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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51화 (51/175)

51화 실력을 발휘할 시간 (1)

― 샤아아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가고일의 눈이 일제히 붉게 빛났다. 준 일행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중급 마물다운 살기.

날개를 퍼덕이며 하나둘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숲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누아 진료소에서 일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러다 바스티엔 공자의 병을 치료해 켈세타로 가게 되었다. 거기에 루치아의 강림까지.

그런데, 백작의 초청을 받아 켈세타로 가는 도중 운이 좋게도 마족의 던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일인가?

만약 볼카누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잘 짜인 각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스터! 뭘 그렇게 생각해요? 놈들이 다가온다구요!」

그제야 준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가고일 세 마리는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근접 공격을 하는 놈들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사정권이다.

준은 검을 꺼내 들었다.

― 샤아아악!

가고일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빠르게 날개를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가고일은 까다로운 마물이었다. 비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칼날이나 회오리 공격을 일으킨다면 치명적이다.

그러나 상대는 전직 절대자.

고작 중급 마물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그것을 알 턱이 없던 가고일 세 마리는 하늘로 올라 회오리 공격을 준비했다. 그 틈에 준은 검기를 일으켜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촥! 촤아악!

날아간 검기가 미처 피할 틈도 주지 않고 가고일을 찢어발겼다.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하룬과 마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그의 검술은 어느 경지까지 오른 걸까?

“선생님은 대체…….”

“감상은 나중에. 앞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어?”

앞쪽에서 하얀 불빛이 보였다. 가고일이 산산이 조각난 뒤에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한 장식과 명화로 꾸며진 벽면. 붉은 벽지 한가운데에 솟은 거대한 샹들리에가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처럼 시뻘건 카펫이었다. 카펫이 입구에서부터 옥좌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좌는 비어 있었다.

“뭔가 생뚱맞네요. 던전 안에 이렇게 화려한 방이 있다니. 흐음. 몬스터들이 모여서 파티라도 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준은 옥좌를 노려보았다.

그 흔한 먼지 한 톨 없었다. 한옆에 놓인 책상과 책장에도 마찬가지.

결정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최근까지 머물렀다는 증거였다. 준은 다시 기감을 끌어올렸고, 책장 뒤쪽으로 빈 공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빙고! 저 통로가 던전 코어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

이곳은 코어가 있는 던전이었다. 코어는 던전의 동력으로, 모든 트랩과 몬스터를 조종하는 매개체다.

상황이 조금 애매해졌다. 흔적을 살펴보건대 이곳의 주인은 코어 쪽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족의 존재는 따라온 두 사람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 실전 경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준이 돌아섰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구나.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으니 다른 곳을 둘러보자. 어딘가에 탐사대의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가시죠.”

그렇게 한참 후, 준 일행은 탐사대를 찾았다. 하룬이 천 조각을 발견했고,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던전 안 코볼트 서식지에 갇혀 있었다. 총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인간! 인간이다!”

예상치 못한 침입자가 나타나자 코볼트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수가 어림잡아도 오십은 넘어 보였다.

먼저 나선 것은 마리였다. 그녀의 눈이 푸르게 변하더니, 양손에 시퍼런 마나가 맺혔다.

이윽고 거대한 낙뢰가 코볼트들이 운집해 있는 중앙에 떨어졌다.

꽈르르릉!

갑작스러운 낙뢰에 코볼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다리에 걸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좋은 기회였다.

하룬은 앞으로 나아가며 겁에 질린 코볼트를 손쉽게 처리했다. 뛰어오는 것은 베어 버리고, 넘어진 것은 발로 걷어찼다.

내부가 거의 정리되었다.

일행은 감옥 앞에 도착했다. 하룬은 걸쇠가 걸린 부분을 걷어찼고, 문을 부쉈다.

“일단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해. 응급처치 키트는 아끼지 말고 써라.”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각기 흩어졌다.

준은 피를 흠뻑 흘리고 있던 중년 사내에게 접근했다. 핏기가 없이 안색이 창백했고, 누가 봐도 중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라이트.”

환한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준은 중년 사내의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온몸에 할퀸 자국이 있었다.

복부에 난 상처가 가장 큰 것 같았는데,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찢어놓았다. 하지만 다행히 내장까지 상하진 않은 것 같았다.

‘운이 좋은 사내야. 이 정도면 금방 치료할 수 있겠어.’

준은 응급처치 키트를 꺼내 상처 부위에 약재를 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마나를 일으켰다.

외상엔 마나 치료가 효과적이고, 응급처치 키트를 함께 사용한다면 치료 효과가 극대화된다.

“으윽!”

바로 반응이 왔다. 중년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당신은…….”

“마을에서 온 구조대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곧 편해질 겁니다.”

“오…… 신이시여……. 정말 고맙소…….”

사내는 눈을 감았다. 곧 편안한 날숨이 흘러나왔다. 응급처치를 끝낸 준은 하룬 쪽을 살폈다. 그는 젊은 청년에게 물통을 건네고 있었다.

“그쪽은 어때?”

“가슴에 타박상을 입은 것 같은데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도 제대로 하시네요.”

“좋아.”

