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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54화 (54/175)

54화 켈세타에 도착하다

다음 날, 준 일행은 다시 켈세타로 향했다.

준은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환송한 것이다. 마치 축제를 방불케 했다.

“나중에 갈 곳 없으면 여기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요. 누가 보면 전쟁영웅이 돌아온 줄 알겠네.”

루치아가 차창 밖을 바라보며 감상을 전했다. 준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치유사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마을 사람들은 물론, 마르다의 자경단원들도 나와 있었다. 붕대를 감고 손을 흔드는 사람들은 구조된 탐사대원들이었다.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날 정도로 회복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환송 대열에 끼고 싶었다. 오늘 준이 떠나면 언제 다시 마을에 들를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그네스도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저기 좀 보세요. 다들 많이 좋아지셨나 봐요. 역시 선생님의 치유술은 대단해요.”

“어떤 선생님?”

루치아가 짓궂게 묻자 아그네스는 당황했다. 아직까지 아그네스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치유사는 준뿐이었다. 그래서 호칭에 혼돈이 있었다.

“아하하하…… 당연히 두 분 모두 말한 거였죠.”

“정말?”

“그럼요!”

루치아는 그저 웃을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한숨 돌리며 다음부터는 호칭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그녀를 구한 것은 준이었다.

“약초는 잘 챙겼지?”

“알렌 선생님이 많이 주셔서 오히려 누아 마을에서 나올 때보다 더 많아졌어요.”

“상하지 않게 보관 잘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쓸지 모르니까.”

준은 약초에 보존 마법을 걸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약초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올 때까지는 마법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준 일행이 탄 마차는 마르다 마을을 빠져나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치아는 가끔 흉폭한 몬스터들이 앞길을 막아 주길 바랐지만, 그저 바람으로 끝나곤 했다.

“평화롭네요. 좀 지루하기도 하고.”

턱을 괸 루치아가 중얼거렸다. 아무 반응이 없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준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룬은 맞은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마리와 아그네스는 조용히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그냥 이것저것.”

준이 책을 읽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에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늘 무기를 든 것만 봐서 그런지 새로웠다.

루치아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책 안을 들여다봤다. 복잡한 도식과 수학 공식, 그리고 기계 장치가 그려져 있었다. 한마디로 머리 아픈 책.

물론 그것은 일반인들의 관점이었고, 전직 신의 전령은 달랐다.

“마법공학? 또 뭘 만드시려고?”

“최근 약의 순도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어.”

“이젠 연구까지 해요?”

준은 싱겁게 웃었다.

“새로운 진료소도 곧 들어설 테니 연구 장비도 만들어 둬야지.”

“부지런도 하셔라. 이런 건 또 언제 구했대요?”

“내가 직접 쓴 거다.”

그제야 루치아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아에 정착한 이후, 준이 틈틈이 기록한 것들이다.

흥미가 동했다. 준에 관한 건 뭐든지 관심이 있었던 그녀였으니까. 그녀는 복잡하게 그려진 기계 장치를 꼼꼼히 살폈다.

“다 좋은데 누아 마을에 이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법 괜찮은 장인들이 몇 명 있어. 목재류와 철기는 문제없이 만들 수 있지.”

준은 치유의 여신 엘레나의 조각상을 흔들어 보였다. 일전에 장인 펜터가 정착 선물로 준 그것이었다. 루치아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누아 진료소에 있을 때는 진료실 책상 위에 올려 두지만, 멀리 외출을 할 때는 체인을 껴서 목걸이처럼 하고 다녔다.

“잘 만들었네요. 이게 당신의 부적인가요?”

“내가 누아 마을에서 받은 두 번째 선물이기도 하지.”

“첫 번째 선물은 뭔데요?”

준은 입고 있던 백의를 펄럭여 보였다.

루치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어울리긴 했지만 선물치곤 연식이 좀 오래되어 보였으니까. 역시 루치아는 그 점을 지적했다.

“옛날 마을 치유사가 입었던 옷이라고 하더군. 내가 그의 뒤를 이었으니 백의도 이어받은 셈이지.”

“기왕 줄 거면 새 옷으로 주면 좋았을 텐데. 대접이 마르다 마을보다 못하네요. 켈세타에 가면 근사한 걸로 하나 사죠. 내가 사 줄게요.”

“그 돈으로 애들 옷이나 한 벌씩 사 줘.”

옷 이야기가 나오자 맞은편에서 떠들던 두 소녀가 잡담을 멈추고 눈을 반짝였다. 진짜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루치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은 좋겠다. 인정도 많고 돈도 많은 선생님을 모셔서.”

“준 선생님이 아니라 루치아 선생님이 많은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 사 주셔야 하니까요.”

“아, 그러네?”

여자들의 웃음소리에 잠에서 깬 하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엉뚱한 모습에 준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소리만큼이나 여정은 순조로웠다.

위험한 야생동물이나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우던 가문의 제1기사단은 대륙 남서부에서 가장 강하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들의 군기는 엄정했고, 훈련은 고되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명성은 드높았고.

게다가 켈세타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 도시기 때문에 근접할수록 나타나는 몬스터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에 비례해 인적은 많아졌다.

상단의 마차도 지나갔고, 여행자들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길을 재촉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마을을 떠났어요.」

그때, 릴리가 보고했다.

준은 릴리를 마르다의 던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철혈의 대공 카이엔의 행적을 주시하게 했다. 던전의 코어가 박살난 이상 그곳에 머무는 것은 의미가 없었을 터.

‘고생했구나. 이제 좀 쉬어라.’

「근데 저렇게 위험한 놈을 풀어줘도 되는 거예요? 마을에서 큰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데.」

‘부상이 심해 힘을 거의 쓸 수 없는 상태야. 괜히 나섰다가 눈먼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지.’

