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철혈의 대공
알렌의 지원 덕에 진료는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준은 알렌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장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프리드 씨의 발작은 원인을 알기 어렵군요. 흐음, 장기간 관찰을 해야 하는데 좀 아쉽습니다.”
“저도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진료한 환자인데 손쓰기가 쉽지 않더군요. 대체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알렌은 자신에게 좋을 게 없는 상황에도 뭐든 솔직히 의견을 표했다.
그가 의료진을 이끌고 약재를 이곳으로 가지고 왔을 때 준은 확신했다. 사리 분별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마나 유저라 자존심이 강할 텐데,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자처해서 준을 도왔다.
실력과 경험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하지만 사람의 성정은 다르다.
선천적인 것도 있지만 오래도록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고 다루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알렌은 좋은 원석이었다.
“치료의 단서는 환자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환자가 처한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병소는 환자의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아!”
뭔가 깨달았는지, 알렌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지금까지는 진료소에서만 환자를 봐 왔다. 준은 왕진의 필요성을 알려 준 것이다.
“프리드 씨의 댁에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거기서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봐야겠네요!”
“그러시죠. 그리고 이걸.”
준은 새카만 주머니를 알렌에게 건넸다. 무척 가벼웠는데, 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빈 주머니인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월영초를 말린 잎입니다. 프리드 씨 치료에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광기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월영초라니!”
깜짝 놀란 알렌이 조심스레 주머니를 열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고 있는 월영초 잎이 보였다. 책에서만 봐 오던 약초였는데, 이렇게 실제로 볼 줄이야.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월영초는 정말 귀한 약초였으니까.
“이렇게 귀한 걸 주셔도 되는 겁니까?”
“그냥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걸로 프리드 씨를 꼭 완치시키세요.”
“아!”
과연 치료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알렌은 긍정했다. 그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월영초가 든 주머니를 챙겼다.
“꼭 완치시켜 보이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말이죠.”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준 선생님도 그렇지만, 루치아 선생님도 대단하시더군요. 한 걸음 내디딘 기분입니다. 하하하!”
두 사람이 악수했고, 마르다의 의료진들이 여관에서 모두 철수했다. 뒷정리는 사우던 가의 기사단원들이 수고해 주었다.
아그네스가 보람찬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이런 경험도 참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훌륭한 치유사가 되면 대륙을 돌아다니며 아픈 분들을 봐 드리고 싶어요.”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
준은 아그네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일을 하게 된 직원들과 기사단원들을 불러 치하했다. 장소를 제공해 준 주인장에겐 은화 한 닢을 건넸다.
그렇게 임시 진료소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준의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두운 밤, 달이 한창일 때 준은 숙소를 나섰다. 물론 루치아도 함께였다.
“아아, 공기 좋다. 마족 때려잡기 참 좋은 밤이네요. 이 스태프로 머리를 콱.”
“그러지 말라니까.”
“아그네스만 어깨 다독여주고 말이야. 고생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준은 살짝 놀랐다. 늘 당당하고 도도하던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하지만 의도적인 도발이었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당황한 준의 모습을 보고 루치아가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역시 당신은 당황한 모습이 제일 재미있어요.”
“또 그 이야기군.”
“사실이니까요. 다음엔 또 어떻게 놀려먹는담?”
그렇게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밤길을 걸었다. 릴리는 뒤로 조금 떨어져 두 사람의 훈훈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팝콘을 손에 쥔 채.
“어? 강준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이 늦은 시간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지요?”
던전의 입구는 여전히 자경단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대우가 달라졌다. 준은 이미 마르다 마을의 영웅이 되어 있었으니까.
“던전에서 물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찾으러 왔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호위가 필요하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들은 예를 취하며 입구를 열어 주었다. 두 사람은 손쉽게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루치아의 날카로운 눈이 사방을 훑었다.
“코어가 멈춘 걸까요?”
“그런 것 같군.”
트랩이 작동하지 않았다. 코볼트를 제외한 다른 마물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던전을 가동하는 코어가 움직임을 멈췄다는 증거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코어를 파괴하지 않았는데도 멈췄다는 건 의도적이라는 이야긴데. 함정인가?”
“글쎄. 몸을 사리는 거겠지. 아니면 포기했거나. 일단 가서 확인해 보자.”
“좋아요.”
루치아가 지팡이로 땅을 툭 쳤다.
번쩍!
순간, 지팡이에 달린 크리스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비로운 천상의 빛이었다. 눈이 부시지 않은데도 사방이 환하게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던전 중심으로 이동했다. 방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은 방심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한참 뒤 두 사람은 가고일 석상이 있던 그 공간으로 진입했다. 가고일의 사체는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루치아가 방의 끝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저곳인가요?”
“맞아.”
하얀 불빛은 꺼지지 않고 여전히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샹들리에가 있던 그 방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루치아는 마기를 느꼈다.
그녀가 책장 앞에 섰다. 손이 책 위를 훑더니, 제목이 없는 갈색 양장본을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책이 아니었다.
딸깍!
스위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책장이 옆으로 슥 열렸다. 나선으로 된 계단이 보였다. 루치아는 꺼낸 책을 홱 던져 버렸다.
“이상하네. 이렇게 허접한 수작을 부리다니. 장식을 보면 고위 마족인 것 같은데…… 뭔가 급조한 티가 나네요.”
“내려가 보면 알겠지.”
얼마나 내려갔을까.