마리도 아그네스에게 배운 대로 응급처치 키트를 사용해 부상자를 야무지게 치료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심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준은 옆에 있는 다른 사내를 살폈다.

응급처치 키트를 아낌없이 사용했고, 고강한 마나로 외상을 깔끔하게 치료했다.

누아 마을 진료소의 의료진들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중년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자력으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마리가 던진 벼락에 겁을 먹었는지 코볼트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은 수월하게 코볼트 서식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근데요, 선생님. 단체로 움직이는 것보다 누군가 나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룬은 손이 모자랐다. 네 명이 자력으로 걸을 수 있대도, 그들을 일단 보호해야 하니까. 거기에 마리는 마법을 아껴야 했고.

타당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던전의 주인이 피신한 이때가 빠져나가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서둘러 빠져나가는 게 좋아. 시간을 끌었다가는 언제 몬스터들에게 포위될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자자! 조금만 더 힘들 냅시다!”

하룬이 부상자들을 독려했고, 일행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의 판단은 정확했다.

던전 밖으로 나올 때까지 몬스터는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트랩도 그랬다. 마치 던전이 정지한 것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바깥은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오오!”

“탐사대다! 탐사대가 돌아왔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던전 입구가 인파로 가득했다.

자경단원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구조대 투입 직전이었는데, 때마침 준 일행과 부상자들이 던전 밖으로 나온 것이다.

당연히 구조대의 선두엔 자경단장 듀폰도 있었다.

그는 탐사대가 나타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들을 구조한 것이 누아의 자경단인 것을 알곤 인상을 찌푸렸다.

“전원 구조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군요.”

듀폰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준이 업고 있던 중년 사내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달려온 치유사에게 환자를 인계했다.

“이쪽, 복부에 상처가 나서 출혈이 있었습니다. 내장은 다치지 않은 것 같고, 약재와 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해 놨습니다.”

“치유사십니까?”

“일단은요.”

젊은 치유사가 중년 사내의 상처를 살폈다. 아직 덜 아물어 있었지만 상처의 깊이를 따졌을 때 이 정도면 출중한 실력이었다.

아니, 출중한 정도가 아니다. 이렇게 완벽한 응급처치는 처음이었다.

“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요! 대체 어떤 약재를 쓴 거지? 잠깐, 혹시 당신은 누아 진료소의…….”

“강준입니다.”

“역시! 명성대로 대단하시군요! 놀랍습니다. 이젠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준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한숨을 돌렸다. 돌아보니 하룬과 마리가 보람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이 웃자 그들도 따라 웃었다.

“누아에 돌아가면 단장님께 칭찬 좀 받겠죠?”

“아무리 칭찬에 인색한 단장님이라고 해도 이번엔 양보를 하셔야 할 거다.”

“하하하하! 역시 그렇죠? 이거 빨리 마을로 돌아가야겠는데!”

하룬이 시원하게 웃는 사이, 준은 마리를 주목했다. 이제 조금 답답한 것이 풀린 얼굴이었다. 준은 말없이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다음엔 더 잘할 거예요.”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나의 공수전환이 완벽했다. 이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기우였나? 슬슬 마법사로 데뷔를 시켜도 되겠어.’

켈세타에 가면 마리를 위해 마법 도구를 좀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브와 지팡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겠어.”

“가서 루치아 선생님께 자랑해도 됩니까?”

“마음대로 해.”

그때,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대한 체구의 듀폰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보기보다 실력이 좋은 모양이군. 셋이서 다섯을 구해 나오다니.”

“이보십쇼. 고맙다고 해도 모자란 상황인데 시비 터는 겁니까?”

하지만 하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꼬장꼬장하던 듀폰이 고개를 꾸벅 숙인 것이다.

“뜻하지 않게 신세를 졌소. 아까의 무례는 용서하시오. 우리는 누아 마을의 요청을 거절했었는데…… 부끄럽군. 당신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를 도왔는데 말이야.”

“이웃인데 돕고 살면 좋지 않습니까?”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소.”

진심이 느껴졌다. 그것을 지켜본 하룬은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감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 환자가 이상합니다!”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듀폰도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그쪽으로 뛰었다.

“뭔가 잘못된 걸까요?”

느낌이 이상했다. 준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르다의 의료진들이 환자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던전에서 하룬이 치료했던 그 젊은 청년이었다.

준은 그 당시 하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슴에 타박상을 입었다고 했었던가?’

동시에 마르다의 치유사가 환자의 맥을 짚었다.

맥이 빠르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흉부의 충격으로 인한 외상으로 판단한 치유사가 마나를 전개했다. 낮은 수준의 마나 유저였다.

미약한 마나가 청년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청년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젊은 치유사는 당황했다.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실례.”

준이 나섰다.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젊은 치유사가 자리를 양보했다. 준은 환자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심장 근육이 미세하게 파열됐었군.’

젊은 치유사가 전개한 마법 덕분에 파열된 부위가 아물긴 했지만, 흘러나온 피가 문제였다. 심낭에 고여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준은 품에서 굵은 바늘을 꺼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가 꺼낸 바늘의 끝이 청년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준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쑤욱!

굵은 바늘이 사내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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