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49화 (49/175)

49화 미궁 탐험 (1)

이른 아침부터 누아 마을 진료소의 직원들이 짐을 마차에 실었다.

짐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편의사항은 백작이 제공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준은 왕진 가방을 챙겼다. 가는 도중 환자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니까.

준비가 철저한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아그네스가 비상용 약초꾸러미를 따로 챙기는 것을 본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치유사로서의 소양이 차츰 완성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뒷짐을 진 채 설렁설렁 다가왔다.

볼카누스였다.

준이 웃으며 반겼다.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이제 마나 치료는 안 받아도 될 텐데.”

“그냥 산책 겸 왔다. 약초도 몇 뿌리 캐고.”

확실히 그의 옆구리엔 약초 가방이 있었다. 보자기에 무작정 욱여넣어 가져오는 것을 본 아그네스가 얼마 전 약초 가방을 그에게 하나 선물했다.

사실 산책은 핑계였고, 어제 만찬의 여운이 볼카누스의 발걸음을 진료소로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레어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재미가 없었다. 진료소엔 얄밉지만 생명의 은인도 있고, 귀여운 아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고 싶으면 타. 내가 특별히 백작 각하께 부탁해 보지.”

“됐다. 누군가는 남아서 진료소를 지켜야지. 걱정 말고 가라. 이상한 놈들 기웃거리지 못하게 내가 잘 지켜 줄 테니까.”

“역시 일족의 로드는 마음 씀씀이가 다르네요. 정말 멋져요.”

루치아가 칭찬하자 볼카누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준을 흘겨보았다. 좀 보고 배워라, 이런 식의 제스처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권능은 웬만하면 쓰지 마. 빨리 집에 가야지.”

“잔소리는! 어서 가라. 마음 바뀌기 전에.”

준은 볼카누스의 어깨를 다독이곤 마차에 올랐다. 직원들이 모두 타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마차였다.

그때, 사우던 가의 제1기사단장 브로그뉴가 다가와 군례를 취했다. 그는 바스티엔 대공자의 오른팔로 사우던 가에서 가장 검술이 출중한 사내였다.

“켈세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혹여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길.”

마차의 문이 닫히고, 브로그뉴는 출발 명령을 내렸다. 사우던 가의 제1기사단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마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 * *

켈세타까지의 여정은 총 사흘로 계획되었다.

말을 타고 꼬박 달리면 이틀로 충분하지만, 속도를 내기가 어려운 면이 있어 하루를 더했다. 중간에 마을 하나를 경유해 바로 켈세타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켈세타행은 순조로웠다.

몬스터나 위험한 야생 동물이 나타나지 않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 무렵 마차는 중간 경유지인 마르다에 근접했다. 그런데 마을 진입 직전, 선두에서 약간의 소란이 발생했다.

“단장님. 코볼트입니다!”

기사단원이 큰 소리로 보고했다. 길가에 코볼트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코가 크고 흉측하게 생겼지만, 전투력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몬스터들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장 브로그뉴의 표정은 진지했다.

“왜 코볼트가 저기서 배회하고 있는 거지?”

보통 코볼트는 깊은 산 속이나 동굴에서 서식한다. 마을까지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호전적인 고블린과는 정반대였다.

코볼트가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코볼트의 출현은 하나의 전조현상이었다. 진짜 몬스터가 출현하기 전 나타나는 이벤트성 몬스터라고 할까.

그러나 이곳은 평지였고, 별다른 위험은 감지되지 않았다. 기사단장 브로그뉴는 손을 들어 명령을 내렸다.

“싹 쓸어버려라.”

기사들이 달려 나가 단칼에 코볼트를 정리했다. 숫자가 많지 않아 정리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브로그뉴는 차창으로 달려와 마차가 멈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친 인원은 없습니까?”

“코볼트 따위에게 다친다면 우리 기사단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지겠지요. 염려 놓으십시오.”

준은 좀 이상하다 싶었다. 코볼트가 마을 가까이 내려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마차가 다시 출발했고, 일행은 마르다 마을에 도착했다. 켈세타의 기사단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인파들이 몰려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차는 광장을 가로질러 숙소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준은 차창 너머로 마을을 살폈다.

‘뭔가 좀 이상하군.’

준은 마을의 풍경보다 마을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끼리끼리 모여 뭔가 쑥덕이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치아가 지나치게 가까이 붙었다. 가슴이 몸에 닿았고,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때마침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방은 총 세 개를 준비했으니 편한 대로 쓰시면 되겠습니다.”

“그러지요.”

방은 딱 두 개만 썼다. 유사시를 대비해 직원들은 모두 같은 방을 쓰게 했다. 하룬의 검술과 마리의 마법력이라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마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직원들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누웠다.

준은 루치아와 같은 방을 썼다.

짐을 정리하자마자 아공간 창고에서 투박한 장검을 하나 꺼냈다. 침대에 요염하게 누워 있던 루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려고요?”

“마을 좀 한번 둘러보려고.”

“나도 같이 갈까요? 마침 지루하던 차였는데.”

“괜찮아. 눈 좀 붙여 둬.”

준은 숙소를 나서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켈세타와 가까운 곳이었는데, 평야와 강이 발달한 곳이었기에 누아 마을보다 규모가 컸다.

하지만 마차에서 본 대로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몇몇은 모여서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준은 청력을 끌어올렸다.

― 탐사대가 돌아오지 않았다지?

