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미궁 탐험 (2)
던전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기에, 준은 마나를 일으켰다.
“라이트.”
머리 위로 주먹만 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동시에 주변이 환해졌다.
시야가 확보되자 일행은 사방을 살폈다. 하룬은 검을 꺼냈고, 마리는 손에 마나를 응집시켜 언제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 흐음. 던전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던전 탐험이 처음이었던 하룬은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냥 동굴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과 굴곡진 벽면이 눈에 보였다. 꽤 넓은 곳이었는데, 준의 생각은 하룬과 좀 달랐다. 인위적인 장치가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다.
딸깍.
준은 마나를 일으켜 벽 쪽에 설치된 위험한 트랩을 제거했다. 그리고 말했다.
“유적의 형태도 있고 미로로 된 던전도 있다. 그리고 여기처럼 동굴의 형태도 있어. 종류는 정말 다양하지.”
“근데 던전은 왜 생기는 겁니까?”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형에 몬스터들이 서식하게 된 경우, 아니면 마족이 암흑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직접 설치한 경우. 크게 본다면 그렇게 두 종류지.”
“마족이 만든 거면 엄청 위험하겠네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은 인간의 고통과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수집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만든 던전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조난당하거나 사망할 확률도 높고.
하지만 지금은 신마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마족이 만든 던전이라고 해도 그 주인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마계 자체가 거의 와해되었으니까.
“만약이지만, 마족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누아 마을 자경단 에이스가 실력을 보여 주면 되겠지?”
“하, 하하하…….”
하룬은 식은땀을 흘렸다.
준은 일부러 안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안전은 자신이 보장하겠지만, 실전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긴장도 필요하다.
준이 걸음을 옮기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바닥과 양쪽 벽면을 조심해. 트랩이 작동될 경우엔 암기들이 쏟아질 수도 있다. 하룬은 몸으로 피하고, 마리는 마나 실드를 써.”
그렇게 설명한 준은 잠시 걷다 트랩을 일부러 밟았다.
푸슈슈슛!
양쪽에서 극독이 발린 암기가 쏟아졌다. 하룬은 재빨리 바닥을 굴렀고, 마리는 마나를 전개해 암기를 퉁겨냈다.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좋은 대처였다.
“잘했다. 던전의 트랩은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 돼.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트랩을 해체하거나 피하는 거지만 말이다.”
“경험을 많이 쌓아야 보이겠네요. 지금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원래 그런 건 맞아 가면서 배우는 거지.”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지 마시라니까요. 오해합니다.”
마리는 트랩이 작동될 때 그 고유의 마나를 인지한 것 같다. 작동하기 전에 무력화시키는 건 어렵겠지만 작동 후 대처하는 건 쉬울 것이다. 그래서 준은 하룬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갈림길입니다. 세 갈래네요.”
널찍한 통로가 세 갈래로 뻗어 있었는데, 앞이 어두워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룬이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피자 흔적이 보였다. 그는 맨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이어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발자국이네요. 탐사대원들이 남긴 흔적 같은데요?”
준도 허리를 굽혀 바닥을 확인했다. 여러 발자국이 엉켜 있었는데, 다소 깊게 파여 있는 걸로 봐서는 무장한 사람들이 지나간 것 같았다.
뭔가 좀 위화감이 드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필요한 건 경험이었으니까.
“한번 가 보자.”
일행이 움직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거대한 공터가 나왔다. 준은 빛의 구체를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앞엔 길이 없었다. 막다른 공간이었다.
“무슨 커다란 방 같은 느낌이네요. 함정 같기도 하고. 이러다가 우리가 들어온 길이 막히기라도 한다면…….”
드드드드! 쿵!
들어왔던 길이 막혔다.
“말이 씨가 되는군요. 젠장!”
동시에 우측에서 괴상한 울음을 내며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났다.
하룬이 검세를 취했고, 준은 빛의 구체를 하나 더 위로 띄웠다.
움직이는 것들은 좌측에도 한가득 있었다. 암흑처럼 까만 늑대들이었다.
그런데 생긴 것이 보통이 아니다.
한 뼘이나 되는 송곳니가 흉하게 튀어나와 있는 놈들이었다. 눈동자까지도 새까매 으스스한 느낌을 풍겼다. 듣도 보도 못한 종이었다.
“크르르르!”
“커커컹!”
하룬은 당황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기도 했고, 수가 너무 많았다.
“놀라지 마라. 놈들은 진짜가 아니야. 환영(幻影)이다.”
“이렇게 진짜 같은 환영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하룬은 검세를 잡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 찰나의 시간에 마수들의 동선을 계산했다. 일단 선두에서 달려드는 두 마리를 일격에 벤다. 그리고 몸을 굴려 피하고, 다시 적당히 거리를 벌린다.
위기에 몰리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빤히 그려졌다.
지금까지 해 왔던 수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바이런의 가르침, 거기에 예전에 받은 얀센의 검이 그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선생님! 마리를 도와주세요. 여긴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리는 한 박자 먼저 캐스팅에 들어갔다. 머리 위로 수십 개의 에너지 볼트가 생성되더니, 달려드는 늑대들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광!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반경 20미터 정도가 완전히 초토화됐다.
마도를 걷는 사람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믿을 수 없다며 소리쳤을 것이다. 에너지 볼트이긴 하지만 멀티 캐스팅을 성공시킨 것.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흩날렸다.
하룬은 깜짝 놀랐다. 준의 말이 맞았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늑대들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준도 나섰다.
