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새로운 칭호
“들어와라.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응!”
활발한 소녀였다.
바스티엔 공자의 태도나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소녀가 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바스티엔 공자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보면 실례란다. 인사드려야지.”
“이분이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 준 그 신의야?”
“그렇단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되게 젊으시네요!”
큰 눈을 깜빡인 소녀가 바르게 서더니 치마 끝자락을 잡고 예를 취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소녀의 품에서 떨어진 곰 인형이 스스로 일어서더니 소녀와 같은 동작을 취했다. 인형이다 보니 무척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우리 오라버니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 가문의 막내라오. 이름은 루드밀라. 아직 어리다 보니 철이 없어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오.”
“이제 어리지 않다니까!”
어리다는 말을 조금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루드밀라 공녀는 올해로 열다섯 살. 사우던 가의 막내이자 가문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녀였다. 그래서 성격이 쾌활하고 자유분방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행동은 어려 보이긴 했다.
“강준입니다. 누아 마을에서 치유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준은 스스로 움직이는 곰 인형에 관심을 두었다. 기어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마법공학을 이용해 만든 것 같았다.
준이 몸을 숙여 곰 인형을 관찰했다.
“흥미로운 녀석이군요.”
“어떤 부분이요?”
“인형술이 아니라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녀석 같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거 같은데, 아닙니까?”
“우와. 역시 배운 분! 제대로 보셨어요.”
마치 자신이 가진 보물의 진가를 알아봐 준 사람처럼, 루드밀라는 기뻐했다.
그런데 곰 인형이 루드밀라 공녀의 동작을 따라 하던 중 문제가 생겼다.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해피가 긴장했나 봐요. 가끔 이래요. 부끄럼이 많은 아이라서요.”
루드밀라 공녀가 손으로 곰 인형을 쓰다듬었다. 미약한 마나가 느껴졌다. 백작가의 공녀답게 마나 유저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공녀는 두 손으로 인형을 들어 준에게 건넸다.
“우리 오라버니를 낫게 해 주셨으니 특별히 해피를 만져 볼 기회를 드리죠!”
“영광입니다.”
준은 인형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고도의 마법공학 기술이 적용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준은 해피가 고장 나지 않는 선에서 마나를 흘렸고, 내부를 탐색했다.
‘기어의 이빨이 나가 있군. 부끄럼이 많은 게 아니라 부속에 이상이 있어. 설계도 뭔가 엉성하고…….’
준은 다시 해피를 루드밀라 공녀에게 돌려주었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묻고 싶었다.
“혹시 이 녀석을 직접 만드셨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그럴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법공학 지식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막내는 기계에 관심이 많소. 마법공학뿐만 아니라 기계 장치와 관련된 모든 것에 흥미가 있지. 밤낮없이 책을 읽은 탓에 안경을 써야 하지만 말이오. 한때 아버지께서 독서 금지령을 내리시기도 했지.”
그렇게 설명한 바스티엔은 루드밀라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애정이 넘치는 눈빛이었다. 사이가 좋은 오누이인 것 같았다.
준이 제안했다.
“제가 보기에 해피는 부끄럼이 많은 게 아니라 좀 아픈 것 같은데요.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네에? 아프다고요?”
“관절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설계에 문제가 있다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꿈 많은 소녀의 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루드밀라 공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제안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럼 선생님이 낫게 해 주세요!”
당당히 해피를 다시 내밀었다. 준은 아이를 받듯 조심히 받아 품에 안았다. 놀랍게도 품에 있던 해피가 기어오르더니 어깨에 앉았다.
그때, 릴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무식한 쇳덩이가! 저리 가! 내 자리야, 인마!」
릴리가 고함을 쳤지만 해피는 당당히 준의 왼쪽 어깨를 차지했다. 고개를 까딱이며 발을 구르기까지 했다. 마치 릴리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바스티엔 공자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귀빈께 일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오.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괜찮소.”
“아닙니다. 각하를 알현한 뒤에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필요한 부품이 있으면 말씀하시고.”
“알겠습니다.”
루드밀라는 눈을 크게 뜨고 준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생일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눈빛이었다.
“그럼 내일 해피 데리러 올게요!”
“아닙니다. 수리가 끝나면 제가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곧 그녀는 해맑게 인사하더니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 바스티엔 공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막내가 좀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 아버지도 그렇고 가신들도 오냐오냐하다 보니 철이 덜 든 것 같소.”
“오히려 공녀께는 좋은 일입니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혁신을 만들어 내는 법이니까요. 적어도 제 고향에서는 그랬습니다.”
“선생의 고향은 어디신지요?”
“아주 먼 곳입니다. 대공자께서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궁금하군요.”
준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어깨에 앉아 있던 해피를 다시 두 손으로 옮겼다. 고쳐야 할 부위가 하나둘 보였다.
‘손을 봐 주는 김에 기능 몇 가지를 추가해 줄까?’
준의 머릿속에서 수식과 설계도면이 빠르게 완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루드밀라 공녀의 성격을 분석했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설계에 들어갔다.
“강준 선생?”
“아, 실례 많았습니다. 혹시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소. 왠지 방해하는 것 같아서. 숙소로 안내해 드리지. 거기에서 인형을 보도록 하시오. 가신회의가 끝나면 연락을 주겠소.”
두 사람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시각, 백작의 집무실에서는 준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던 말인가?”
마르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받은 백작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 던전이 나타났는데, 준이 부상을 당한 탐사대를 구조하고 임시 진료소를 열어 마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던전은? 어떻게 됐나?”
