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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47화 (47/175)

47화 인수인계 (1)

가위바위보 사건 덕분에 아그네스는 한참 동안 하룬에게 놀림을 당해야 했다. 워낙 어이가 없어서 등짝을 때릴 힘도 없었다.

“푸하하하하! 선생님들도 생각이 있으신데 진료실에서 마법을 날리시겠어? 요즘 공부하느라 많이 피곤하구나?”

“…….”

“이해해. 이해한다고. 그래도 지금은 좀 웃어도 되지? 하하하하! 선생님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다 진료소 부서지겠어용~”

세상에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을까. 왠지 업보가 돌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자기도 하룬을 저렇게 놀릴 때가 꽤 있었으니까.

“그래. 마음껏 웃어. 마나를 못 느끼는 내가 바보지…….”

“어라? 이상하네. 지금 화내면서 등짝 때릴 타이밍 아닌가?”

“됐으니까 그만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왠지 본전도 못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놀리긴 했지만, 싫어서 놀린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하룬 오빠 미워.”

마리가 쐐기를 박았다.

그때, 회의를 끝낸 준과 루치아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일들, 가령 볼카누스의 치료 같은 것들을 의논하고 오는 길이다.

어쨌든 루치아도 이곳에 오래 있을 터이니 볼카누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공기가 평소와는 달라서 준이 물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싸웠나?”

“그게 말입니다. 제가 좀 지나치게 놀려서 네아가 화가 났나 봐요. 죄송함다.”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아그네스에게 해야지.”

“미안.”

하룬은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니 아그네스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도 잘 안다. 하룬이 좀 개구쟁이이긴 하지만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이번엔 루치아가 나섰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따지고 보면 장난을 친 우리들 잘못이니까. 조금 놀라게 할 생각이었는데 지나쳤네. 나도 사과할게.”

“아니에요. 제가 눈치가 없었어요. 마리도 장난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미안하다.”

준까지 사과를 하니 되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분은 이미 풀렸다.

사실 가위바위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게 아니었다. 변화점이라고 할까. 아그네스는 준이 차츰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간간이 장난도 치고 농담도 했다. 무채색의 그림이 총천연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그만요! 저 진짜 괜찮아요. 곧 환자분들 오실 거 같은데 어서 조례 시작해요. 네?”

아그네스의 기분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준이 서두를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루치아 선생이 처음 진료를 하는 날이야. 마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들이 최대한 도와야 해. 알았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료 보조의 변경이 있다. 루치아의 보조는 아그네스가, 내 보조는 마리가 맡아. 하룬은 접수를 맡고.”

그때, 아그네스가 손을 들었다. 준이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했다.

“환자 배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지금 등록되어 있는 환자들이 모두 준 선생님 환자들이라서. 새로 오시는 분들을 루치아 선생님 쪽으로 배정하면 될까요?”

“그러는 게 좋겠지.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바꾸지 않는 것으로 하고.”

“네!”

아그네스는 빠짐없이 모든 내용을 적었다. 누아 진료소의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지는 자리였다. 그녀로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볼카누스가 오면 루치아 선생에게 진료를 보게 하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제대로 못 본 면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지. 한번 실력을 보여 줄 필요도 있지 않겠어? 동료들의 신임을 얻으려면.”

루치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도도한 표정으로 자신감을 표했다.

메모를 하던 도중 뭔가 깨달은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루치아가 오해를 하지 않게끔.

“좀 걱정이 되는 게 있는데요. 우리 진료소에 오는 분들은 대부분 준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하셔요. 대공자님을 치료했다는 소문 때문에요. 그런데 루치아 선생님께 배정을 하면 불만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타당한 지적이네. 확실히 가능성 있는 말이에요. 도시 병원에서도 선택진료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제법 있죠.”

루치아가 거들자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하룬이 나섰다.

“그건 저한테 맡겨 주십쇼.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모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새삼 진료소에서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깨달은 하룬이었다.

“저 자경단의 에이스 하룬입니다.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진료소의 에이스는 아니잖아.”

아그네스의 일침에 하룬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준과 루치아는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생각이 없이 나서는 친구는 아니었으니.

준이 이어 말했다.

“곧 켈세타 병원에서 우리를 대신할 의료진이 도착할 거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거지만 인수인계를 철저히 해서 환자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해. 알았지?”

“예. 명심할게요.”

“그럼 각자 자리로 돌아가 준비하자.”

진료 시간이 되자 환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아그네스가 제기한 선택진료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생각보다 환자들이 협조를 잘해 줬다.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양보해서 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겼을 땐 하룬이 유연하게 대처했다. 영리하게도 그는 루치아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이용했다. ‘중급 치유사’와 ‘미모의 여의사’ 이 두 가지를.

‘후후후. 생각보다 수월한데? 오후 진료도 문제없겠어.’

하룬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빨리 실력을 쌓아 멋진 기사가 되어야 하는데 잡일이 많다. 이러다 언제 기사 시험을 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진료대기실을 가득 채운 환자를 보면 그런 걱정은 싹 사라졌다.

오늘도 환자가 만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루치아가 합류했다는 사실. 아그네스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했던 그 명장면을 놓쳐서 아쉬웠지만, 확실히 부담은 줄어들었다.

딸랑―

익숙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볼카누스였다.

