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재회 (2)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꿈도 아니다. 그녀의 신분은 폴링이 공인해 주었다. 잉그바르 가의 장녀라고.
설마 퀘스트가 발생한 걸까?
루치아는 그런 준의 생각을 읽었는지 검지로 그의 입술을 살짝 막았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오랜만이에요. 참,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잘 지냈냐고 물었는데.”
“보다시피 잘 지냈어.”
“당신이 당황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재미있네요. 어린아이 같다고 할까? 후훗.”
싱긋 웃은 루치아가 몸을 돌렸다. 아그네스와 하룬, 그리고 마리가 어버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반가워요. 오늘부터 진료소에서 근무하게 된 루치아라고 해요. 잉그바르가의 장녀고, 나이는 스물넷. 싱글이에요.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루치아 선생님. 그런데 실례지만…… 면접부터 보셔야 하는 거 아녜요?”
“면접이요?”
루치아가 고개를 돌려 준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미의 기준을 뛰어넘은 미소를 지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죠? 나름 고급 인력인데.”
싱겁게 웃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면접은 끝났다.
루치아가 다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아그네스를 향하자, 어깨를 움찔한 그녀가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아그네스예요. 견습 치유사로 일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
“귀여운 친구네. 남자들한테 인기 많겠어요. 그 옆에 있는 미남은?”
“역시 실력 있는 분이셔서 그런지 안목이 훌륭하시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룬입니다. 이곳에서 총무를 담당하고 있지요.”
“청소겠지.”
“야.”
“호호호. 유쾌해서 좋아요. 둘 사이가 좋은가 봐요?”
아그네스가 은근히 하룬의 허리를 찔렀다. 귀족 앞에서 까불지 말라는 의미였다. 물론 하룬은 그것을 질투라고 받아들였지만.
마지막으로 마리도 꾸벅 인사했다.
“마리예요. 접수를 도와드리고 있어요.”
“마나 유저?”
마리는 깜짝 놀랐다.
최근 마법을 연마하며 마나를 거의 완벽하게 감출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랬고. 그런데 루치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느꼈다.
마리는 당황한 얼굴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금 다룰 줄 알아요.”
“조금이 아닌 거 같은데? 잠깐 실례 좀 할게요?”
루치아가 마리의 손목을 짚었다. 마리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편한 기분이 느껴졌기에. 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어머, 금제가 있네. 마나 양도 장난 아니고. 이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중에 얘기하지.”
“그러죠.”
루치아는 마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마리가 다시 꾸벅 인사하자 루치아도 인사를 받았다.
“나도 잘 부탁해요. 자, 그럼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질문 몇 개만 받아 볼까요? 저에 대해서 뭐 궁금한 거 있는 사람?”
“준 선생님을 알고 계신 거 같은데…… 두 분은 어떤 사이에요?”
아그네스가 소심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가 품고 있던 궁금증이었다. 누가 봐도 루치아는 준과 안면이 있어 보였으니까.
“글쎄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애증의 관계?”
“예?”
“어감이 좀 그런가? 업무상 일을 오래 같이 해 왔거든요. 질긴 인연이죠.”
‘업무상’이라는 표현에 아그네스는 안도했다. 루치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다.
이번엔 하룬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의 이상형은 무엇입니까?”
“이상형이요? 키 크고 강하고 잘생겼지만 무심한 듯 상냥한 남자요. 돈도 많으면 좋겠고. 정원이 딸린 저택 세 채 정도는 있어야겠죠?”
키 크고 강하다는 말까지는 하룬도 웃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표정이 굳어졌다.
상당히 눈이 높다.
하긴, 이 정도로 예쁘면 눈이 높아도 할 말은 없지. 왕도를, 아니 대륙을 뒤진다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리가 물었다.
“선생님은 왜 중급 치유사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례한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달랐다. 금제를 파악하고, 숨긴 마력을 느낄 정도면 중급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까.
“그 질문은 왜 상급 치유사가 되지 않았냐, 이건가요?”
“네.”
“그냥 귀찮아서요. 상급 치유사가 되면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하고. 그렇다고 하급 치유사는 중급한테 무시당하기 일쑤니까 중급이 딱 적당하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루치아가 물었다.
“마법을 배우고 있나요?”
“선생님께 배우고 있어요.”
“좋은 스승님을 뒀네. 부럽네요.”
마리는 고개를 다시 끄덕거렸다. 그때 뜻하지 않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바로 준이었다.
“여기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신의 전령에겐 자유가 없다.
전령이기에 신이 허락한 장소에만 갈 수 있다. 즉,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건 신이 새로운 퀘스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빙긋 웃은 루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이건 제 선택이에요. 제 마음이기도 하고.”
“너는…….”
천사잖아, 라는 질문이 생략되었다.
하지만 루치아는 그 질문을 이해하곤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아니에요.”
* * *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대기실 정리를 하던 아그네스가 빗자루질을 멈추고 진료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준과 루치아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신경이 쓰여 그쪽으로 시선을 둘 뿐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두 분 뽀뽀라도 함?”
의자를 정리하던 하룬이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진료실 안을 바라보던 하룬의 눈빛에 의혹이 스쳤다. 그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단 말이지. 마치 오래도록 떨어져 있던 연인이 다시 만난 것 같다고 할까. 선생님의 숨겨 둔 애인이 아닐까?”