“마르다 자경단의 보고에 의하면 코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목엔 한계가 있기에, 오늘 즉시 특별 조사단을 꾸려 마르다 마을에 파견했습니다.”
“잘했군.”
드뇌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면 당장 크게 신경 쓸 일은 없다.
“다른 곳에 던전이 생성되었는지 철저히 감시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런데 강준 치유사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떤 젊은 가신의 질문에 집무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있던 백작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장내가 고요해졌다.
“머리가 아프군. 포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서 나도 곤란해.”
“작위를 거부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떻게든 회유해서 수여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영지에서 그 선생을 채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다른 가신들도 하나둘 거들었다. 어떻게든 준에게 작위를 내려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것이 영지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백작이 손을 홰홰 저으며 토론을 끝냈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아, 파비안 경. 그대는 잠시 남으시오.”
안경을 낀, 메마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남은 가신들은 백작에게 예를 취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곧 집무실엔 백작과 파비안 경 두 사람만 남았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명은 무슨. 그냥 좀 마음 터놓고 의논할 상대가 필요해서. 근데 요즘도 두통을 달고 사나? 표정이 영 아니올시다인데.”
“애석하게도요.”
“쯧쯧, 그러게 하늘 좀 그만 올려다볼 것이지. 본다고 뭐 금덩어리가 쏟아지기라도 하나?”
백작이 자리를 옮겼다. 마주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었다.
파비안 남작은 사우던 가문에 오래도록 충성을 바친 인물로, 백작과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학식이 깊어 백작의 책사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비루나 왕립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오래전부터 하늘과 별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고, 영지 일이 없을 땐 천문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랜 친구였지만, 파비안 남작은 드뇌르 백작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예를 거두지 않았다.
“앉게.”
드뇌르 백작은 매번 이 소리를 해야 앉냐며 한소리 하려고 했지만, 파비안 남작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제야 파비안 남작이 착석했다.
“그런데 상의할 일이 무엇입니까?”
“강준. 그자에게 작위를 주는 문제 때문에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넘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파비안 남작이 조용히 눈을 빛냈다. 드뇌르 백작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흠흠. 이거 실례. 아무튼, 대공자의 불치병을 치료했다는 것 자체가 큰 공입니다. 작위 수여를 거절하더라도 밀어붙이셨어야지요?”
“역시 그런가?”
“게다가 던전에서 조난당한 자들을 구하고, 임시 진료소를 열어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특히 강침으로 심장을 찌르는 치료 방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도널드 경이.”
“흐음.”
백작의 생각이 깊어졌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파비안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리 고민이십니까?”
“준. 그자의 배경이 너무 이상할 정도로 너무 깨끗해서 말이야.”
“깨끗하다뇨? 설마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드뇌르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의 긍정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던 파비안 남작이었다.
“정식 치유사 과정을 밟은 이력도 없고, 출신지도, 나이도 불분명하네. 이런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쓸 수 있는지 걱정이 된다는 말이야.”
“영주님. 사고 절약의 원리라는 말 아십니까?”
“젠장! 또 시작이군.”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는 불필요한 가정을 하면 안 된다는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왜 자꾸 소설을 쓰십니까? 오히려 배경이 깨끗하다면 더 좋은 거지요. 킹스턴 영지 출신이었다면 머리가 한 움큼은 빠지셨을 겁니다. 아닙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에 한숨을 내쉰 백작이 결정을 내렸다. 때마침 편두통이 도졌는지 파비안 남작이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알았네. 알았다고. 그러니까 잔소리는 그만하고, 내친김에 강준 그자에게 진료를 한번 받아보는 건 어떤가?”
“괜찮습니다. 두통이 하루 이틀 있던 일도 아닌데. 좀 쉬면 낫겠지요.”
“바스티엔의 청이야. 그러니 이번엔 고집 좀 꺾어.”
“으음.”
파비안 남작은 바스티엔 대공자의 학문 스승이기도 했다. 총명한 그를 아끼는 만큼, 이번 청을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연회 때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얘기해 보지요.”
“잘 생각했어. 어서 가서 쉬게. 그 빌어먹을 망원경으로 하늘은 좀 그만 좀 들여다보고! 확 그냥 구름이나 끼었으면 좋겠군.”
파비안 남작은 그저 예를 취할 뿐이었다.
그가 나가고 백작은 서기관을 불렀다. 서기관은 성 내의 사무관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강준 치유사에게 준남작위를 수여한다. 절차 생략하고 훈장도 바로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곧 서기관이 고풍스러운 상자에 훈장을 담아 왔다. 금으로 된 작은 훈장이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준과 바스티엔 공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성으로 오는 길에 또 큰일을 했더군. 강준.”
그렇게 운을 뗀 드뇌르 백작이 훈장을 직접 준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처음 보는 훈장이라 준은 한참이나 들여다봐야 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가문에서 쓰는 준남작 작위 훈장이네. 축하하네. 자네는 오늘부로 켈세타의 준남작이야. 나는 켈세타의 영주로서 자네의 명예와 권리를 보증할 것이네. 사우던 가를 위해 힘써 주도록 하게.”
마르다 마을에서의 일이 언급되리라는 예감은 했지만, 훈장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보통은 작위 수여식이 열리는데 모든 것이 생략된 파격적인 대우였다.
준은 훈장을 어루만졌다.
이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이뤄 온 업적들은 준남작 작위 하나로 끝나지 않는 것들이니 말이다.
“영광입니다. 각하.”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지. 강준 경.”
‘신의 대리인’에 이어 그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