“안녕하심까.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네가 왜 여기에 있나? 마리는?”

볼카누스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룬은 입맛을 다셨다.

“제가 있고 싶어서 여기에 있겠습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마리는 진료실에서 준 선생님 보조하고 있어요. 아그네스는 새로 오신 선생님 보조하고 있고.”

“켈세타에서 사람이 온다더니 벌써 진료를? 실력이 좋나? 돌팔이 주제에 꽤 깐깐해서 쉽게 합격을 안 시켜 줬을 거 같은데.”

“면접도 안 보고 바로 통과됐어요. 준 선생님하고 아는 사이셔서.”

“그래?”

“실력도 그렇고 외모도 아주 그냥 작살납니다. 우리 진료소에도 봄이 왔다고요.”

하룬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볼카누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하여간 인간들은 답이 없다니까. 신성한 진료소에서 외모가 어쩌구저쩌구.”

“그런데요 볼카누스 씨.”

“왜?”

“예전부터 인간들은, 인간들은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혹시 인간 아니십니까?”

볼카누스는 움찔했다.

하룬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검술을 제법 익혔다고 하나, 레드 드래곤 로드인 자신의 존엄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니?

“이, 인간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해 본 소리였어요. 하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길래. 하하하.”

“이놈이 어른을 가지고 놀려?”

주변이 조용해졌다.

대기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볼카누스는 모른 척 후드를 뒤집어썼다. 예전 같았으면 브레스로 다 녹여 버리는 건데.

이 진료소에 오기만 하면 소심해지는 그였다.

“볼카누스 씨. 여긴 편찮은 분들이 많으니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 아셨죠?”

“크윽!”

이제 하룬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건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니까. 볼카누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 차례는 언제 오냐?”

“어디 보자…… 앞에 열네 분 계시니까, 좀 기다리셔야겠네요. 그래도 중환은 없으니까 금방 차례 돌아올 겁니다.”

“코딱지만 한 진료소에 환자만 많아가지고는.”

“그래도 새로 오신 선생님 덕에 시간이 두 배나 단축된 겁니다. 감사해야죠.”

한숨을 내쉰 볼카누스가 빈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아그네스가 다음 환자의 차트를 받으러 나왔다. 하룬이 차트를 건네며 물었다.

“루치아 선생님 실력은 어때?”

“세상 참 불공평하다.”

하룬이 휘파람을 불었다.

불공평하다는 딱 한 마디였지만 그 이상의 칭찬은 없을 것이다. 외모도 성격도 좋은데 거기에 실력까지 갖췄다는 말이었으니까.

차트를 훑은 아그네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음 차례는 볼카누스였다. 졸고 있는 그를 발견한 그녀가 반색하며 다가갔다.

“볼카누스 씨?”

“……으음? 오, 아그네스. 많이 바쁜가 보구나.”

“괜찮아요. 많이 기다리셔서 힘드시죠? 이제 진료받으실 건데요. 준 선생님이 오늘은 새로 오신 선생님께 한번 진료를 받아 보라고 하셔서요.”

“새로운 선생에게? 내 상처는 아무나 치료할 수 없을 텐데.”

“괜찮다고 하셨어요. 들어가실까요?”

볼카누스는 이상하다 싶었다. 그 정도로 실력이 좋은 건가? 그래도 준을 믿고 있었기에 일단 아그네스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루치아와 눈이 마주치자 볼카누스는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오.”

“긴장 푸셔도 돼요. 전 옆의 누구처럼 돌팔이가 아니니까. 어디 보자. 볼카누스 씨, 맞으시죠?”

“그렇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았다.

왜 이런 시골 마을에서 치유사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볼카누스는 루치아가 풍기는 아우라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은퇴하긴 했어도 루치아는 기존의 힘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능력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차트를 끝까지 읽은 루치아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치료 내역은 다 확인했어요. 고생 많으셨겠네요. 이제 상처를 좀 확인할까요?”

볼카누스는 상의를 벗었다. 허리와 다리에 난 상처는 거의 아물어 있었다. 살짝 멍이 든 것처럼 보였고, 루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가 아주 잘됐네요. 마나 치료는 오늘까지만 받으셔도 될 거 같아요. 아그네스. 침상으로 모셔.”

“예. 선생님.”

볼카누스는 아그네스의 도움을 받아 얌전히 침상에 누웠다.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은 루치아가 손을 뻗었다.

우웅!

마나가 요동쳤다. 강렬한 마나가 쏟아져 나와 볼카누스의 상처를 감쌌다. 그제야 볼카누스는 깨달았다. 새로 온 치유사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고.

“당신은 대체 누구요?”

“한때 준 선생님과 같이 일했어요. 이제 충분한 대답이 됐나요?”

볼카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준과 함께 일을 했다면 신의 전령일 터. 신마전쟁은 끝났다고 하지만 전령이 나타났다는 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뇨아뇨.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심심해서 내려왔어요. 앞으로 자주 볼 거 같은데 잘 부탁해요.”

심심해서?

볼카누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신의 경지에 이른 한 사내는 마지막 인생을 살러 왔고, 신의 전령은 심심해서 내려왔단다.

‘대체 이놈의 진료소는 어떻게 돌아가는 게야?’

그 의문은 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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