어둠이 끝나고 불길한 푸른빛이 감도는 공간이 나타났다. 또 다른 방이었다. 위층과는 달리 사방이 어두웠다.
준은 루치아의 어깨를 당겨 뒤로 물러나게 했다.
전방에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거대한 수정이 움직임을 멈춘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던전의 코어였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카이엔.”
눈을 감고 있던 사내, 카이엔이 흠칫 놀라 두 눈을 떴다. 그도 준의 얼굴을 확인했다.
“강준?”
사내의 눈에 이윽고 절망이 찾아왔다.
침입자들이 나타났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었다. 내상이 깊어 던전의 기능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던 것.
그들이 다시 물러간 틈을 타 조용히 힘을 모으고 있었는데 신의 대리인이 나타나 버렸다. 그것도 신의 전령과 함께.
“이리도 나의 운명이 가혹하단 말인가? 어째서! 왜?”
카이엔이 처절히 절규했다. 준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하!”
천장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은 카이엔이 눈을 감았다. 광기에 어린 그의 얼굴이 일순 평온해졌다.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카이엔은 죽음을 준비했다.
검을 휘두르면 충분히 목을 벨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하지만 준은 검을 꺼내지 않고 카이엔을 조용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도 부상을 당했나?”
“쓸데없이 말이 길구나. 부디 명예로운 죽음을 허락해다오.”
“전쟁은 끝났어.”
카이엔이 눈을 떴다.
용족의 반격을 저지하다가 차원의 틈으로 튕겨 나간 그였다. 볼카누스와 마찬가지로, 큰 부상을 입고 소식을 기다리던 차였는데.
“전쟁이…… 끝났다고?”
“그래. 케이아스는 완전히 소멸했다.”
“아!”
카이엔이 탄식했다. 승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패전이 전해질 줄이야.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분하군. 분하다!”
“이해한다.”
“뭘 이해한다는 거지? 이긴 것은 너희들이 아닌가? 오, 신의 대리인이여. 내 목숨을 거둘지언정 농락하지는 말아다오!”
“전쟁에 승자는 없는 법이다. 신족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어. 용족의 로드도 너와 같은 처지에 처했었다. 지금 치료를 받고 있지.”
준이 카이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순한 마나가 손을 타고 카이엔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손길이 아닌, 생명의 손길이었다.
“이제 네가 치료받을 차례다.”
“뭐?”
“그리고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난 이제 신의 대리인이 아니야. 일개 인간 치유사일 뿐.”
준이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볼카누스를 레어에서 처음 만났을 때 사용했던 그 방법과 똑같았다.
카이엔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장기가 뒤엉키고 기혈이 뒤틀려 있었다. 이런데도 살아남았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루치아 선생. 좀 도와줘야겠는데?”
“살다 살다 마족 뒤치다꺼리를 할 줄은 몰랐네요.”
“너도 이젠 치유사잖아.”
한숨을 내쉰 루치아가 옆에서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카이엔은 신음을 흘렸다. 고통이 아니라 쾌락에 가까웠다. 회복 불가능한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준이 물었다.
“루치아 선생. 진단은?”
“전치 16주. 이분도 진료소로 모셔야겠네요. 볼카누스 씨보다 오래 걸리겠어요.”
“나와 같은 진단이군.”
두 사람이 동시에 마나를 거두었다. 준은 카이엔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이엔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누아 마을에서 치유사로 일하고 있다. 일주일 뒤에 누아 마을 진료소로 와. 낫게 해 줄 테니까.”
“왜 날 살려 주는 건가?”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준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은퇴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대는 왜…….”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꼭 와라.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리고 미안하지만 저건 철거해야겠어.”
준이 단검을 날렸다.
날아간 단검이 던전 코어에 틀어박혔다. 일반 금속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물건이었는데, 너무나도 쉽게 공격을 허용했다.
쩌저저적!
코어가 급속도로 갈라졌다. 이윽고 유리처럼 깨졌다. 암흑에너지가 거의 소멸했기 때문에 폭발은 없었다.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따로 은신처를 찾는 게 좋을 거야. 곧 조사단이 파견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럼 몸조심하고.”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카이엔을 뒤로한 채, 준과 루치아는 지하 밀실에서 벗어났다. 던전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저 마족, 진료소로 불러도 되는 거예요? 마계에서 제법 명성이 높은 고위 마족이잖아요. 철혈의 대공이었던가?”
“지금은 부상당한 노장일 뿐이야.”
“당신 말이라서 알겠다곤 했는데 좀 걱정이 돼요. 진료소로 온다면 볼카누스 씨랑 만나게 될 테니까. 둘 다 신마전쟁의 선봉장이었잖아요?”
“그렇지.”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누아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그렇게 농담조로 대꾸하긴 했지만 준은 거대한 운명을 느꼈다.
신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냥 들어준 게 아니다. 조건을 걸었다. 지금까지 쌓았던 자신의 업보를 청산하라는.
‘이것도 당신이 준비한 퀘스트입니까? 아니면, 배려입니까?’
던전에서 나온 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별 무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때는 그것을 우러러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그의 별은 하늘에 있지 않았으니까.
바로 옆에 있는 루치아, 그리고 뒤를 따르는 릴리. 숙소에서 쉬고 있을 아그네스와 하룬, 그리고 마리. 바로 그들이 준의 하늘이었고, 또 별이기도 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내 길을 걷겠습니다.’
준이 고개를 내렸다. 저 멀리 환한 불빛을 내는 숙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