“진짜는 이쪽이지.”
그가 정면을 향해 마나를 전개했다. 단단한 실드가 구축됐고.
따다다다당!
소리도 없이 쏘아진 강침이 실드에 부딪쳐 튕겨 나갔다. 환영에 정신이 팔린 대상을 공격하는, 제법 머리를 쓴 트랩이었다.
동시에 하룬에게 달려들던 늑대들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멍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하룬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 농락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 이거 보통 던전 아니죠? 환영은 마법이잖아요. 마법 트랩이 자연적으로 생길 리는 없고. 마법을 부리는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거 아닙니까?”
“그렇지. 타당한 추론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마족이 생성한 던전이라는 것. 아니면 어떤 미치광이 마법사의 비밀 공간이든가.
어느 쪽이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브로그뉴 경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던전은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어. 다시 말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준은 주저앉은 하룬에게 손을 뻗었다.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지.”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강하기 때문에?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녀도 믿고 있는 것이다. 준은 이유 없이 무엇을 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무슨 안배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하룬은 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좋습니다. 좀 더 가 보죠.”
“그래. 잘 생각했다.”
이 선택 하나만으로도 그의 정신은 훌쩍 성장했을 것이다. 목숨을 건 선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일행은 다시 갈림길로 돌아왔다. 처음 있었던 발자국의 흔적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 자체도 함정이었네요. 탐사대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이제 이해가 됩니다. 이 정도 트랩에서 살아날 정도면 탐사대가 아니라 왕실근위대급이지.”
“이제 남은 길은 두 갈래다. 어디로 가 볼까?”
“가운데로요. 남자라면 센터죠.”
일행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 도달한 하룬은 탄식을 흘렸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공터가 나왔던 것이다. 들어온 길이 또다시 막혔고, 좌우 양쪽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아까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광!’
살기 넘치는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스릉!
준이 검을 꺼내 하룬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제야 하룬은 직감했다.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늑대들이 환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을 내라. 왼쪽은 나에게 맡기고.”
콰과과과광!
뒤쪽에서 마법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 스무 마리를 한 방에 정리한 마리는 홱 돌아서 마나를 일으켰다.
화르륵!
준과 하룬의 검에 화염이 감겼다. 어느새 인챈트 마법까지 익힌 모양이었다.
하룬은 불검을 휘두르며 늑대들을 베기 시작했다. 수가 많았지만 준이 합세했고, 원거리 마법 지원까지 받아 손쉽게 처리해 나갔다.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깨갱!”
마지막 남은 늑대를 베어낸 하룬이 숨을 골랐다. 늑대들이 약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실력이 올라온 걸까? 어쨌든 자신감은 충만해졌다.
쿠쿵!
모든 늑대들을 해치우자 막혀 있던 벽에 균열이 생기며 또 다른 출입구가 생겼다.
쿵!
들어왔던 길도 다시 열렸다.
하지만 하룬은 뒤가 아닌 정면을 가리켰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시죠. 돌아가 봐야 똑같은 곳이 나올 것 같습니다.”
“좋아. 가자.”
세 사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나긴 통로가 시작됐다. 가는 도중 트랩이 몇 번 작동되었지만, 하룬과 마리는 잘 넘겼다. 물론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트랩은 준이 나섰다.
통로가 끝나고 또다시 함정이 나타나는 구간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환영이, 때로는 진짜 몬스터가 나타나 일행을 괴롭혔다.
그런 식으로 던전 탐험이 이어졌다. 일행은 중간중간 쉬며 물과 음식을 먹기도 했고, 던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근데 선생님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치유사.”
“아, 진짜 장난하지 마시고요. 트랩 피하는 것도 그렇고 아까 늑대랑 싸울 때도 그렇고 엄청나던데. 혹시 기사였습니까? 이 정도 실력이면 무기도 없이 그 강도들 잡은 것도 이해가 되네요.”
이렇게 가까이서 검술 실력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스승인 바이런보다 한참 위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준이 피식 웃었다.
“얘기하자면 사정이 좀 길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일행은 다시 던전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른 곳과는 달랐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벽면에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석상이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모양의 석상이 총 3개였다.
“저게 대체 뭘까요?”
처음 보는 석상이었다. 거대한 두 개의 뿔이 달린 머리. 그리고 날개엔 흉측한 비늘이 붙어 있었다. 그 석상을 본 준은 확신했다.
이곳은 마족이 만든 던전이 분명하다고.
“가고일 석상이다. 중급 마물이지.”
“마물이요? 몬스터와 마물은 다른 겁니까?”
“다르지. 힘으로 따지면, 아이와 어른 정도의 차이라고 보면 될까. 물론 마물이 훨씬 강하고.”
준은 일부러 설명을 생략했다. 마족의 힘을 직접 이어받은 존재들이 마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겁만 먹을 테니까.
하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른과 아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석상일 뿐이잖아요? 설마 돌인 척하고 앉아 있는 건 아니겠…….”
쿠르릉!
그때 땅이 가볍게 진동했다. 곧이어 그 진동이 석상에 전해졌다.
쩌적! 쩍! 쩍!
“왜 나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질 않는 거야!”
석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깨진 돌의 표면이 땅으로 떨어졌다. 푸확, 껍데기가 벗겨지며 검푸른 날개가 신경질적으로 치솟았다. 이어 반대쪽도 마찬가지.
돌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 던진 가고일 세 마리가 침입자를 향해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