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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44화 (44/175)

44화 재회 (1)

그들은 켈세타의 영주, 즉 드뇌르 백작이 직접 수배령을 내린 악질 사기꾼들이었다. 입은 피해만 자그마치 50골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준은 탄성을 내뱉었다.

“50골드나 사기를 쳤다면 어딘가에 돈이 더 남아 있었을 텐데. 역시 진료비를 더 받을 걸 그랬어. 아쉽군.”

“저기…… 선생님?”

“왜?”

“전에 저희들한테 보너스 주실 때 말이에요. 5실버는 잔돈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랬던가?

갑자기 돈에 집착을 보이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던 모양이다. 아그네스의 말에 준은 싱겁게 웃었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나쁘게 모은 돈이니 우리가 회수해서 착하게 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료 보조금으로 써도 좋고, 약초를 사서 약을 만들어도 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때 그 사람들 돈 다 털어도 2골드도 안 나왔으니까.”

“어딘가에 분명 숨겨 뒀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돈을 숨겨 둔 장소를 먼저 물어봐야겠어.”

“그것보다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런가?”

아그네스는 그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겉으로 보기에 베리타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흉계를 꾸미고 있을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무서운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사기꾼들은 으레 그렇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거든. 네 탓이 아니니 신경 쓸 거 없다. 누가 그 상황에 놓였든 속았을 거야.”

“그래도 선생님은 안 속으셨잖아요.”

“알잖아. 나 운 좋은 사람인 거.”

준의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최근 외부에서도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일이 더 좋게 풀렸다.

드뇌르 백작이 이번 일에 얽혀 있었다. 정확히는 백작이 그 사기꾼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사우던 가의 먼 친척에게 사기를 쳐 큰돈을 빼앗았고, 드뇌르 백작이 현상금을 5골드나 걸어 직접 수배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골칫덩이를 준이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생포를 했으니 가장 좋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대공자 치료해서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악질 현상범까지 잡았다는 소문이 난다면 꽤 피곤하겠어요. 마스터. 어떡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히 살기는 틀린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있나.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지. 그리고 조금 유명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냥. 요즘 마스터 바쁜 거 보니까 좀 안쓰러워서요.」

‘고맙구나. 내 걱정을 다 해주고.’

「어휴, 징그러우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확실히 릴리가 걱정할 만했다.

현상금 사냥꾼도 아닌 시골 마을의 치유사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문이 돌면 다들 크게 놀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준의 이름 두 글자가 한창 퍼지고 있는 상황이니.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그 사람들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작가를 건드린 자들이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거다.”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을까요? 저라면 백작가 사람들을 건들지도 못했을 거 같은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에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가 모두 끝나고 비품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느려진 손을 조금 부지런히 놀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아그네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마이더스 상단 소속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다들 궁금해하던걸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큰 상단의 이름을 대고, 정교하게 위조된 신분패를 내민다면 누구나 속을 수밖에 없으니까.

“마이더스 상단에 아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우연히 상단의 징표를 본 적이 있었지. 그런데 놈들이 내민 징표는 좀 달랐어. 행동도 수상했고.”

“선생님은 정말 못 하는 게 없으셔요. 인맥도 넓으시고.”

아그네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치유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를 다루고 눈썰미까지 좋아야 하나?

그래도 준은 그들이 안티 마나 파우더까지 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결과는 좋았다. 강도들이 설쳐 준 덕분에 진료소의 치안이 강화되었다.

자경단장 바이런은 자경단원 셋을 진료소에 파견했다. 준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은 괜찮지만 직원들은 보복이 있을까 두려워할 수도 있으니.

“저 차트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일 있으시면 부르세요. 저녁은 좀 이따가 준비할게요.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딱히. 근데 하룬은?”

“2층에서 마리랑 청소하고 있어요.”

준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건이 있었던 탓인지 오늘 하루가 굉장히 길었다. 평소보다 일찍 자야 할 것 같다.

그때, 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앗. 면접 보러 오신 분인가?”

아닐 확률도 있지만, 아그네스는 그만큼 기대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인데도 중급 치유사 과정을 수료했고 준귀족 신분이었다. 과연 어떤 여자일지 궁금했다.

아그네스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런데 진료소를 찾은 사람은 면접 지원자가 아니었다. 우선 성별이 달랐다. 뒤에 부하들을 둔 어떤 풍채 좋은 사내였다.

진료소를 지키던 자경단원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악당들의 복수를 하러 온 자들일 수도 있으니.

아그네스가 겁을 먹자 풍채 좋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먼저 인사를 꺼냈다.

“안녕하시오?”

