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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57화 (57/175)

57화 기술 들어갑니다

아무리 전직 절대자라고 해도 한 시간 동안 기다리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도 준은 내색하지 않고 루치아가 옷을 골라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것은 하룬도 마찬가지였다.

아그네스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의류점을 헤집고 다녔고, 하룬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대답해 주어야 했다.

그때 옷을 살피던 루치아의 눈이 번뜩였다.

전직 신의 전령의 심미안이 발동했고, 드디어 루치아가 옷을 꺼내 들었다.

“이게 좋겠어요. 어때요?”

루치아가 옷을 펼쳐 보였다.

그런데 좀 의외였다. 루치아가 고른 건 블랙 앤 화이트 톤으로 디자인된 평범한 예복이었다. 눈에 확 띄는 복장은 아니었다.

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안 드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루치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괜찮은 거 같은데 한번 입어 볼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

넓은 매장인 만큼 탈의실은 한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준은 직원을 따라갔다.

탈의실로 들어가 루치아가 고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고급 소재라 감촉이 좋았다.

잠시 후 그가 나타났다. 훤칠하고 슬림한 체형에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는지 루치아의 손엔 재킷이 하나 들려 있었다.

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가 걸쳐 준 재킷을 입었다. 검은 자켓과 하얀 셔츠. 거기에 루치아는 연갈색 스카프로 포인트를 줬다.

곁에 있던 점원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머!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부인께서 안목이 정말 좋으신데요? 저도 이쪽에서 꽤 오래 일을 했는데도 한참 부족했네요.”

“고마워요. 이이 취향은 잘 알고 있어서.”

부인이라는 말이 썩 듣기 좋았다. 루치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고, 준은 못 들은 척 옷이 잘 어울리는지 거울로 확인할 뿐이다.

곁으로 다가온 루치아가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었다.

“당신은 화려한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요. 잘생겼으니까. 수수한 옷이 오히려 외모를 받쳐 줄 거예요. 보석도 필요 없고. 스카프 하나면 돼요.”

“확실히 좋네. 편하기도 하고. 적당히 기품을 살린 느낌이야.”

“마리가 보기에는 어때?”

마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녀가 쥐고 있는 지팡이의 큐브가 맹렬히 회전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준이 멋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루치아가 점원을 불렀다.

“이걸로 할게요. 계산은 저기 저 친구들이 고르는 것과 같이 할 거고요. 아 참, 마리는 입고 싶은 옷 없니?”

“없어요.”

“없어도 하나 골라 줄게.”

루치아는 마리의 귀여움을 살릴 수 있는 프릴 원피스를 골랐다. 하얀 레이스에 연분홍빛 천이 조화를 이룬, 예쁜 옷이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본 마리는 부끄러운지 양 볼이 빨개졌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어, 준은 잘 어울린다고 말해 줬다.

아그네스와 하룬도 각각 입을 옷을 골라 왔다.

루치아는 약속대로 돈주머니를 꺼냈다.

“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옷이 많아 잠시 계산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두 벌이 아니었으니까. 그 사이 아그네스는 준의 옷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잠시 후 직원이 계산을 끝냈다.

“2골드 16실버인데, 손님의 안목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2골드만 받겠습니다.”

“비싸긴 하네요.”

루치아가 돈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냈다. 하룬은 까치발을 들고 주머니의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때 뭔가 떠올랐는지 루치아가 준을 바라보았다.

“아까 알파 씨가 준 카드, 가지고 있죠?”

준에게 카드를 받은 루치아는 그것을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 죄송해요. 높으신 분을 몰라뵈었네요. 물건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을까요?”

“이런 용도로 쓰는 카드였군요. 음. 필요한 건 없어요. 고마워요.”

일행은 모이라이의 살롱을 나섰다. 모든 점원이 나와 준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크기에 비해 정말 대단한 카드인 것 같다.

루치아가 말했다.

“카드 회수를 해 가지 않는 걸 보니 자유이용권 같은 걸까요?”

“글쎄. 정확한 용도는 알파 그 사람이 잘 알겠지.”

“상단의 징표 같은 걸까.”

준은 카드를 품에 넣었다. 왠지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 같아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이따 마이더스 상단 지부에 간다면 다시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앞서 걷던 준이 돌아섰다.

“나는 이제 상단에 들러야겠어. 루치아 선생은 애들 데리고 시장 구경 좀 하다가 따로 들어가.”

“알았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준은 바로 마이더스 상단 켈세타 지부 건물로 향했다.

도착한 준은 건물을 한번 훑었다.

배 나온 문지기 두 명이 출입문 양쪽에 서 있었다. 그들은 창을 들고 있었는데, 가죽 갑옷을 걸친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고수다.’

둘 다 마나 유저였다. 아마 시비를 걸거나 침입을 시도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들이 쏟아 내는 시퍼런 창날을 막아 내야 할 것이다.

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누아 마을의 치유사 강준입니다. 지부장을 뵈러 왔습니다만.”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평범한 마나 유저라면 느끼지 못할 기척이겠지만, 준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마이더스 상단이야. 경비가 엄중해.’

준은 다시 한번 방문 목적을 밝혔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부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엔 알파 혼자뿐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 서둘렀습니다.”

“잘 어울립니다. ‘모이라이의 살롱’은 남서부 지역 최고의 옷가게지요. 앞으로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

알파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준은 품 안에서 황금빛 카드를 꺼내 그에게 돌려주었다.

