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단판 승부
아그네스는 평소보다 더 일찍,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룸메이트 마리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방에서 나왔다.
차가운 기운이 훅 느껴졌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 들어서고 있는 계절. 해가 떴지만, 환자 대기실엔 새벽이 남기고 간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슬슬 벽난로를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옛날 같았으면 나무 구하는 것 자체도 일이었을 텐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아그네스는 구석에 쌓인 나무 장작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료소 일을 도와주는 마을 주민들도 늘었고, 외지에서도 가끔 도움의 손길이 찾아오곤 했다. 진료비가 굉장히 저렴하고, 준의 실력이 출중했으며 직원 모두가 친절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진료소는 어떻게 될까? 점점 입소문이 퍼지고 환자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아그네스는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열고 공터를 바라보았다. 드뇌르 백작이 약속했으니 새 건물이 이곳에 들어설 것이다. 짜릿했다.
‘진료만 하는 게 아니라 연구도 할 수 있고, 신약도 만들 수 있겠지? 정말 기대된다.’
그때, 식당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일찍 일어났네요?”
루치아였다. 그녀는 백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가롭게 진료소를 둘러보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셨고요?”
“그럼요. 아그네스 양이 신경 써 준 덕에 잘 잤지. 근데 원래 이렇게 부지런해요? 잠 많아 보이는데.”
“제가요?”
“귀엽고 예쁜 사람들은 잠이 많은 편이니까.”
뜻밖의 칭찬에 아그네스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살짝 피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다시 루치아와 마주했다.
“보통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오늘은 좀 더 일찍 일어났어요. 해야 할 일들이 좀 있어서요.”
“어떤 일?”
“아침 식사부터 준비하려고요. 선생님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맛있는 거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마음씨도 곱네. 좋은 제자를 뒀네요. 준 선생님은.”
“제가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 거죠.”
그렇게 대답한 아그네스는 생긋 웃었다. 어제는 조금 기운이 빠진 것 같았는데, 오늘은 꽤 좋아 보인다.
“뭔가 이상하네.”
가까이 다가온 루치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빤히 아그네스의 표정을 살폈다.
“분위기가 좀 달라진 거 같은데? 기합도 들어가 있고. 간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아뇨. 별일은 없었구요. 그냥…… 이제 더 열심히 하려고요. 공부도, 진료도. 선생님도 오시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이에요.”
“오호라. 나한테 지지 않겠다, 뭐 이런 느낌?”
“설마요.”
루치아는 긍정했다. 준이 왜 그녀를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보다 꿈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그런 뚝심이 있는 소녀였다. 감수성이 한창일 나이인데도.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실은 저, 많이 부족해요. 처음엔 약초를 잘 구별하지 못해서 살인자 소리도 들었고요.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어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저도 선생님처럼 멋진 치유사가 되고 싶어요.”
“좋게 봐 줘서 기분은 좋은데, 나 그렇게 멋진 사람 아녜요.”
“아. 어쩌지. 죄송해요. 준 선생님을 말한 거였는데.”
“나 지금 한 방 먹은 건가요?”
루치아는 유쾌하게 받았다.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친언니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루치아가 아그네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마음에 쏙 드네요. 둘이 있을 땐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요. 평소에 여동생을 하나 갖고 싶었거든.”
“예에? 하지만…….”
“내가 귀족이라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는 건 신분이 아니야. 신뢰지. 준 선생님 밑에서 배웠으니, 무슨 얘기인지 알죠?”
준과 무척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방식이나 화법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은근히 담겼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언니.”
“그럼 말 편하게 한다? 그나저나 여기 좀 더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 좀 해 줄래? 창고도 가 보고 싶고, 약재도 어떻게 보관하고 있는지 봐야 할 것 같아.”
“네! 먼저 창고부터 보여 드릴게요.”
아그네스는 루치아와 함께 진료소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자경단원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하나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날씨가 참 좋죠?”
굉장한 미녀 선생이 진료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자경단 내부에 널리 퍼져 있었다.
불침번은 고된 일이라 지원자가 적은데, 유례없게도 진료소의 불침번은 한 달 스케줄이 전부 찼다. 심지어 몇몇 열혈 청년들은 불침번 자리를 매수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루치아 효과’라는 학술명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얼마 전에 강도가 왔었다고 들었는데, 못된 사람들 때문에 여러분들이 고생하네요. 세상이 빨리 평화로워져야 하는데.”
“어유, 고생은요.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걱정 놓으시고 편히 계십쇼! 나쁜 놈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든든한데요?”
루치아가 자경단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경단원들이 착용한 갑옷과 장갑에 마법이 걸렸다. ‘웜쓰(Warmth)’라는 생활 마법 중 하나로, 적당히 온기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기한 경험을 한 자경단원들은 더욱 흥이 났다.
“나중에 한가하시면 저희가 마을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도시처럼 번화하진 않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거든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고마워요. 구경은 나중에.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어 루치아는 창고를 둘러보고 약재 현황을 살폈다. 최근 볼카누스가 맹활약을 해 준 덕에 종류별로 많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루치아의 시선엔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겨울엔 순환기에 문제가 생기는 환자들이 많아질 거야.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위험하지. 여기서 문제. 순환기 쪽 환자들에게 좋은 약초는?”
