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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41화 (41/175)

41화 가정용 상비약 (2)

오늘도 날씨가 화창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던 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에요 마스터. 잘 잤어요?」

“그럭저럭.”

「평소에 하지도 않던 거짓말을 다 하시네. 계속 눈 뜨고 있는 거 다 봤는데 어디서 밑장을 빼요?」

“누워서 쉬었으면 됐지 뭐.”

준은 일어나 세면을 했다. 과연 천년하수오로 만든 술은 명주(名酒)였다. 숙취 하나 없이 몸에 활력이 넘쳤다.

준은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릴리가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준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혹시 루치아 님 생각하느라 잠 설친 거예요? 어제 한참 동안 달만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딱 그 느낌이던데. 정령왕님께 부탁해서 연락 한번 해 볼까요?」

정령계의 있는 최고 존재라면 그녀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전에 정령왕이 안 만나준다고 욕 한 바가지 하지 않았었냐?”

「칫, 쓸데없는 데서 기억력이 좋으시네. 그래도 마스터 이름 팔아먹으면 얼굴이라도 비추겠죠.」

“이미 은퇴했는데 팔 이름이 어디에 있어.”

수건을 제자리에 걸고 준은 옷걸이에 걸린 백의를 걸쳤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아직 진료 시간이 되려면 꽤 남았기 때문에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아그네스, 하룬, 마리는 진료실에 나란히 서서 준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전부터 준은 진료 시작 전에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새로운 규칙이었다. 진료 시작 전에 다 같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것.

대부분은 준이 주의 사항이나 정보를 전달하곤 하지만, 직원들의 현실적인 고충이 가끔 들려오기도 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요즘 너무 빡셉니다. 죽을 거 같아요.”

하룬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직원들이 우려되는 바를 하나씩 말했다. 결과적으로 세 명은 모두 똑같은 의견을 냈다. 요점은 이랬다.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워요. 일이 힘든 건 괜찮은데, 대기시간이 늘어나 환자분들이 불편하지 않으실까 걱정돼요.”

“공간도 너무 작아요.”

의견을 끝까지 경청한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너희들이 힘든 건 잘 알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 실제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도 있고.”

“월급을 많이 주시면 하나도 안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안 그래들?”

농담이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하룬은 슬펐다. 하지만 어쩌겠나. 준도 보수를 받고 있지 않은데.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주려던 참이다. 월급이라기보다는 보너스 개념에 가깝긴 하지만.”

준이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냈다. 그리고 딱 다섯 개씩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은화 다섯 개.

말도 안 되게 큰돈이었다.

이 돈이면 켈세타에 가서 한 달은 먹고 마시며 실컷 놀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들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은화만 내려다보았다. 하룬은 은화를 이리저리 돌리며 진품인지 확인했다. 금도 아닌데 바보같이 깨물어 보기도 하고.

아그네스가 말했다.

“외부 환자들 진료비 모아 봐야 은화 세 닢도 안 될 텐데. 사비로 주시려는 거면 안 받을래요. 선생님도 무보수로 일하고 계시는데 저희들만 받을 순 없어요.”

“아니. 얼마 전에 백작께 받은 치료비야. 재료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을 공평하게 3등분한 돈.”

“3등분이면…… 어라? 선생님은 안 나누시고요?”

“잔돈은 필요 없어서.”

‘잔돈’이라는 말에 세 직원의 반응이 각각 달랐다.

아그네스는 귀족가의 막내아들이라는 가설을 입증할 단서를 하나 찾았다는 눈빛이었고, 하룬은 뭔가 재수 없다는 듯한 표정. 마리는 조금 달랐는데, 이 돈으로 사탕을 몇 개 사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피식 웃은 준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는 진료소 내에서 각자 맡은 업무를 확실히 나눠야 할 것 같구나.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하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준은 세 사람을 하나씩 지목하며 지시를 내렸다.

