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실력을 발휘할 시간 (2)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지르는 여인들도 있었다.
“사, 사람을 찔렀어!”
“그것도 심장을!”
“뭐 하는 사람이야?”
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소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준을 몰랐고, 하나둘 그를 제지하려 했다.
“이분은 사우던 백작가의 대공자를 치료한 강준 선생이오! 환자를 살리고 싶다면 다들 조용히 지켜보고 있으시오! 자기 실력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번 나서 보든가!”
그때 나선 것은 듀폰이었다.
빚을 잊지 않을 거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듀폰은 덩칫값을 했다. 그제야 인파 속에서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혹시나 싶어, 듀폰은 부하들을 시켜 준의 주변으로 경계를 서게 했다. 한편 마르다의 의료진은 혹시 모를 준의 지시에 대비했다.
물론 준은 그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바늘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이야. 조금 더.’
그는 바늘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심막을 뚫고 내강에 이르자 바늘을 멈췄다. 이어 바늘 끝을 막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푸슛!
바늘의 빈 공간을 통해 가느다란 피가 솟구쳤다. 완벽한 천자(穿刺)였다. 그것을 본 마르다의 젊은 치유사가 깜짝 놀랐다.
“설마 심장압전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슴 타박상이 원인이 되었던 것 같은데. 환자를 인계받을 때 부상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까?”
“이럴 수가…….”
분명 하룬은 부상에 대해 설명했다. 그랬기에 젊은 치유사는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압전은 굉장히 위험한 질환이다. 심장을 둘러싼 심막 내부에 피가 고여 심장을 압박하는 병으로, 방치하면 환자는 쇼크에 빠져 사망에 이르게 된다.
바늘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가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확인하며 준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뭐라고 진단을 했습니까?”
“그게…… 호흡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흉부 쪽 출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치유 마법을 전개해서 출혈을 멈추게 하려고 했는데, 하필 심장압전일 줄은…….”
준은 씁쓸히 웃었다. 그가 사용한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환자에게 ‘하필’은 없습니다. 병은 환자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적절한 치료 방법을 찾는 게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
반박 불가능한 정론이었다. 입을 꾹 다문 젊은 치유사는 고개를 떨궜다.
준은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심막 내부에 고인 피를 모두 빼내고 바늘을 수거했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켜 상처를 아물게 했다. 치료가 완벽히 끝났다.
준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과 안색이 점차 좋아지고 있었다.
이번엔 맥을 짚었다.
맥박과 혈압 등 모든 활력 징후가 정상 수준으로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의식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치유사를 주목했다. 환자를 살렸으니 이제 패닉에 빠진 젊은 치유사를 살릴 시간이었다.
“선생님?”
깜짝 놀란 젊은 치유사가 고개를 들었다.
“성함이?”
“알렌…… 알렌 데 하프네스입니다.”
“작위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왕립학술원 수료 직후에 준남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셨다는 이야기인데. 혹시 야전 치료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습니다.”
대부분의 치유사들이 그렇다. 위험한 곳은 꺼려한다.
치유사들은 아카데미나 왕립학술원 과정을 수료하고 바로 대도시의 병원이나 진료소로 부임하는데, 출신이 대단하지 않거나 후견인이 없는 경우는 작은 마을로 부임한다. 아마 알렌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준은 그의 문제를 진단했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직 젊으시니 상단이나 용병단 쪽에 합류해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병원에만 있다면 이런 환자를 접하기 어렵습니다. 부족한 실력은 경험이 보완해줄 수 있죠.”
알렌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준은 환자의 의식이 깨어날 때까지 조금 더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특히 몬스터에게 부상을 입었다면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게 좋습니다. 사용된 무기, 공격 방향, 당시 상황 등을 청취하는 게 좋지요. 이번 일도 신경 써서 청취했다면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끄럽습니다. 하…… 책에서 모두 읽은 것들인데 실전에서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해합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당황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얼마나 야전에 계셨습니까? 내공이 상당하신 것 같군요. 보기에는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보기보다 아주 오래 있었습니다. 전쟁터에도, 용병단에도, 상행에도 동행을 했었지요. 수많은 몬스터와 환자들을 경험했습니다.”
