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Manners maketh man
‘루치아 폰 잉그바르?’
신상명세에 따르면 잉그바르 준남작가의 장녀로, 올해 스물넷. 아비루나 왕립학술원의 중급 치유사 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준이 놀란 것은 이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이름 때문이었다.
「에이, 우연의 일치겠죠. 루치아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요? 아비루나 왕국에만 뻥 안치고 한 천 명은 있겠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왜 그래요?」
‘글쎄. 그냥 뭔가 좀 마음에 걸려서.’
기분이 묘했다. 이름을 보는 순간 자신의 직감이 반응했다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얘기인데.
곧 준은 신경을 껐다. 릴리의 말이 맞다. 우연의 일치일 뿐, 괜히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켈세타 성에서 온 전령입니까? 그쪽 문양인 것 같던데요.”
“그래.”
하룬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진료소의 경비도 맡고 있으니 신경이 쓰일 만했다. 준은 편지와 신상명세서를 서랍에 넣었다.
“조만간 치유사 후보자가 면접을 보러 이쪽으로 온다고 하는구나. 손님이 오면 잘 모셔라.”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돼요?”
이번엔 아그네스가 물었다. 마리도 궁금했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럴 만했다. 치유사는 귀한 편이었고, 때로는 준귀족 대우를 받는다.
“폴링 씨가 보낸 서류에 따르면 잉그바르 준남작가의 장녀라고 하는구나. 중급 치유사 과정을 수료했고.”
준남작가라는 말에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준귀족이라고 해도 평민과는 거리가 있다.
“중급 치유사요? 게다가 준남작가? 뭔가 일이 잘못된 게 아닙니까? 귀하게 자라셨을 텐데 이런 시골에 오다니.”
“선생님의 치유술을 배우려고 오시는 게 아닐까?”
아그네스가 합리적으로 접근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준귀족이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하룬은 꼭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쁘대요?”
짝!
결국 하룬은 또다시 등짝을 내주고 말았다. 아그네스가 마나 유저가 아닌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건 와 보면 알겠지. 다들 잠깐 들어와 봐. 할 이야기가 있다.”
세 명이 앞에 나란히 섰다. 준이 주먹을 모으고 헛기침을 했다.
“다음 달에 켈세타 성에서 연회가 열린다. 바스티엔 공자의 완치 기념 연회라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도 초청을 받았다.”
“우리 전부가요?”
“그래.”
“진료소를 비우면 마을 분들이 불편해하시지 않을까요? 위중한 환자가 생기기라도 하면…….”
“나도 그래서 거절을 했는데 켈세타 병원에서 의료진을 보낸다고 하는구나.”
단호하던 아그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도시 구경을 하고 싶어 했다. 켈세타 병원의 의료진이라면 믿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건 하룬도,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하룬이 은근히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참가하는 게 좋겠지. 명분 없는 거절은 예의에 어긋나니까. 겸사겸사 바스티엔 공자님의 상태도 확인해 보고.”
“쩝. 어쩔 수 없군요. 바쁘지만 백작께서 그렇게 부탁을 하신다면야 가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룬은 금방이라도 입이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아그네스도,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좋은데 억지로 참는 느낌.
“좋아해도 돼. 나쁜 일도 아닌데 뭐.”
“이얏호!”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이 만세를 불렀다.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도 아니다. 준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준비는?”
“다 끝났어요. 와서 드시면 돼요.”
준은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점심을 먹었다. 평범한 빵과 수프였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휴식을 취했다.
대부분의 주제는 켈세타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백작이 여는 파티에 대해서.
준은 성에서 마차를 보낸다고 전했고, 두 소꿉친구는 켈세타에 가서 무엇을 할지 정했다. 얼마 전 준에게 큰돈을 받은 터라 거침이 없었다.
“아, 맞다. 선생님. 아까 파토스 아저씨가 다녀가셨는데요.”
파토스는 누아 마을의 대장장이다. 의료용 칼날을 선물해 줬던 바로 그 장인이었다. 아그네스는 아까 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감기약 반응이 정말 좋대요. 아저씨가 그러던데, 옆 마을에 계신 친구분들도 약을 구해 달라고 난리래요.”
“호프만 아저씨도 그러더라고. 열 개쯤 빼돌려 달라고 하시던데?”
모두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하룬에게 몰렸다. 하룬은 두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준이 나섰다.
“다른 건 몰라도 감기는 예방이 어려우니까 수요가 많을 수밖에. 위장 질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음식을 먹으니 문제가 자주 생기지. 조만간 그쪽 상비약도 만들 계획이야.”
“위장약까지요?”
“캬! 우리 이러다가 부자 되는 거 아닙니까?”
하룬이 입맛을 다셨다. 공짜로 약을 받아 가는 마을 주민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약에 일정 가격을 매긴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외지인들에게만 약값을 받고 있고, 약값이 거의 원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가격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올린다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야. 아직 대량 생산은 위험해. 알지? 약이 효과가 없거나 이상 반응이 있으면 진료소로 꼭 오라고 해야 한다. 특히 감기는 대부분의 병의 초기 증상이라 가볍게 보면 안 돼.”
“에휴,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군요.”
“그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면 누구나 다 부자가 됐겠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하룬의 말도 어느 정도 고려는 하고 있었다.
지금 양산을 하지 않는 이유는 시설이 충분치 않다는 것도 있으나, 약물의 전반적인 데이터가 충분히 모이지 않아서였다.
무엇보다도 환자가 줄어가고 있는데 더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과로로 쓰러지고 싶지 않다면.
그때였다.