“예.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죄송하지만 시간이 늦어서 급환을 제외하고는 진료를 하지 않아요.”

“걱정 마시오. 진료를 받으러 온 건 아니니까. 강준 선생께 대신 인사를 전하러 왔소. 마이더스 상단에서 왔다고 전해 주시겠소?”

“마이더스 상단에서요?”

마이더스 상단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이 오늘만 두 번째다. 진짜가 맞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시오?”

“아, 아뇨.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때, 준이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사내들을 슥 살폈다. 병풍처럼 서 있는 호위가 있었지만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준이 물었다.

“마이더스 상단에서 오셨다고요?”

“예. 강준 선생님이십니까?”

“맞습니다.”

환하게 웃은 사내가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일단 준은 악수를 받았다.

“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플랭크. 이번 누아 상행을 책임진 사람입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에 이렇게 뵙기를 청했지요.”

플랭크가 부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부하가 들고 있던 보자기를 준에게 건넸다.

큰 상자였는데 생각보다 무게는 가벼웠다.

“약소하지만 선물로 귀한 약초를 몇 개 넣었습니다. 전부터 우리 상단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가 있어서 골치였는데 선생께서 해결해 주셨다지요?”

“그래서 오셨군요. 해결까진 아니고, 그냥 운이 좀 좋았습니다.”

“상단을 대신해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누아에 짐을 풀자마자 켈세타 지부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본단에서도 아마 크게 사례할 겁니다. 우리 상인들은 빚지고는 못 살지요.”

“잘됐네요. 선생님.”

그제야 아그네스는 안심하고 미소를 보였다.

마이더스 상단은 대륙 3대 상단 중 하나다. 크게 사례한다면 기대해 볼 법도 했다. 그렇다고 준의 아공간 창고와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 이후로도 플랭크는 준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악당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무척 악질적인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약품 계약 관련으로 접근을 했다던데, 맞습니까?”

“계약을 빌미로 조제법을 강탈하려는 수작이었지요.”

“제법 그럴싸한 방법으로 접근을 해 왔군요. 피해가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혹시 다른 상단에서 연락을 받으신 게 있습니까? 약품 계약 관련해서요.”

“아직은 없습니다.”

그 대답에 플랭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단순히 악당들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플랭크가 눈빛을 빛냈다.

“사실 제가 누아에 상단을 끌고 온 건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와도 괜찮을지요?”

“얼마든지요. 혹시 상단에 편찮은 분들이 계시면 함께 오십시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아그네스는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은 조급함이 없었고, 예의라고 해야 할까, 어떤 격식이 있었다.

용건이 모두 끝나자 플랭크가 정중히 인사했다.

“바쁘신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선생님께서도 언제 시간 되시면 시장으로 오십시오. 좋은 물건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진료소 직원분들에 한해서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모시지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내였다. 준은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 가장 기뻐한 것은 아그네스였지만.

플랭크를 선두로 상인들이 물러갔다. 자경단원들은 다시 밖으로 나갔고, 아그네스는 차트를 잠시 내려놓고 준에게 다가왔다.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아요. 백작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거 같은데 마이더스 상단에서 사람도 찾아오고. 켈세타에 가면 할 게 많겠어요. 상단 지부에도 한번 들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초대를 해 준다면 한번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때, 하룬이 끼어들었다.

“아무튼,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무기도 없이 놈들을 제압한 겁니까?”

“말했잖아. 바보같이 합공하다가 서로를 찔렀다고.”

팔짱을 낀 하룬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바로 그때였다.

진료소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어떤 젊은 여자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헉.”

하룬은 가슴을 쥐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엄청난 미인이었다.

적당히 부푼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새하얀 피부가 그녀의 고귀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은은한 레몬빛 생머리를 흩날리며 여자는 진료소 안을 살폈다.

“어머, 이렇게 허름한 곳일 줄은 몰랐네.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네요?”

심지어 목소리까지 아름다웠다.

도저히 흠을 찾을 수 없는 여자였다. 같은 여자인 아그네스와 마리가 봐도 마찬가지.

“혹시 면접 보러 오셨나요?”

“맞아요. 사우던 가문 소개로 왔는데…….”

그녀의 커다란 눈이 아그네스를 지나쳐 준에게 향했다.

“뭘 그렇게 놀라실까?”

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그녀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으로 준의 얼굴을 쓸어 만졌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얼굴이 활짝 폈네요. 다행이네. 헤어질 때 좀 걱정했었는데. 어때요. 잘 지냈어요?”

준이 알기로 그녀는 이름 모를 준남작가의 장녀 따위가 아니었다.

신의 전령, 루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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