준은 자신 있게 말했고, 알렌은 감탄했다.
그가 이 환자를 치료한 것은 단순히 마나가 고강해서가 아니었다. 빠른 진단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경험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
“아무튼 이번 일로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치유사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시죠.”
준은 지적이 아니라 조언을 하고 있었다. 치유사들은, 특히 마나 유저들은 자존심이 센 편이지만 다행히 알렌은 좋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환자도 구해 주시고 이렇게 좋은 말씀까지 해 주시다니…….”
“좁게 보면 남이지만, 넓게 보면 우린 동료잖습니까?”
“동료요? 아! 그렇군요. 따지고 보면 선생님도 저도 치유사니까요.”
유대감이 생겼다. 그제야 젊은 치유사의 얼굴에 여유가 피어났다.
준은 잠시 마나를 흘려 환자를 살폈다. 이제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준은 나머지 치료를 그에게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준 선생님!”
알렌의 외침에 준이 돌아섰다.
“나중에 누아 진료소로 한번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오늘은 경황이 없었지만 다음엔 꼭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드릴 게 정말 많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지 한 통 주십시오.”
알렌이 미소로 화답했다.
때마침 쓰러져 있던 사내가 의식을 되찾았다.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살아났어요!”
마을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가 던전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왔다. 구조 이후에 환자 하나가 의식을 잃었지만 적절히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이 이상의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역시 강준 선생이야. 대공자의 불치병을 치료했다는 게 헛소문은 아니었어!”
“누아 마을 촌장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선생을 모신 거지?”
“젊은데 대단하군! 어느 아카데미 출신이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오늘의 주인공을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이자 영웅으로 떠오른 준은 백의에 손을 넣고 조용히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약간의 과장이 허락된다면, 준의 명성은 물론 누아 마을 자경단의 위신까지 하늘에 닿는 순간이었다.
* * *
“어디 다녀왔어요?”
루치아는 한숨 자고 일어났는지 하품을 했다. 옷도 허술해 노출이 심했고, 헝클어진 머리가 쇄골에 걸쳐 있어 뇌쇄적인 느낌이 풍겼다.
“그러다 감기 걸린다.”
“뭐 어때요. 세상에서 제일 솜씨 좋은 치유사가 옆에 있는데.”
준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루치아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는지 겉옷을 걸쳤다.
“잠깐 던전에 다녀왔어.”
“어머, 여기에 던전이 열렸어요?”
“올 때 코볼트가 나타났었지? 혹시나 싶어 알아봤는데 마을 북쪽에 던전이 열렸다고 하더군.”
“정말 대단하다. 피곤하지도 않아요?”
“좋은 기회잖아. 하룬하고 마리를 데려가서 수련 좀 시켜줬어. 신마전쟁이 끝난 이후로 던전도 많이 없어졌으니까.”
루치아는 하품을 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가 떠올라 눈을 빛냈다.
“혹시 마족이 만든 던전이었어요?”
“아마도.”
“그런데 그냥 애들 데리고 소풍이나 갔다 왔다고요? 누가 만들었는데요. 마계의 귀족? 아니면 마왕급? 고위 마족들은 거의 소멸했을 텐데.”
“나도 몰라. 코어까지 쫓아가진 않았거든.”
루치아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이 나타났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대악 케이아스의 잔당일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누아 마을과 켈세타 사이에 던전을 만들었다. 뭔가 불미스런 의도가 있지 않고선 그런 우연이 겹칠 리는 없다.
“역시 가서 제거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 프라가라흐 소환 못 하죠? 내가 힘을 보탤게요. 같이 가서…….”
“됐어. 그럴 생각 없다.”