“업무상 일을 같이 해 왔다고 하셨잖아.”
“남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아그네스는 대꾸하지 못했다. 어떤 사이냐고 물었을 때 업무상 일을 오래 했다곤 하지만, 연인이 아니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하룬이 아그네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너무 강력한 적이 나타나서 그런가.”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그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눈치 없는 하룬은 옆에서 낄낄대고만 있고. 감정만 소모된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분이 계속 이상했다.
이성의 문제를 떠나 한순간에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준이 이 마을에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반면 진료실에 있는 두 사람은 오래도록 알고 지냈다. 세월의 흔적만큼 진한 것이 있을까.
‘아니, 오히려 이건 좋은 기회야. 루치아 선생님께도 잘 배워서 실력을 쌓아야 해.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아그네스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개했다.
준도 훌륭한 치유사였지만, 루치아는 왕국에서 공인한 중급 치유사였다.
왕립학술원이나 치유사 아카데미 등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치유술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으로 늘기도 했고.
아그네스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하게.
“뭐야? 갑자기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헐. 설마 루치아 선생님하고 싸우기로 작정한 거?”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아그네스는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입을 씰룩인 하룬은 창고로 나갔다.
한편 진료실 안에선 그 두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마나를 일으켜 문을 닫은 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천족의 권능을 포기했다고?”
“그래야 당신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
“얼마 전 당신이 윤회의 사슬을 끊겠다고 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가죠?”
장난스럽게 웃은 루치아가 찻잔을 입에 댔다. 인간의 차도 마실 만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천사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윤회의 사슬을 끊을 때를 생각하니 루치아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녀도 불멸의 삶이 필요 없었던 걸까?
“필멸자의 삶이란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위대한 절대자 강준. 그가 반신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가지려고 했던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걸 좀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것뿐이야?”
“그것뿐일까요?”
루치아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타났을 때 혼란스러웠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가끔이긴 해도 그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했었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 선택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준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다.
그때,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루치아 님.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어머, 릴리. 잘 지냈어? 어쩌니. 마스터 잘못 만나서 페어리 퀸도 못 되고. 괜찮아?”
「어쩌겠어요. 제 팔자를 탓해야지. 역시 제 맘을 알아주시는 건 루치아 님뿐이에요!」
“미안해. 내가 좋은 마스터를 구해 줬어야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준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잉그바르가는 또 뭐야?”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가문이에요. 혼돈의 바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대륙에서 왔다는 설정인데, 폴링 그 사람이 확인할 방법은 없겠죠.”
“중급 치유사 자격은?”
“저도 소원 하나 빌고 내려왔어요. 신께서 도와주셨죠. 강림 전에 아카식 레코드를 가동해서 정보를 추가했어요.”
아카식 레코드는 천족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장치였다. 우주의 모든 것이 빠짐없이 기록되는 것으로, 원하는 정보는 모두 얻을 수 있다. 역으로 원하는 것을 기록하면 그 기록이 사실이 되기도 한다.
“주도면밀하군.”
“그 정도도 못 하면 전령 노릇은 못 하죠.”
“치유술은?”
“치유술이라고 해서 뭐 별거 있나요? 그냥 짠하고 치료하면 되는 거지.”
전령의 지위를 포기해 필멸자가 됐지만, 자신의 경우처럼 능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품은 마나가 느껴졌다.
“알았어. 아무튼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을 해야 하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준은 누아 마을의 내력에 대해 설명했다.
누가 촌장이고, 누가 마을을 지키며, 사람들의 성향은 어떻고 특산품은 무엇인지. 거기에 어떤 환자가 와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까지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달이 떠오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루치아는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꽤 재미있게 살고 있었네요. 어때요?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아직 모르지. 가야 할 길이 더 남았으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기대되네요. 켈세타 성이라고 했나요? 거기 연회 갈 때 나도 따라갈게요.”
“마음대로.”
“참, 그런데 호칭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대리인과 전령의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둘 다 평범한 인간이 됐다. 관계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짓궂게 물었다.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건 안 돼.”
“왜요.”
“그냥 이름을 불러. 준이라고.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서 그러면 곤란하지.”
“재미없게 그게 뭐예요.”
그때 노크가 들렸다. 하룬이 진료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저 퇴근합니다. 내일 봬요. 불침번은 툴리앙 형님이랑 알렉스가 보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그런데 루치아 선생님도 여기에서 주무십니까?”
“그럴 생각이에요.”
그제야 준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느꼈다. 그는 아그네스와 마리를 불러 루치아가 지낼 만한 방을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마침 빈방이 하나 있어 정리는 금방 끝났다.
준은 루치아를 데리고 그녀가 쓸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놓인, 단출한 방이었다. 그래도 루치아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근데 굳이 따로 방을 쓸 필요 있어요? 당신하고 같은 방 써도 되는데.”
“정중히 사양하지.”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에요?”
피식 웃은 준이 방을 나섰다. 그때, 루치아가 준을 불렀다. 그녀는 문에 몸을 반쯤 걸친 채 손을 흔들며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을 텐데 반갑게 맞아 줘서 고마워요.”
“푹 쉬어. 네 집처럼.”
“당신도요.”
루치아가 살짝 윙크했다. 왠지 오늘 밤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