“아그네스는 진료실에서 내 조수를 맡고, 마리는 대기실에서 환자 접수를 받아. 그리고 하룬은 기타 잡무를 맡는다. 특히 청소와 정리를. 그리고 당분간 약초 채집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청소와 정리라니!”

하룬이 소극적으로 반항했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무도 없군. 그리고 한 가지 더. 영주께서 진료소 옆에 신축 건물을 두 채 지어 주시기로 했다. 머지않아 그곳이 새로운 진료소가 될 거야. 켈세타처럼 큰 건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간 문제는 조만간 해결되겠지.”

“헐?”

“정말요? 와아!”

평소 말수가 적은 마리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걸 보니 큰 소식은 큰 소식인가 보다.

“물론 여기도 아직 쓸 만하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곳도 괜찮을 거야. 실험실과 연구실도 있거든. 전에 왔던 폴링 씨가 소식을 전해 줬지.”

“실험실에다 연구실까지요? 선생님. 저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네?”

아그네스는 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준이 오기 전까지, 누아 마을에서는 더 이상 치유술을 배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고 나서 하나씩 차근차근 바뀌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전달사항으로 넘어가지. 다 같이 생각해 볼 문제인데. 일단 아그네스. 요즘 우리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특징이 뭐가 있을까?”

아그네스가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답했다.

“글쎄요…… 다들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는 거?”

“그렇군. 마리는?”

“그냥 며칠 집에서 쉬기만 해도 낫는 분들이 많아요.”

그제야 아그네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자신도 느끼고 있는 문제였는데,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답을 맞히지 못했다.

준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개성의 차이다.

아그네스는 감성적인 측면이 강한 소녀였고, 마리는 이성적인 측면이 강한 소녀였다. 그러니 서로 정반대의 답을 내놓을 수밖에.

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대로 간다면 가벼운 증상으로 온 환자들이 많아 다른 환자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너희들의 고생도 그만큼 커질 거고.”

“그래도 오신 분들은 전부 진료를 해드려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찾아온 환자를 아예 외면하자는 게 아니야. 미리 약을 준비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자는 거지.”

준은 작은 유리병을 서랍장에서 꺼냈다. 그 안엔 갈색 환약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유리병을 손으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응급처치 키트와 비슷한 걸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일종의 가정용 상비약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진료를 받지 않아도 증상에 따라 약을 골라 먹으면 낫는, 뭐 그런 약입니까?”

“정확해.”

정답을 맞힌 하룬이 어깨를 펴며 의기양양했지만, 준은 약재가 든 유리병을 그에게 던져주고는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예를 들어 목이 붓고 아플 때는 은방울초를 약재로 쓰지. 하지만 콧물이 나거나 가래가 나오면?”

“수염뿌리꽃을 쓰죠. 기침을 하거나 오한, 열이 날 때는 푸이푸이를 갈아 먹으면 좋고요.”

“이건 단순히 예시이긴 한데. 그 모든 약재를 농축시켜 환약을 하나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깨달음을 얻은 아그네스가 박수를 쳤다.

“종합감기약이 되겠네요!”

“바로 그거다. 여기에서 핵심은 두 가지야. 바로 휴대와 보관이 간편해야 한다는 거지. 탕약 대신 환약으로.”

그제야 직원들은 준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약재를 잘 배합하면 감기의 여러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환자들은 진료를 받지 않아도 약을 먹을 수 있으니 시간을 아끼는 건 덤이고.

아그네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가벼운 감기 증세가 있는 사람들은 진료를 받지 않아도 치료를 기대할 수 있어요. 정말 좋은데요?”

“중요한 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약초를 잘 배합하는 거다. 물론 조제법은 내가 만들어 뒀으니 약초를 섞기만 하면 돼.”

“바로 시작할까요?”

아그네스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어디에 꽂히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 그것이 자신의 관심사인 치유학이라면 더더욱.

준은 미리 작성해 둔 약재 제조법을 아그네스에게 건넸다. 양옆에 있던 하룬과 마리가 가까이 붙어 함께 제조법을 확인했다.