“계시오?”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점심시간인데 환자가 온 모양이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아그네스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수염을 길게 기른 배불뚝이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진료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수행으로 보이는 키 큰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기다란 검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아그네스는 침착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아아. 딱히 불편한 데는 없는데. 강준 선생을 만나러 왔소만?”
치유사 면접을 보러 온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면접 대상자는 여자였으니까.
“지금 점심시간이라 식사 중이신데 잠시 이쪽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진료 시간에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하여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 온 거요. 우린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유쾌한 사내였다. 좋은 인상을 풍겼다. 후덕하다고 할까. 아그네스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준에게 손님이 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상단에서 오신 분들 같아요.”
“상단에서?”
“예전에 시장에서 비슷한 복장을 한 분들을 본 적 있었거든요. 기억 안 나세요? 저 머리핀 사 주셨을 때.”
턱을 한 번 쓸어 만진 준이 밖으로 나갔다.
진료소에서 백의를 입는 건 치유사뿐이다. 준이 나오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어났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마이더스 상단의 베리타라고 합니다.”
“강준입니다.”
마이더스 상단이라면 준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켈세타를 넘어 왕도에서 세를 떨치고 있는 유명한 상단이었다. 대륙 3대 상단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베리타가 상인다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고, 준은 악수를 받았다.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미남이시군요! 요즘 여기 진료소에 환자가 넘쳐난다고 하던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아주 바쁘시겠어요.”
“환자가 넘치는 게 좋은 건 아니지요.”
“아, 이거 실례.”
쓸데없는 금칠은 취향이 아니었다. 어차피 상인이면 진심이 담기진 않았을 터다. 순익을 따지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니까.
준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진료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군요.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안으로 잠시 들어가시지요? 긴히 드릴 말씀이라.”
준은 베리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베리타가 의자에 앉자 수행 사내들이 병풍처럼 섰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치 위압하는 것 같은 구도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의 안목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얘네들 뭔가 질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요?」
‘확인해 봐.’
릴리가 모습을 감춘 채로 병풍처럼 선 사내들의 무장을 살폈다. 옷 안쪽과 허벅지 쪽에 온갖 암기들을 장착하고 있었다.
「독까지 소지하고 있어요. 헐? 안티 마나 파우더도 있네요. 이 새끼들 작정하고 왔네!」
안티 마나 파우더는 일시적으로 마나를 전개하지 못하게 하는 약품이었다. 마력이 강하면 소용이 없지만, 어중간한 마법사들에게는 효과가 좋다.
이 사람들이 왜 왔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간만에 좋은 구경 좀 하겠네. 팝콘 좀 튀겨야겠다.」
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이유를 알지 못한 베리타도 따라 웃었다.
“요즘 선생께서 만든 감기약이 아주 인기가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환절기니까요.”
준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지도,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한 느낌.
이런 류의 사람들이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리타는 오히려 눈을 빛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선생이 개발한 감기약을 우리 상단에서 좀 유통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적은 양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유통을 논할 단계는 아닙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우리 상단에서 투자하기로 했는데, 어떠시오?”
준이 빙긋 웃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라 베리타는 살짝 당황했다.
“조금 이상하군요.”
“무엇이?”
“감기약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다른 병원에서도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을 상품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이더스 상단 정도라면 알고 있는 바 아닙니까?”
“바스티엔 공자를 완치시킨 주인공의 약이라면 충분히 상품성이 있지요.”
“그렇군요. 그 전에 하나만 확인합시다. 마이더스 상단의 징표를 보여 주시지요.”
“징표를?”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베리타는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 상단 관계자들에게 지급되는 신분패를 보였다.
“알아보실 수는 있겠습니까? 이렇게 궁벽한 곳에 계신다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를 수도 있는데. 하하하.”
준은 신경을 끄고 신분패를 확인했다.
안력을 돋우니 진품과 다른 부분이 보였다. 꽤 신경을 썼지만, 자신의 안목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짜군요.”
“뭣!”
오히려 격하게 반응한 것은 병풍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리타가 나서서 말렸다.
“무례하군요! 감히 마이더스 상단을 욕보이려고 하는 것이오? 가짜라니!”
“가짜를 가짜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합니까?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얄팍한 수로는 은화 한 닢도 가져가지 못할 겁니다.”
여유 있는 한마디에 베리타는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그는 그 직감을 따라 바로 진료소를 뛰쳐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실수를 했다. 준이 모든 걸 눈치챘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어차피 필요한 건 계약서가 아니라 조제법이었다.
처음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조제법만 빼돌릴 생각이었다. 그들은 외진 곳을 찾아다니며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악질 중의 악질들이었다.
촌구석 치유사의 객기 정도는 힘으로 눌러 주면 그만. 그렇게 생각한 베리타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감돌았다.
“드디어 본성이 나오셨군요.”
“후회하게 될 거다.”
베리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악!
하얀 가루가 사방으로 퍼졌다. 안티 마나 파우더를 뿌린 것이다. 호흡을 멈추고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만 준은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스릉!
병풍 사내들이 검을 뽑았다. 큰 소리로 웃은 베리타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넌 이제 마나를 쓸 수 없다. 아주 비싼 돈을 들여서 산 약이거든. 그러니 좋은 말할 때 조제법을 내놔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리타는 그가 조제법이 적힌 종이를 가지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준은 진료실 문 앞에 섰다.
“도망갈 생각 마! 여기서 일하는 놈들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면!”
“흐음, 질 나쁜 협박까지.”
준이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
철컥!
오히려 문을 잠갔다.
“내가 살던 곳에 이런 격언이 있었지. 아주 유명한 말인데. 잘 들어. 매너는.”
철컥.
“사람을 만든다.”
문을 모두 잠근 준이 돌아섰다.
베리타는 어이가 없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재촉하지 마라. 지금 내가 알려 줄 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