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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40화 (40/175)

40화 가정용 상비약 (1)

오늘 진료를 모두 마친 준은 왕진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를 했다. 가을이 깊어졌고, 또 뒷산에 올라야 했기에 두꺼운 외투를 준비했다.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준은 아까 호프만이 보내온 술 두 병을 챙겼다. 준은 한 병을 청했지만, 호프만은 한 병을 더 얹어 주었다.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몫이라면서.

그때, 아그네스가 차트 정리를 모두 마치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볼카누스 씨 댁에 가시는 거예요?”

“그래.”

“허리 괜찮으실까요? 아까 찜질 받으실 때도 많이 아파하셨거든요. 대체 그 많은 걸 어떻게 들고 오셨는지 모르겠어요. 괜히 상처가 도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에요.”

괜찮아. 하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엄살 많은 드래곤이거든.

준은 속으로 그렇게 대꾸하며 웃었다.

“괜찮을 거다. 부상도 생각보다 빨리 치유되고 있으니 이제 일상생활을 해도 전혀 문제는 없어.”

“다행이에요 정말. 아! 선생님.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왜?”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아그네스가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잠시 후 그녀가 뭔가를 들고 다시 진료실로 내려왔다.

그것은 하얀 목도리였다.

가까이 다가온 아그네스는 목도리를 천천히 준의 목에 감아 주었다.

푹신하면서도 따뜻한 느낌. 촉감도 나쁘지 않다. 매듭이 엉성한 부분도 간혹 있었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목도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 멀리 나갈 때는 이거 꼭 하고 다니세요.”

“직접 만든 거야?”

“그럼요.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럴 리가.”

부끄러웠는지 아그네스의 양 볼에 홍조가 맺혔다. 그래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 외투와 잘 어울리는지를 관찰했다.

“잘 어울리세요. 역시 잘생기셔서 그런지 뭐든 잘 받으시네요. 옷차림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너 오늘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아뇨? 왜요?”

“오늘따라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것 같아서.”

푸훗, 입을 가리며 웃은 아그네스가 준의 외투 옷깃을 바로 여며 주었다.

“진료소는 저희한테 맡기고 잘 다녀오세요. 곧 어두워질 텐데 길 조심하시고요.”

“다녀오마.”

준비를 모두 마치고 진료실을 나가니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아그네스가 직접 만든 또 다른 목도리를 하룬의 목에 둘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런 걸 다. 하하하!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얘기해도 된다고. 솔직해야 진도를 빨리…… 컥! 켁! 사, 살려줘!”

괜히 까불대다 하룬은 목도리에 목이 졸렸다.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조르던 아그네스는 하룬을 내팽개치고 다른 목도리를 마리에게 둘러주었다.

마리는 마음에 쏙 드는지 커다란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너무 예뻐요, 언니. 고마워요.”

“나중엔 장갑도 만들어 줄게. 색깔 맞춰서 같이하면 예쁠 거야.”

“응응!”

자신에게만 목도리를 만들어 준 줄 알았는데 진료소 직원들 것도 모두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아마 촌장과 자경단장의 것도 있겠지.

릴리도 지켜보고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그녀의 상념이 전해졌다.

「아그네스 말이에요. 치유사도 치유사지만,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겠지. 한창 허영심에 빠질 수도 있는 나이인데 주변 사람부터 챙기고 있으니까. 사람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럼 마리 대신 아그네스를 택하는 걸로?」

준은 교신을 끊었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세 직원들을 바라보며 진료소를 나섰다.

* * *

준은 레어의 문지기와 더욱 친밀해졌다.

“끼잉.”

화염 늑대는 이제 배를 까고 꼬리를 흔들었다. 배를 만져 주지 않으면 실망할 것 같아 잠시 앉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커다란 돼지고기를 던져주고 준은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레어 안에 피어난 야생화들이 좀 더 다양해졌다. 회복에 가속이 붙었다. 육체의 치료도 잘 되고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빠르게 안정이 되고 있었던 영향이 컸다.

안식처로 진입한 준은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표정이 좀 험악하긴 했지만 볼카누스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활자와는 거리가 10만 광년 정도는 되는 친구였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책을 다 읽고. 화초 놀이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건가?”

“흥. 시시해졌다.”

볼카누스가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붉은 기운이 그의 눈과 머리카락에 넘실거렸다.

“이 책을 쓴 새끼를 잡아다 족치고 싶군! 뭐 이렇게 재미가 없지?”

“뭔데?”

준은 가까이 다가가 책을 집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준은 볼카누스가 왜 어울리지도 않는 독서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제목은 바로 <공작가 막내아들의 귀환>이었다. 얼핏 아그네스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공작가 시리즈 중 가장 최신작이라고 했었다.

“아그네스가 빌려줬나?”

“그래. 뻔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명백한 종이 낭비다.”

“하긴, 너한테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지. 인간 세상에서 유희를 하며 별의별 짓을 다 하고 다녔을 거 아냐?”

“허튼소리! 누가 들으면 나쁜 짓이라도 하고 다녔는 줄 알겠다, 이놈아!”

확실히 인간의 입장에서야 재미있는 책이겠지만, 왕국을 쥐락펴락하며 권세를 누려봤던 볼카누스의 입장에서는 흥미가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그네스가 추천해 준 책이니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읽어야겠지.

두통약이라도 처방해 줄까 잠깐 고민한 준은 챙겨온 술 두 병을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뭐냐?”