“오, 쉽다! 그냥 이렇게 따라서 만들기만 하면 되나요?”

알기 쉽게 적혀 있어 약초학에 무지한 하룬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진료 시작 전까지 약을 만들자. 날씨가 추워지고 있으니 감기 환자가 많이 생길 거야.”

“몇 개나 만들어야 해요?”

“최대한 많이. 하루에 한 알씩 세 번, 그리고 삼 일 분이 기본이니, 적어도 300개 이상은 만들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서둘러 진료실을 나갔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그러지 못했다. 준이 불러세웠던 것이다.

“아그네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예?”

대체 무슨 일일까? 어제 일 때문에? 아그네스는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너한테 먼저 물어보고 진행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아, 아뇨. 뭐가 미안하세요.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인데요?”

“곧 새로운 치유사가 이곳에 부임할 예정이다. 폴링 씨가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생각보다 빨리 일이 진행될 것 같아.”

“그런 건 선생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잖아요. 그리고 환자분들을 위해서 그러시는 거,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다음 치유사 자리는 너로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그네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면 저도 두 배로 배울 수 있는 거니까 좋은 거잖아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더 열심히 할게요.”

“좋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그럼 전 애들하고 같이 약 만들러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주세요!”

꾸벅 인사한 아그네스가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일이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켠 준은 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홀로 대기실 청소를 시작했다.

* * *

사흘 후, 준과 진료소 직원들이 만든 종합감기약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시범적으로 원하는 환자들에게 진료 없이 약을 나눠 주었다. 준의 예측대로 감기 환자들이 늘어 약을 받아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약을 나눠 주는 것은 마리의 몫이었다. 약간 낯을 가리는 그녀였지만, 묵묵하게 일을 잘 해냈다.

“테일러 씨. 이 약은 하루에 세 번, 그리고 한 번에 한 알씩 식후에 물하고 같이 드시면 돼요. 약을 드셨는데도 효과가 없거나 증상이 심해지면 꼭 진료소로 다시 오세요. 특히 술은 드시면 안 되고요.”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약효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쌓였다. 약을 받아간 사람들 대부분 증세가 호전되거나 깨끗이 나은 것이다.

종합감기약에 대한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진료를 받기보다는 약을 구해 먹으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진료소 직원들은 열심히 약을 만들어 재고를 확보했고, 그만큼 진료소에 걸리는 부하가 많이 줄었다.

게다가 조금이긴 해도 여유 자금이 쌓이기도 했다.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네. 그럼 이제 위장 계통 상비약을 만들어 볼까? 소화제나 위염에 좋은 약들은 꾸준히 나갈 테니.’

준이 쉬는 시간을 틈타 진료실에서 약초 제조법을 만들고 있던 그때, 진료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이 흔하지 않은 곳이라 자연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켈세타 가문의 인장을 가슴에 박고 있는 병사였다. 전령인 듯싶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폴링 사무관께서 보낸 서신을 가져왔습니다만.”

“아, 고맙습니다. 고생하셨군요.”

“별말씀을.”

가볍게 예를 취한 병사가 물러났다. 준은 편지를 즉시 뜯어 내용을 살폈다.

― 선생님, 폴링입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백작 각하께서 누아 진료소에 임시로 의료진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누아 진료소의 모든 의료진과 함께 켈세타로 오셔서 연회에 참가해 주시길 정중히 청합니다.

이렇게 되면 거절할 명분이 없어진다. 어쩔 수 없이 켈세타로 가야 할 듯했다.

준은 편지를 계속 읽어 나갔다.

― 그리고 누아 진료소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치유사를 한 명 찾았습니다. 조만간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지원자도 아마 마을에 당도했을 겁니다. 저희 사정은 고려하지 않으셔도 되니 충분히 면접을 보신 후 결정해 주십시오.

준은 그가 첨부한 신상명세서를 살폈다. 출신 지역과 가문, 그리고 약력이 기술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확인했다.

‘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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