우스 백작이 두툼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기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강준 선생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나?”

“그게…… 도저히 안 보입니다. 외출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조용히 접촉하도록 해. 저 늙은 여우에게 들키지 않게. 알겠나?”

“명을 받듭니다.”

아마데우스 백작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준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드뇌르 백작이 깐깐한 성정 탓에 고민을 오래한 것이지, 만약 자신이었다면 각종 포상과 파격 인사를 단행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만큼 치유학은 부가가치가 높은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의 목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학문 중 하나니까.

바로 그때였다.

“영주님! 강준 선생입니다. 저쪽, 저쪽이요!”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과연 흑발의 미청년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기회가 왔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마데우스 백작의 발걸음도 그만큼 빨라졌다.

“강준 경!”

지나치려던 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마데우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흠칫 놀랐다. 그의 눈빛이 대단히 차가웠기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살기와 흡사한 기세에 아마데우스 백작이 헛숨을 삼켰다.

다소 무례한 태도였다.

수행 기사가 나서려고 했지만, 아마데우스 백작은 손으로 그를 뒤로 물렸다. 이럴 때는 저자세로 나가는 게 좋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 나는 킹스턴의 영주 아마데우스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

“이, 이봐! 강준 경!”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워낙 걸음이 빨라 그를 붙잡지 못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던 아마데우스 백작이 격노했지만, 분을 삭여야 했다.

“과연 떠오르는 신성이라 이건가?”

분노가 그를 갖고 싶다는 탐욕으로 이어졌다. 혀로 입술을 축인 아마데우스도 갈 길을 갔다.

릴리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터. 킹스턴의 영주라면 꽤 높은 사람인데 그렇게 싹수없이 굴어도 되는 거예요? 나중에 미움 사면 어떻게 하려구.」

‘인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여튼 제자들 사랑은 대단하셔.」

준은 어떤 소식을 전해 듣고 켈세타 성의 진료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그네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였다.

곧 진료실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무관을 찾았다. 사무관은 입원실로 그를 안내했다.

안엔 하룬과 마리가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초췌한 얼굴을 한 아그네스가 침상에 누워 있다.

“괜찮나?”

“전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울 뿐이에요. 죄송해요. 놀라셨죠?”

“언제부터 이랬어?”

“아마도……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새벽부터 이랬던 거 같아요.”

준은 소매를 걷고 손을 아그네스의 이마에 올렸다. 굳이 마나를 흘리지 않아도 상당히 뜨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볍게 기침까지 하고 있었다.

“치료는?”

하룬이 대신 답했다.

“여기 계신 선생님께서 봐 주고 가셨습니다. 왜 있잖아요. 예전에 백작 나리랑 같이 왔던 그 치유사 선생님.”

“흠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도널드 경이 안으로 들어왔고, 하룬은 뜨끔했다.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어도 안 좋은 소리가 귀에 들어갈 뻔했다.

도널드가 뒷짐을 지며 고고히 말했다.

“진찰해 보니 심한 고열을 동반한 감기인 것 같더군요. 특별한 원인은 없는 거 같으니 약을 먹고 충분히 쉬면 나을 겁니다.”

추운 날씨에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일 것이다. 한겨울에 접어들고 있는 계절이었다. 춥더라도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은 욕심이 컸으니까.

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생. 애쓰셨군요.”

“감기 정도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지만…… 특별히 준 선생님이 아끼는 분이라고 해서 봐 드린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뭐, 치유사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도널드는 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생색 정도는 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써먹을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처방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대공자님의 귀빈인 만큼 우리가 보유한 고급 약재를 모두 동원했지요. 자, 보시오.”

도널드 경이 차트를 보여 주었다. 어떻게 치료하고 약을 처방했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준은 딱히 요구사항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외상이 아닌 내과적 질환은 마나를 이용한 치료가 크게 효과가 없다. 약물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좋다. 도널드 경은 비싼 약재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럼 이만 실례. 거 환자한테 너무 말 많이 시키지 마시고. 기침이 점점 심해지는 걸 보니 목에 생긴 염증이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도널드가 밖으로 나갔다. 아그네스가 씁쓸히 웃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괜히 저 때문에…….”

“괜찮다. 신세를 진 건 분명하니까. 좋은 약을 써 줬으니 고마운 일이지.”

“실력도 없는 게 감기 환자 좀 봤다고 으스대는 것 좀 보세요. 저러다 언젠가 혼구멍이 날 겁니다!”

그제야 하룬이 속에 담고 있던 말을 텄다. 그런다고 해서 아그네스의 표정이 밝아지진 않았지만.

“전 진짜 운도 없는 거 같아요. 연회를 앞두고 이렇게 아파 버리다니…….”

“다음에 또 참석하면 되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기회가…… 또 있을까요?”

“없으면 내가 만들어 주지. 이젠 귀족이니까. 내 이름으로 연회도 열 수 있잖아?”

든든한 한마디에 아그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의 성격상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라도 이렇게 해 주는 게 고마웠다.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고마워요. 선생님.”

준은 아그네스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병실을 나섰다.

“선생님!”

하룬이 따라 나왔다. 마리도 마찬가지. 돌아선 준이 그들의 말을 기다렸다.

“저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친구가 아픈데 옆에서 좀 봐 줘야죠. 저만 노는 건 싫어요.”

“저도요. 언니 아픈 거 싫어요.”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역 상류층과 말을 섞어 볼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준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만큼 현명한 친구들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준은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아그네스를 잘 부탁한다.”

두 사람의 어깨를 다독여 준 준은 진료실을 나섰다. 하룬과 마리가 나서 준 덕분일까. 어깨가 조금 가벼워짐을 느꼈다.

* * *

연회는 호화찬란했다.

좋은 술과 음식, 그리고 음악까지. 연회의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드뇌르 백작이 이번 연회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 예복을 갖춰 입은 바스티엔 공자는 연회 참석자들에게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참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지만, 약간의 정치적인 목적도 없진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때 거대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미로운 선율이 뚝 멈췄다.

“신사 숙녀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하늘이 내린 신의, 누아 마을의 기적의 치유사. 강준 준남작께서 입장하십니다!”

근사한 소개와 함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 쪽을 향했다. 바스티엔 공자로부터 시작된 박수가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냈다.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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