― 큰일이야. 역시 그곳에 뭔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 촌장님은 뭘 하고 계신 거야? 오늘 켈세타 기사단이 왔다고 하던데. 부탁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 자경단장이 부탁했는데 그들도 임무가 있어서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고 하던데.

― 흥. 순 겁쟁이들이군!

대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역시 주점만 한 곳이 없다. 준은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겼다. 자신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서 옵쇼!”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제법 있었다. 준은 바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곧 커다란 잔에 맥주가 담겨 나왔다.

준은 살짝 냉기 마법을 걸어 마시기 적당한 온도로 맞추고 맥주를 들이켰다.

“어디서 오셨소?”

“누아에서 왔습니다.”

“누아라면…… 혹시 누아 진료소 분이오? 아까 켈세타 기사들과 함께 왔다고 들었소만.”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누아의 자경단이라 소개했다. 술집 주인은 준이 착용한 장검을 힐끗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거기 선생이 엄청난 분이라고 들었소. 백작가의 은인인 데다 악질 사기단까지 생포했다지요? 그런 분이 왕도로 가서 큰일을 해야 하는데 말이오.”

“세상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라서. 그런데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다들 탐사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요.”

“아, 그거.”

술집 주인은 최근 마을에 생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설명했다.

이틀 전 마을 북부의 지반이 무너지며 지하로 이어지는 동굴이 생겼는데, 그곳에서 코볼트가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주인은 설명하다 목이 막혔는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실력 좋은 탐사대를 파견했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소. 안에 뭔가 위험한 게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걱정이지. 켈세타 성의 기사들도 도와줄 거 같지 않고.”

“동굴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마을 북쪽 출구 쪽이오.”

“그렇군요. 술 잘 마셨습니다.”

준은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마을 근처에 던전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지반이 내려앉았다면 자연스럽게 생긴 건 아닐 터. 던전 안에 분명 뭔가가 있다.’

준의 직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마족이 직접 개입했을 확률도 있고, 마계와 연결되는 게이트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가능성은 적다. 신마전쟁이 끝났고, 절대악 케이아스가 소멸했으니까.

잠들어 있던 아티팩트가 신호를 보냈을 확률, 아니면 신마전쟁에 참전한 마족의 잔당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볼카누스가 뒷산에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문득 마리가 떠올랐다.

최근 진료소의 일을 돕고, 또 마법공학 수업을 받느라 공격 마법을 연마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건 하룬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휘두를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어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 것도 좋겠지?’

준은 숙소로 돌아와 하룬과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마을 북쪽 출입구로 향하며 준이 설명했다.

“이곳에 던전이 생긴 것 같다. 탐사대가 실종된 걸 보니 몬스터들이 서식할 확률이 높아. 한번 가 보자. 실전 경험을 쌓는 데 던전만 한 곳은 없지.”

“역시. 그래서 아까 코볼트들이 돌아다녔던 거군요. 근데 별로 내키진 않네요.”

“왜?”

“예전에 몬스터들이 누아 마을을 괴롭혔을 때 우리 단장님이 여기에 지원 요청을 했었거든요. 근데 여기 자경단장이 단칼에 거절했어요. 이기적인 놈들!”

쌓인 게 많았는지 하룬이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있었다. 준은 하룬에게 강자의 여유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누아 자경단의 아량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실력을 입증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어때?”

“오, 그것도 좋은데요? 단장님 허락도 없이 나서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요.”

“그건 내가 책임지마.”

바이런은 합리적인 사람이다. 위험에 처한 마을에 도움을 주고, 또 갚을 빚을 만드는 거라면 그도 환영할 것이다.

하룬이 투지를 끌어올렸다. 마리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실전에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흥분하게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마을 북쪽에 도달했다. 자경단원들이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어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준이 앞장서서 다가가자 자경단원 하나가 나서서 막았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불편하시더라도 돌아가십시오.”

“누아 마을 자경단에서 왔습니다.”

길을 막은 자경단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아 마을 자경단이 여기엔 왜 온단 말인가?

“아, 혹시 누아 진료소 일행이십니까?”

“맞습니다. 탐사대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있어서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만.”

“누아에서 왔다고?”

그때,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키가 거의 2미터는 달할 것 같은 사내였는데, 손엔 거대한 해머가 들려 있었다.

위압감이 넘치는 사내였다. 하지만 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마르다 마을의 자경단장인 듀폰이라는 사내였다.

“곤경에 처하신 것 같아 도움을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탐사대가 실종된 모양이던데.”

“돌아가시오. 우리 마을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알아서 하겠다는 분이 켈세타 기사단에게 도움을 청하셨습니까?”

준은 고의적으로 상대를 도발했다.

듀폰은 미간을 찌푸렸다. 입 싼 켈세타 놈들이라며 속으로 화를 삭였다. 준이 계속 몰아붙였다.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요. 탐사대의 생존 확률은 그만큼 희박해질 겁니다.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닙니다. 저희에게 한번 맡겨 주시죠.”

준을 무섭게 노려보던 단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평범한 청년 둘과 연약해 보이는 소녀 하나. 대체 이 파티로 뭘 한단 말인가?

탐사대로 파견한 단원들은 모두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소식이 없다는 건 그만큼 위험하단 증거.

듀폰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저승 문턱을 밟게 돼도 우리 탓은 하지 말고.”

“저승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서. 곧 다시 뵙지요.”

준이 눈치를 주자 입구를 지키던 자경단원이 화들짝 물러섰다.

그렇게 준 일행은 미지의 던전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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