“덕분에 옷은 잘 입었습니다.”

“좀 더 쓰시지 않고선?”

“괜찮습니다. 악당들을 생포한 대가로는 이걸로도 충분한 거 같군요.”

알파는 흥미로운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돌려주지 않았을 텐데. 결국 그는 준이 내미는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을 살펴보며 준이 물었다.

“그런데 지부장님은 어디 가신 겁니까?”

“지부장은…….”

알파는 고급스러운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품에서 모노클을 꺼내 오른쪽 눈에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변했다.

마지막으로 알파는 의자에 편히 앉으며 말했다.

“바로 나요.”

“당신이?”

“놀라셨소?”

“어쩐지 좀 이상했습니다. 전령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더군요. 이름도 가명 같았고.”

씨익 웃은 알파가 맞은편 의자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준은 그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혹시 그 카드는 일종의 시험이었습니까?”

“이거 실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선생의 그릇을 좀 살펴보고 싶었지요. 넓은 그릇인지, 아니면 깊은 그릇인지.”

“그래서?”

“함께 일을 해 봄 직하다는 결론을 얻었지요.”

알파는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준은 문득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눈앞의 저 사람이 켈세타의 지부장일까?

켈세타도 물론 큰 도시이긴 하지만, 지부장에 머물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가 선생의 신뢰를 잃은 모양이군.”

그렇게 중얼거린 알파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선생이 원하신다면, 우리 마이더스 상단에서 제약 및 약품에 관한 유통권 계약을 체결해 드리겠습니다.”

“평범한 종합감기약을 너무 후하게 쳐 주시는군요. 플랭크 씨를 통해 받은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섰지요.”

잠시 말을 끊은 알파는 옆에 놓인 티포트를 들어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정적 속에서 또르륵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평범한 상인들은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에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난 다르지요. 나 정도 되는 상인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더 높게 삽니다.”

“실패한다면?”

“책임을 져야겠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올라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하는군요.”

알파는 자신 있게 웃으며 찻물을 들이켰다.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제안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방식이 달랐다. 상대는 지금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 권유를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갑과 을이 바뀐 상황.

“계약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알파가 테이블 끝에 놓인 종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서류를 준에게 건넸다.

그건 계약서였다.

한눈에 봐도 세심히 작성된 계약서였다. 하지만 준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건 돌아가서 천천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좀 늦게 드려도 괜찮겠지요?”

“편하실 대로.”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알파가 종을 한 번 치자 직원이 들어와 준을 배웅했다. 준은 은근슬쩍 계약서를 아공간 창고에 던져 놓은 다음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숙소로 돌아오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허리를 굽혔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한 시간 뒤에.”

“알겠습니다. 준남작님.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실까요?”

“차 한 잔 부탁해요.”

입이 심심했다. 생각해보니 켈세타 지부에 가서 차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했다.

준은 한옆에 놓인 곰 인형 해피를 들고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전담 시녀는 차를 준비하러 나갔기에, 준은 아공간 창고를 자유롭게 이용했다.

“릴리.”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옷을 입고 수면 모자를 쓰고 있었다. 품에는 곰 인형을 안은 채.

「왜요?」

“곰 인형에 어떤 기능을 넣으면 루드밀라 공녀가 좋아할까? 소녀들의 취향은 알 도리가 없군.”

「글쎄요. 어떤 게 들어가도 상관은 없을 거 같은데. 사실 문제는 다른…….」

“자라.”

준이 관심을 끊자 릴리가 볼을 부풀리며 준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아 쫌! 야근 수당 안 줄 거면 말이라도 좀 끝까지 들으라고요!」

해피의 등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던 준이 고개를 들었다. 릴리가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걸 만들어줘도 공녀가 정말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고. 애초에 곰 인형을 왜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었겠어요?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 거겠지. 흠흠. 제가 아는 친구랑 비슷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릴리. 친구가 없어서 외로워도 힘내라.”

멍하니 있던 릴리가 흠칫 놀라더니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뒤로 숨겼다.

「제 이야기 아니라니까요!」

“원래 지인 이야기라고 꺼내는 이야기는 다 자기 이야기인 거 아닌가?”

「단정하지 마요!」

분함을 이기지 못한 릴리는 혼자 씩씩거리다 다시 모습을 감췄다. 때마침 시녀가 차와 간단히 곁들일 수 있는 과자를 내왔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잠깐 실례.”

준이 시녀의 손을 잡았다. 손등이 빨갛게 부어 있었는데, 서서히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데인 겁니까?”

“어맛, 괜찮습니다. 준남작님. 이 정도는…….”

“외상은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앉아요.”

당황한 시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준은 왕진 가방을 열어 응급처치 키트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준은 화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키트에 있는 약재를 바르고, 압축한 붕대를 풀어 가볍게 감았다. 마지막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곧 치료가 모두 끝났다.

“흉터는 남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준남작님.”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 시녀가 총총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치아 님께 다 이를 테다.」

“뭐를?”

「흥. 모른 척하시긴. 작업이 너무 자연스러웠잖아요.」

피식 웃은 준은 공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라이트.”

하얀 광원이 사방으로 빛을 뿌렸다. 준은 마치 수술을 하는 것처럼 공구를 놀리며 곰 인형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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