“왜요?”
“전쟁은 끝났으니까.”
준이 미소를 지었다.
전쟁의 승자는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루치아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요. 내가 뭐 힘이 있나. 우리 훌륭한 치유사님의 의견에 따라야지.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요?”
“일단 한번 만나 볼 생각이야.”
“위험하지 않을까요?”
“마계가 거의 박살이 난 상황이야. 아마 볼카누스처럼 다쳤거나 힘을 잃은 상황이겠지. 물론 던전 코어는 부술 거니까 걱정 말고.”
“아무래도 나도 같이 가야겠어요.”
하지만 준은 허락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루치아의 이마를 살짝 눌렀다.
“한숨 더 자. 피곤해 보이는데.”
“가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가게 해 줘요. 이제 신의 전령도 뭣도 아니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준은 손가락을 거뒀다.
루치아는 아공간 창고에서 목제 지팡이를 꺼냈다. 주먹만 한 크리스탈이 박힌 고급스러운 지팡이였다. 거기에 로브까지 걸쳤는데, 이 또한 비상한 아이템인 것 같았다.
“어디 전쟁이라도 가시게?”
“당신이 살던 세계에 그런 말이 있었잖아요. 유비무환이라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마음대로 해.”
하지만 두 사람은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실례합니다.”
사우던 가의 제1기사단장 브로그뉴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준은 검을 쥐고 있었고, 루치아는 외출 차림이었다. 그가 난색을 표했다.
“어디 외출하십니까?”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브로그뉴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숙소 앞에 환자들이 몰려와 준을 찾고 있다고.
“이거 난감하군.”
“혹시 당신이 여기 있다는 소문 듣고 찾아온 거예요?”
“아까 던전 앞에서 좀 일이 있었거든.”
준은 탐사대원을 치료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손뼉을 친 루치아는 얄밉게 웃었다.
“매를 벌었네요. 이제 어쩔 거예요?”
“일단 내려가 보자.”
준은 루치아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준이 나타나자 기사단원들이 군례를 취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구를 막고 있던 기사가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많은데?”
얼마나 모였는지 셀 수가 없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환자도 있었다.
돌아선 준은 여관의 1층을 살폈다.
테이블 다섯 개와 의자 스무 개가 놓여 있다. 넓이를 가늠해 보니 누아 마을의 진료실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계산이 모두 끝났다.
“주인장.”
“예! 나으리.”
“미안한데 이곳을 잠시 진료소로 써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으리 뜻대로 하십시오.”
“브로그뉴 경. 좀 도와주시지요.”
“옙!”
브로그뉴가 지시를 내렸고, 기사단원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한쪽으로 옮겨 대기실을 만들었다. 주인장은 간이 테이블을 꺼내와 준이 쓰도록 했다.
모든 준비는 신속하게 끝났다.
곧 부름을 받은 아그네스와 마리, 하룬이 내려왔다. 거기에 백의를 걸친 루치아까지. 누아 마을 의료진이 모두 모여서 그런지 든든한 느낌이다.
“쉬고 있는데 불러서 미안하구나. 오늘은 특별 진료다. 마르다 주민들을 위해서.”
직원들은 각자 맡은 일에 충실했다. 위급한 순서대로 환자를 분류했고, 준과 루치아가 편하게 진료를 볼 수 있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관 주방에서 탕약을 달이던 아그네스가 달려 나와 준에게 조용히 보고했다.
“약재가 모자라다고?”
“혹시 몰라서 가져온 것들도 거의 다 썼어요. 이대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준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길 그때,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각각 목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눈에 익은 젊은 치유사였다.
“제가 제때 맞춰 온 것 같군요! 환자들이 많다기에 약재가 부족할 것 같았습니다.”
“알렌 선생?”
씨익 웃은 알렌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신선한 약재가 한쪽에 가득 쌓였다.
“도움이 필요할 땐 서로 도와야지요. 우린 동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