「과연 진료소로 올까요?」

‘글쎄?’

확률은 반반이었다.

마계는 와해되었고, 그들이 따르는 신은 소멸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을 마감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생을 시작하든지는 전적으로 그의 선택에 달렸다.

그래도 준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신마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카이엔은 심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것이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되기를 바랐다.

「부디 팝콘을 튀길 상황이 오기를!」

‘살찐다. 너.’

릴리는 아무래도 카이엔이 진료소로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재미는 있을 것이다. 볼카누스와 마주친다면.

릴리는 종적을 감췄고, 때마침 기사단장 브로그뉴가 속도를 줄이며 마차 옆에 따라붙었다.

준은 차창을 열었다.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곧 켈세타에 도착합니다! 바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차창을 닫았다.

“목적지가 눈앞이다! 모두 속도를 올려라!”

브로그뉴가 우렁차게 외쳤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말을 독려했다. 마차에 가속이 붙었고, 기사단원들도 진형을 견고히 유지하며 속도를 끌어올렸다.

저 멀리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준 일행이 켈세타에 도착한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 * *

누아 의료진을 위한 환영식은 사우던 가의 위엄을 제대로 보였다.

마주 보고 도열한 기사단원 사이로 붉은 카펫이 깔렸다. 그리고 내성 입구엔 바스티엔 공자와 세사르 공자가 친히 마중을 나왔다.

곧 준 일행이 탄 마차가 내성 앞에서 멈췄다. 시종이 재빨리 다가가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스티엔 공자의 안색을 살피는 일이었다.

‘못 알아볼 정도로 좋아졌군. 살도 좀 붙은 거 같고. 약이 잘 들었나?’

그는 누아 진료소에 입원해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누군가에게 그를 불치병을 앓았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면 손사래를 치며 믿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거기에 자신감과 총기까지 더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준 일행이 카펫을 따라 걷자, 사우던 가문의 두 공자도 계단을 내려와 일행을 맞이했다.

바스티엔 공자는 두 손으로 준의 손을 잡았다.

실로 최고의 대접이었다.

“하하하! 먼 길 오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소!”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니 참 반갑습니다. 약이 입맛에 잘 맞으셨던 모양이군요.”

“내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약을 거르겠소? 그런데 이분은 누구입니까? 처음 뵙는 얼굴인데.”

루치아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바스티엔 공자는 물론, 내성 안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라 준이 나섰다.

“이번에 저희 진료소에 새로 부임한 루치아 선생입니다.”

“잉그바르 가의 루치아랍니다. 준 선생님 통해 말씀 많이 들었어요. 쾌차하셔서 다행이네요.”

“고맙소.”

루치아는 근사하게 귀족식 인사를 올렸다. 과연 주도면밀한 전직 천사였다. 저런 건 언제 배워 온 건지.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군. 놀랐소. 우연히 누아에 부임하신 것 같진 않은데, 혹시 준 선생과의 관계가?”

“관계요?”

루치아가 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신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왠지 절대악을 잡으라는 신의 퀘스트보다 더 어려움을 느꼈다.

“예전부터 함께 일해 온 사이입니다. 꽤 오래 알고 지냈지요.”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하네요.”

루치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왠지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준은 세사르 공자가 말을 걸어 온 탓에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잠시 환담을 나눈 일행은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폴링 씨는 안 보이는군요.”

“사무관은 요즘 아주 바쁘오. 누아 마을 진료소 설립 건으로 도시를 오가고 있지. 설계가 거의 끝나서 다음 주 중에 기술자들을 누아 마을로 파견할 계획이고.”

“그렇군요.”

생각보다 진료소 건축이 앞당겨진 것 같다. 그만큼 백작이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새로운 진료소에서 사용할 실험기구들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험기구까지? 아, 그러고 보니 누아에서 조제한 종합감기약이 그렇게 효과가 좋다고 들었소만.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일인지요?”

“그렇습니다. 사실 그건 제가 구상하고 있는 일 중 일부에 불과하지요.”

“몹시 궁금하군요. 대체 어떤 일을 구상하고 있기에?”

“모두가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현재 치유학의 수준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과 학문 양면에서 수준을 끌어올릴 계획이지요.”

“오오!”

치유술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미완의 과제가 많이 남아 있었다. 준은 그 미완의 영역을 개척하기로 했다.

“각하께서는 지금 가신 회의 중인데. 잠시 기다린 후 함께 뵈러 가시지요. 밀린 이야기가 참 많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전에 잠깐 대공자님을 진찰하고 싶습니다만.”

“과연. 환자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시군. 알겠소. 그래야지요! 자, 내 방으로 갑시다.”

동생인 세사르 공자가 나머지 일행을 상대했다. 그들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고, 준은 홀로 바스티엔 공자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리를 하던 시녀 둘이 허리를 굽혔다.

“모두 나가 있어라.”

“예. 공자님.”

과연 사우던 가의 후계자가 쓰는 집무실다웠다. 상당히 넓었고, 소문난 명장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각종 가구와 집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사람을 모두 물린 바스티엔이 의자에 편히 앉았다. 준은 그의 옆에서 맥을 짚었다.

마나를 흘려 바스티엔 공자의 혈맥을 한 바퀴 탐색한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약은 그만 드셔도 될 것 같군요. 아주 상태가 좋습니다.”

“그 말씀만 기다리고 있었소. 이젠 무슨 일을 하든 자신감이 붙지. 이게 다 선생 덕분이오.”

“계획하셨던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생각보다 쉽진 않지만, 천천히 진행하고 있소. 각하께서 건재하시니 드러내놓고 할 순 없어 암암리에 진행 중이지요.”

“그렇군요.”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녀가 다과를 준비해 온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처음 보는 소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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