“은엽수랑 찔레가시가 좋다고 읽었어요.”
“맞아. 은엽수는 막힌 혈관을 뚫는 데 효과가 있고, 찔레가시는 혈압을 안정시켜 주는 좋은 약재지. 부족한 거 보이지? 재고를 더 확보해 놔야 해.”
아그네스는 재빨리 메모를 했다. 창고를 한 바퀴 다 둘러본 루치아는 이번엔 진료실을 살폈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가장 정리가 잘된 곳이었다. 아직 정리와 보수가 필요한 창고와는 달리 즉시 급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그네스는 진료소의 주력 장비인 스캐너와 전기 충격기를 소개했다.
“재미있는 물건을 만들었네. 흐음, 대충 어떻게 쓰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왕도에 있는 병원에도 이런 장비들이 있나요?”
“비슷한 건 있는데 이렇게 정밀하진 않아. 여기 이 검은색 유리판하고 핸들 보이지? 여기에 쓰인 재료는 구하기 정말 힘든 거라서.”
“그 정도예요?”
“응. 만약 다른 병원에서 치유사가 견학 온다면 안 보여 주는 게 좋을 거야. 피곤해질걸?”
루치아는 말을 아꼈다. 정체를 밝히지 말라는 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스캐너의 핸들을 가볍게 조작해 보던 루치아는 작동 방법을 모두 이해했다. 전기 충격기도 마찬가지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 둘러본 루치아는 준이 쓰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담하고 편안한 느낌이야. 좋다. 그런데 난 진료 어디서 하니?”
“일단 이쪽에 커튼을 하나 쳐서 공간을 두 개로 나눌 생각이에요. 책상도 새로 놓을 거고요.”
“새 진료소 건물이 빨리 완성되면 좋겠네.”
“죄송해요. 너무 좁죠?”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부족한 건 차차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 내 보조는?”
거기까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잠시 머뭇거리자 루치아가 제안했다.
“네가 하지 않을래? 내 보조.”
“제가…… 해도 돼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어디서 실력 좋은 수습을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자신을 지명하다니.
“어차피 준 선생님이야 혼자서 알아서 잘하실 거고. 환자와의 유대관계도 그렇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습관이 있는지를 꼼꼼히 파악하는 게 중요해. 그게 치료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거든. 그래서 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치료와 진찰을 잘할 자신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다.
루치아가 말한 조건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럼 제가 할게요. 제가 보조하고, 마리를 준 선생님께 붙일게요. 접수는 하룬이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어제 준 선생님하고 업무를 나눴는데, 나는 주로 외상을 맡을 거야. 피가 튀거나 오물이 묻을 수도 있으니 여분 옷을 넉넉히 준비해 둬. 아, 물론 외상 환자만 본다는 건 아니고. 일단은 나눠서 볼 거야. 진료소의 부담을 줄이는 게 우선이니까.”
“명심할게요. 선생님.”
“언니라니까.”
“아…… 네. 언니.”
아직은 좀 어색한 느낌이었지만, 아그네스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 준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그림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먼저 와 있던 두 여자들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해? 아직 진료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진료소 구경했어요.”
“감상은?”
“뭐, 부족한 게 많이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다행이군.”
“다행이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앞으로 아그네스는 내 보조로 쓸 거예요. 이의 없죠?”
“누구 맘대로?”
뜻밖의 반응이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준이 다가오자 루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공평하게 그걸로 승부하죠.”
“좋지.”
“단판으로. 봐주기 없기에요?”
두 사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그네스가 깜짝 놀랐다.
설마, 결투를?
준의 몸에서 푸른 마나가 스멀스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건 루치아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느낌의 마나가 각자의 몸을 휘감았다.
“서, 선생님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마법은 그만두세요! 이러다 진료소 부서지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괜찮으니 지켜보기나 해.”
“저 때문에 이러시는 건데 어떻게 지켜보기만 해요? 선생님!”
애타게 불러봐도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덜컥 겁이 났다. 마법으로 싸우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때 마나를 느낀 마리가 잠옷을 입은 채로 진료실로 들어왔다.
“언니?”
“위험해. 이쪽으로 와.”
“안 위험한데.”
이미 겁을 먹은 아그네스는 마리를 껴안은 채 한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마리는 눈을 비비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곧 준이 손을 들었다. 이어 루치아도 손을 들었다.
번쩍!
마나가 눈부신 빛으로 변했다.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주변이 잠깐 환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에서 손을 뗀 아그네스는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부서진 건 없는지.
그런데 모든 게 멀쩡했다. 애초에 겁을 먹은 건 아그네스뿐이었다. 이 중 유일하게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준은 가위를, 루치아는 주먹을 내고 있을 뿐.
“자, 내가 이겼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내가 아는 강준이라는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첫판은 연습 게임인 거 몰라?”
“네. 그딴 거 몰라요.”
“못 본 사이에 냉정해졌군.”
“승부의 세계는 원래 냉혹한 법이죠.”
아그네스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두 사람, 가위바위보를 한 거야?
어이없고 황당한 언니의 속도 모르고 마리는 옆에서 가위바위보를 따라 하고 있었다. 마나를 이용하니, 뭔가 느낌이 색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