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56화 (56/175)

56화 모이라이의 살롱

감미로운 와인과 함께, 백작과의 환담은 편안한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자연 대화는 준이 펼친 활약들에 집중되었다.

사실 백작은 그에게 물어볼 말이 정말 많았다. 주변에서 쉬지 않고 준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넘어간 다음 주제는 준에게 종합감기약의 조제법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사기꾼 일당 이야기였다.

마침 준도 궁금하던 차였다. 그들에게 받아야 할 외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놈들? 지하 감옥에 가두었네. 흰 머리가 풍성해질 때까지 햇빛을 보지 못할 거야.”

“처형을 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자비를 베푸신 겁니까?”

“자비라니. 이상한 말을 하는군. 나는 놈들을 그렇게 편하게 보내 줄 생각은 없네. 평생 고독과 씨름하다 죽어가는 게 훨씬 고통스럽겠지.”

백작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씨익 웃었다. 의외로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며 준은 화제를 돌렸다.

“작위를 받았으니 앞으로 가신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까?”

“경의 의지대로.”

“이제 대공자께서도 건강을 되찾으셨으니 가능하면 누아 마을을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만.”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누아 마을에 병원을 세운 것도 그것을 염두에 두어서였다.

단순히 그가 공을 세워 은혜에 보답하고자 병원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니었다.

준의 명성을 이용해 지체 높은 귀족들이나 고위 인사들의 특별 진료소로 활용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누아 마을로 가려면 반드시 켈세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생기니까.

그래서 이번 연회가 여러모로 중요했다. 준의 의술을 널리 알려 귀족들에게 입소문을 퍼트리면 환자가 하나둘 늘어날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네.”

“말씀하시지요.”

“우리 가문의 오랜 충신이기도 하고, 나의 친구이자 바스티엔의 스승이기도 한 사람이 있네. 그 친구가 두통이 심한 편인데 경이 한번 진찰을 해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기만 하던 바스티엔이 나섰다.

“파비안 경은 유능한 인재지. 학식도 높고 지혜가 깊소. 아마 경과 말이 잘 통할 것 같은데 모쪼록 잘 봐 주시오.”

“기사가 아니라 학자입니까?”

“하하하. 검은 휘두를 줄도 모르는 분이지요. 오래도록 천문학을 연구하고 있소. 수학에도 재능이 탁월하고.”

천문학?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표정이 진지해 바스티엔 공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꽤나 어려운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천문학은 계산 단위가 크니까 머리가 아픈 것도 좀 이해가 되는군요.”

“그의 연구실엔 늘 숫자로 가득한 메모가 널려 있지. 보기만 해도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준은 와인을 마시며 진료 계획을 세웠다.

영주의 친구이자 대공자의 스승이나 되는 사람이 두통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외의 부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문득 마르다 마을에서 알렌 준남작에게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한번 연구실에 가 보는 것도 좋겠군. 엉뚱한 곳에 해답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백작과의 환담이 마무리되었다. 준남작 작위 이외의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대화도 평범한 수준으로 오갔다.

“그럼 연회에서 만나지. 바스티엔. 경이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거라.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야.”

“예. 각하.”

백작의 집무실을 나서자 시녀가 앞장을 서서 길을 안내했다. 준은 대공자와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공자는 사우던 가의 가신이 지켜야 할 중요한 수칙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봉토 대신 봉급을 받는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사우던 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신민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경의 작위가 준남작에서 끝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어디까지 날아오르는지 지켜보며 응원하겠소.”

바스티엔 공자는 다시 한번 축하의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 릴리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흥. 작위는 안 받을 것 같더니 결국 받았네요?」

‘너무 밀기만 하면 예의가 아니지. 가끔은 당겨 줄 필요가 있다. 인간 사이의 관계란 그런 거지.’

「저기요. 그 말,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쓰시는 거 같은데?」

준의 눈앞으로 쪼르르 날아온 릴리가 허리춤에 손을 짚고 훈계하듯 말했다.

「루치아 님한테는 밀기만 하잖아요. 가끔은 좀 당겨 주라구! 마스터 보려고 강림한 사람인데 그러면 못 써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면서?」

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릴리가 이렇게 정곡을 찌르고 들어올 줄이야.

「인정하는 부분?」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다. 서로 후회가 남을 수도 있으니까.’

「후회는 일단 지르고 하는 거죠.」

‘마지막 인생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릴리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준의 말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준남작된 기념으로 청혼하세요. 아주 좋아하실걸요?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렇게 끝. 세계를 구한 용사에게 딱 어울리는 스토리죠. 장편은 어렵고 한 6권 정도로 완결하면 되겠네. 에필로그는…….」

‘너 혹시 요즘 소설 쓰냐?’

「헐. 들킴?」

‘어째 요즘 조용하다 싶더니만.’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문을 여니 손님들로 가득했다. 누아의 의료진들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준이 들어오자 모두가 일어섰다.

“우리 자랑스러운 귀족 나으리 오셨네.”

루치아가 서두를 장식했다. 이어 하룬이.

“축하드립니다!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가시더라도 기사단 입단 추천서는 꼭 써 주시고 가시고요.”

“준남작위는 너무 짜요. 남작위는 받아야 하는데. 그치? 마리야.”

“응. 백작님 나빠.”

