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인수인계 (2)
루치아의 실력은 대단했다.
실력이라기보다는 마력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전직 신의 전령답게 마나가 풍부했고, 치유 마법의 단계 또한 상당히 높았다.
루치아가 치유 마법을 속행하며 물었다.
“볼카누스 씨.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죠?”
“어어. 아주 좋……소.”
버릇대로 반말을 하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준은 친구 같은 느낌이었는데, 루치아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적인 느낌. 게다가 그녀가 진짜 현세로 강림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곧 푸르게 빛나던 루치아의 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나를 거두고 상처를 살폈다.
“다 끝났어요. 옷 입으시고 밖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
“고맙소.”
옷을 다시 입고 진료실을 나서려던 볼카누스는 한쪽에서 진료를 보던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환자의 이야기를 세심히 듣고 있었다.
준에게 치료를 받지 못해서일까?
루치아도 그에 못지않은 치유술을 보였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대기실로 나온 볼카누스는 앉아서 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볼카누스 씨.”
잠시 후 아그네스가 다가오자 볼카누스는 아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뭐가 그렇게 많냐?”
“아, 이거요?”
그녀의 손에는 약이 가득 들려 있었다. 평소보다 다섯 배는 많은 분량이었다.
“저희가 당분간 켈세타에 가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처방해 주셨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좀 많아요.”
“엉? 켈세타엔 왜?”
“그게요.”
아그네스는 드뇌르 백작이 연회에 초대해 주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오로지 준의 업적이지만, 볼카누스는 아그네스만 칭찬했다.
“열심히 하거라. 분명 넌 훌륭한 치유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감사해요. 참, 혹시 도중에 몸이 불편하시면 진료소로 오셔요. 볼카누스 씨는 경과 관찰이 필요하니까, 임시로 오시는 선생님께 잘 말씀드려 놓을게요.”
“알았으니까 걱정 마라.”
볼카누스가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준이 진료실에서 잠시 나왔다. 백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대기실을 가로질렀다.
“치료는 어땠어?”
“아주 좋았다. 너의 어설픈 치유술과는 차원이 달랐지. 역시 중급 치유사는 다르더군.”
“그래? 잘됐네. 그럼 앞으로 루치아 선생에게 치료를 받도록 해.”
볼카누스는 뭔가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티를 낼 순 없었다.
준이 물었다.
“저녁에 시간 좀 있나?”
“왜?”
“괜찮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지. 루치아 선생도 왔는데 제대로 인사는 해야 하잖아?”
“으음. 생각해 보마.”
“바쁘면 됐어.”
준이 대답도 안 듣고 바로 들어가자 볼카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좀체 주도권을 가져올 수가 없었다.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자주 본 아그네스는 둘 사이가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와도 웃었다.
“이따 못 오시는 거예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준 선생님 요리 솜씨가 대단하긴 하지만 다 같이 모여서 먹으면 더 맛있을 거예요. 밥 먹는 건 으레 그렇잖아요?”
“허허허.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조금 바쁘긴 하지만 시간을 내보마!”
아그네스가 꼭 와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체면을 세울 기회를 잡은 볼카누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레어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만성 관절염 환자의 치료를 마친 준은 다음 환자가 들어오지 않자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웃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그래?”
방금 보낸 환자가 마지막 환자였던 모양이다. 옆을 보니 루치아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준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2시가 조금 안 된 시각. 기대 이상으로 루치아가 합류한 효과가 큰 것 같았다.
“마리. 고생했다. 좀 쉬고 있도록 해.”
“선생님도 좀 쉬세요.”
고개를 끄덕인 준은 진료실을 나섰다.
콰당!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삐딱하게 앉아 하품을 하던 하룬이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마리의 말대로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으으으! 선생님. 놀랐잖아요? 그렇게 갑자기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다칠 뻔했잖아요.”
“좀 다쳐도 괜찮겠지. 진료소니까.”
“그러게요. 전 마을 주민이니 진료비도 공짜고. 맨날 다쳐서 선생님들이나 괴롭혀야겠다.”
“됐고, 루치아 선생은?”
“선생님이요? 아까 나가시던데요. 아그네스는 잠시 창고에 갔고요.”
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확실히 갑갑하긴 했던 모양이다. 환자가 많기도 했고, 좁은 진료실을 나눠서 쓰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준의 시선이 저 언덕 위에서 멈췄다.
루치아는 언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과 백의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제법 근사했다.
준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찌감치 기척을 느낀 루치아는 몸을 돌렸다. 생생한 눈빛과 사랑스러운 미소가 준을 향했다. 곧 준은 그녀와 마주 섰다.
“첫 진료 소감은 어때?”
“생각보다 위중한 환자가 없어서 심심했지만, 뭐 좋았어요. 이제 퀘스트를 하지 않아도 당신을 볼 수 있으니까요.”
“짓궂은 농담이군.”