아그네스도, 마리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모두가 자신이 작위를 받은 양 기뻐했다. 준은 새삼스레 느꼈다. 신의 위업을 달성했을 때보다 이렇게 소소한 축하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언제까지 이런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변수는 많다. 준남작이 되면서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대공자를 치료하게 되면서 점점 주목을 받는 중이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자신은 이제 불멸자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기에도 부족한 인생이 주어진 상황이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준남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

켈세타엔 연고가 없다. 사우던 가문의 사람이라면 손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터다.

대체 누굴까?

“안으로 모셔요.”

“예. 준남작님.”

존댓말을 쓰는 귀족은 처음이라 시녀는 살짝 놀랐지만, 기분 좋게 웃으며 물러났다.

곧 손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중년이었는데, 세상의 모든 풍파는 다 겪어 본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쉬시는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때맞춰 잘 오셨군요. 마이더스 상단에서 오셨습니까?”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온갖 병들이 준남작님을 무서워할 만합니다.”

예전에 진료소로 찾아왔던 플랭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먼저 준남작이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또한 우리 상단을 사칭한 악질 사기범을 생포해 주신 것도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마이더스 상단의 켈세타 지부장께서 준남작님을 정식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편한 시간에 들러주시면 기쁘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이요?”

사내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준은 뒤를 둘러보며 의견을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아그네스의 반응이 격했다. 한시라도 빨리 도시를 거닐고 싶었나 보다.

준이 이유를 밝혔다.

“곧 연회가 열리는데 옷과 장신구를 좀 구입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런 복장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겸사겸사 지부장님을 뵈면 더 좋겠지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군요. 저희 마이더스 상단에서는 고급 의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찾아주신다면 특가에 모시도록 하지요.”

“안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지요?”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군요.”

제법 위트가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알파’라고 밝혔다. 왠지 가명 같았지만, 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준이 아까 마차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루치아에게 물었다.

“루치아 선생. 아까 오면서 애들 옷 사 주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돈주머니 잘 챙겨. 마이더스 직영점이라면 제법 가격이 나갈 거다.”

“걱정하지 말아요. 진짜 부가 뭔지 보여 줄 생각이니까.”

루치아가 돈주머니를 짤랑이며 미소를 지었다. 대체 저 안에 금화가 몇 개가 든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은 알파의 안내를 받아 성을 나서 도심으로 향했다.

* * *

거리는 화려했다.

켈세타 시는 규모도 규모지만 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조명도 마찬가지. 날이 제법 어둑해졌지만 대낮처럼 화려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아그네스는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이곳저곳을 빠르게 돌아다니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룬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혹시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준과 루치아, 그리고 마리는 조금 뒤에 떨어진 곳을 걸었다.

선두에 선 알파가 손가락으로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보이는 큰 건물이 마이더스 켈세타 지부입니다. 제가 가서 미리 지부장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 편할 때 찾아오십시오. 참, 그리고 옷을 구매하실 때 이걸 보여 주면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모이라이의 살롱’을 추천해 드리죠.”

알파는 금으로 도금된 카드를 준에게 건넸다. 아마 직원 할인 비슷한 개념이 적용된 카드 같았다.

“곧 들르겠습니다. 편의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따 뵙지요.”

알파가 인파 무리로 사라졌다. 이제야 일행은 다소 편하게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준은 마리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마법 도구 전문 상점에 들렀다. 이제 마리는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그럴듯한 지팡이와 로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준이 고른 것은 평범한 목제 지팡이와 로브였다.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정말 초심자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물건으로는 이익이 별로 남지 않는다. 상점의 상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딜을 시작했다.

“저, 손님? 이쪽에 있는 이 지팡이는 어떠십니까? 천연 에메랄드로 장식되어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아주 훌륭한 물건이지요!”

“괜찮습니다. 이걸로 주십시오.”

“이쪽에 있는 루비 제품은…….”

“괜찮습니다.”

결국 1실버도 채 되지 않은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고 준은 상점을 나섰다.

지켜보던 루치아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준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준은 미리 아공간 창고에서 꺼내 놓은 투명한 큐브를 쥐었다.

큐브의 겉으로 두 개의 원형 궤도가 교차되어 있었는데, 지팡이에 장착하는 순간 큐브가 궤도를 돌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로브의 윗단추를 제거하고, 거기에 완벽한 어둠을 품고 있는 보석을 박았다. 순간 로브가 검은빛에 휩싸이더니 파르르 떨었다.

“‘무한의 궤도’와 ‘심연의 수정’이라…… 지금 마리의 경지에서는 딱 적당한 성물이네요.”

루치아는 그 성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카이젤 드라케의 유물만큼은 아니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준은 성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팡이를 손에 쥐여 주고 로브를 걸쳐 주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정말 좋아요. 고마워요. 스승님.”

마리는 신이 난 표정으로 지팡이를 흔들어 보았다. 로브도 등에 딱 달라붙는 것처럼 착용감이 좋았다. 웬만한 공격은 전부 튕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당신이 입을 옷도 좀 사야죠? 백의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럴까.”

루치아는 준과 마리를 데리고 알파가 알려준 고급 의류점으로 들어갔다. 이미 아그네스와 하룬은 서로의 옷을 골라 주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점원들은 같은 복식을 하고 깍듯이 손님을 맞았다. 사방에 거울이 있어 고급스러움에 신비감을 더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떤 옷을 찾으시는지요?”

“남성복을 좀 보고 싶은데요. 이분이 입을 옷인데.”

“이쪽으로 오시죠.”

점원은 옷 몇 벌을 추천했지만, 루치아의 심미안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결국 루치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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