“농담 아닌데?”
“필멸자의 삶이 뭔지 궁금해서 왔다며.”
“그것도 이유 중 하나죠.”
루치아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준은 그저 웃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서야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하지만 그것이 천 번의 환생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쌓인 정인지, 아니면 특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준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루치아와 나란히 서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라 풍경이 좋았다.
“그래서. 좀 알 것 같아? 내가 왜 여기에 정착했는지.”
“조금은요.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라면 두 다리 뻗고 편히 쉴 수 있겠어요. 우리가 하던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는 일이지. 이제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거니까.”
루치아는 싱긋 웃었다. 이제는 필멸자의 삶을 살게 된 두 사람이었다. 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예전엔 이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더군. 끝이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특별하게 보여.”
“풍족할 땐 그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만족해요?”
준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 뜻을 읽은 이상 더 이상의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루치아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맞다. 나 월급은 어떻게 챙겨 줄 거예요? 생각해 보니 월급 협상을 안 했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당연히 있죠. 노동의 정당한 대가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아닌가요? 당신이 알아서 챙겨 줘요. 돈 말고 다른 걸로 줘도 되니까 참고하시고.”
그때, 길 저 너머로 대형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료소로 이어진 길은 하나였기에, 그 마차의 목적지는 진료소가 분명했다.
“다른 거라…… 좋아. 한번 고민해 보지.”
준이 앞장섰고, 루치아도 그의 뒤를 따라 진료소로 돌아왔다. 곧 켈세타 병원에서 파견 나온 의료진이 마차에서 하나둘 내렸다.
* * *
이번에 파견된 의료진의 수장은 흰머리가 가득한 초로의 사내였다. 그는 준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필립이오. 귀하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이렇게 만나게 되니 영광이군요.”
“강준입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온 루치아 선생.”
옆에 있던 루치아가 꾸벅 인사했다.
필립은 켈세타 병원의 내과 부장 치유사로 준남작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경력 30년 차의 중급 치유사였는데, 나머지 의료진도 모두 경력이 10년이 넘는 베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치유사 두 명에 치유 보조 네 명이 파견되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지금 몰려들고 있는 환자들을 모두 소화하고도 남을 것이다. 누아 마을 진료소와 인원수는 비슷하지만 경력 차이가 나니까.
다른 치유사와 치유보조원들이 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들의 눈엔 기대와 존경심이 묻어나 있었다.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들이 오갔고, 준은 간단히 대답했다. 대공자의 병세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
질문을 주고받으며 준은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백작이 꽤 신경을 써준 모양이야. 다들 실력들이 출중하군.’
준은 만족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 백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다. 초짜 치유사를 파견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작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왠지 이번 연회가 기대되는데?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적들을 베고 죽이는 인생만을 살았던 강준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좋지만, 상류층의 문화를 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예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타의에 의해 퀘스트를 하는 것과 자의로 참가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한편 루치아와 대화를 나누던 필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잠깐만. 정말 중급 치유사 과정을 수료했단 말이오?”
“아비루나 왕국 왕립학술원에서 수료했어요.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제가 좀 미덥지 못해 보이나요?”
“아니, 그럴 리가.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오. 굉장히 젊어 보이셔서 말이오.”
그럴 만도 했다. 루치아는 서류상 나이가 고작 스물넷에 불과하니까. 평균적으로 중급 치유사 과정을 수료하려면 마흔이 훌쩍 넘는다.
물론 예외가 있는데,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굉장히 뛰어나거나 치유술 및 약초학 전반에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월반할 수 있다.
한편, 아그네스와 하룬, 마리도 켈세타에서 온 의료진들과 통성명을 했다.
하룬과 마리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장래 치유사를 지망하고 있는 아그네스는 달랐다. 무척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
인사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필립이 조용히 물었다.
“이곳에 신기한 의료기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번 볼 수 있겠소? 대공자님의 시술 때 사용되었다고 하던데.”
“스캐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전기 충격기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진료소에 그런 기구가 있는 거요? 듣기로는 우리 켈세타 병원이 보유하고 있는 기구들보다 성능이 좋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시술에 참관한 기사들이 소문을 낸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준은 거기까지 예상을 하고 손을 써둔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기구들이 고장이 나서 수리를 보낸 상황입니다. 다시 돌아오려면 꽤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저런! 꼭 한번 살펴보고 싶었는데.”
필립은 정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창고 한쪽에 숨겨 둔 기구들을 다시 꺼내 와서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기술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기구들은 대형 병원에서도 운용되고 있으니까. 문제는 소재였다. 카이젤 드라케의 성물로 만들어진 기구라는 것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 켈세타로 출발할 계획이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합니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환자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준과 루치아, 아그네스는 켈세타에서 온 의료진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하룬이 쓴 안내문이 진료소 출입문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대공자에게 기적을 선사한 누아의 의료진이 켈세타행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