“비늘 값.”

“오!”

볼카누스는 기대했다. 전직 절대자가 구해온 술이었다. 각종 영약으로 담근 효과 만점의 술일지, 신의 눈물로 빚은 술인지 궁금했다.

볼카누스가 병을 홱 낚아채 마개를 열려고 했다. 그러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준에게 물었다.

“근데 나 술 마셔도 되냐?”

“괜찮을 거야. 드래곤이니 죽지는 않겠지.”

“젠장! 그런 질문이 아니잖아?”

피식 웃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방하고 있는 약 중 술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없었고,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준도 볼카누스와 마주 앉아 남은 술병을 하나 땄다.

“응? 너도 마시게?”

“진료 끝났어.”

“하하하! 역시 멋진 돌팔이야. 마음에 든다!”

술집이었다면 잔에다 따라 마셨겠지만, 번거로워 두 사람은 그냥 병째 건배를 하며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볼카누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뭐야. 술맛이 왜 이리 구려?”

“누아 마을에서 제일 좋은 술인데?”

“미친! 드래곤 로드의 비늘을 네 개나 뽑아 갔는데 못해도 영약으로 담근 술을 가져왔어야지! 이 양심도 없는 자식아!”

“음. 마음에 안 들면 가져가마.”

준이 손을 뻗어 술병을 가져가려고 하자 흠칫 놀란 볼카누스가 그 전에 술병을 채갔다. 피식 웃은 준이 넌지시 경고했다.

“줄 때 얌전히 마셔. 레어 창고 텅텅 비어 있을 거 아냐? 계속 잠만 잤으니까.”

“흥! 입맛만 버리겠군.”

준은 단순히 투정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입에 맞지 않거나 맛이 없었다면 먹다가 버렸을 것이다. 괜히 생색을 내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소박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술을 반병쯤 비운 준이 말했다.

“약초 많이 캐다 준 건 고마운데, 다음부터는 양을 좀 줄여 줘.”

“캐도 지랄, 안 캐도 지랄. 뭐 어쩌라는 거냐?”

“너무 많이 캐니까 애들이 걱정하잖아. 상식적으로 좀 생각해라. 드래곤이라는 거 사방에 소문내고 다닐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네가 원하면 성을 다 부숴 버리고 그 백작놈과 공자들을 모두 네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 주지. 후후후.”

“힘으로 무릎 꿇리면 뭐해? 속으론 네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있을 텐데. 마음까지 얻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등에 칼을 꽂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흥. 잘난 척은.”

콧방귀를 뀐 볼카누스가 술병을 단번에 비웠다. 용량이 꽤 컸는데 역시 드래곤에겐 부족했던 모양이다.

“젠장, 술 더 없지?”

“있긴 한데.”

“좀 꺼내 봐.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또 마시나.”

준은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수많은 술병들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천년하수오를 잘 숙성시켜 만든 술이었다.

통째로 주면 한 번에 다 들이켤 것 같아 준은 작은 잔도 두 개 준비했다.

그렇게 다시 대작이 시작됐다.

술자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양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고, 치료도 해야 했기에 준은 자리를 정리했다.

“입맛만 버렸군.”

“원래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는 법이지.”

“흥, 헛소리는!”

“누워.”

볼카누스가 침상에 얌전히 누웠다.

준은 치료 준비를 시작했다. 아까 환자들이 너무 많이 온 탓에 볼카누스의 치료를 조금 미뤘던 것이다.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준은 부상 부위를 살폈다.

“아주 좋군. 예상보다 빨리 아물고 있다. 이제 별로 티도 안 나네.”

“후후후. 이 몸의 자생력이야 우주 최고니까.”

“우주 최고가 그렇게 쉽게 털렸나? 그럼 시작한다.”

준은 손을 뻗어 마나를 일으켰다.

푸른색 마나 입자가 볼카누스의 상처에 흡수되었다. 은은한 빛을 내며 치료 과정이 시작됐다. 영약으로 만든 술을 먹어 치유 효과가 훨씬 좋았다.

준이 물었다.

“치료가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갈 건가?”

“그래야지. 동족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도 모르고, 또 가족들이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야.”

“잘됐으면 좋겠군.”

“넌 여기 계속 있을 거냐?”

준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바스티엔 공자와 얽힌 일 때문에,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막상 정착을 한다곤 했지만,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당분간은 여기에 있겠지.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켈세타로 갈 수도 있고, 왕도로 갈 수도 있고. 어쩌면 대륙을 떠돌고 다닐 수도 있겠지.”

“그렇군.”

“근데 그건 왜 물어?”

“아, 뭐…… 고향으로 돌아가 다들 무사한 거 확인하면 누아 마을에 한 번쯤은 놀러 올까 싶어서. 크흠.”

볼카누스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준은 그저 웃으며 마나를 뿜어 낼 뿐이었다. 그때는 어떤 술을 대접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 * *

달이 머리 위에 솟을 때가 되어서야 준은 진료소로 돌아왔다.

대기실은 조용했다.

진료실 쪽을 확인하니, 책상에 앉아 잠이 든 아그네스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준은 책상 위를 확인했다. 얼마 전 그녀에게 준 초급 치유술 개론서였다. 내년 치유사 자격시험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쁜 자세로 자고 있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

“아그네스.”

“우응…… 선생님…… 이러시면 안 돼요…….”

“뭐?”

준이 깜짝 놀랐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준은 그 말이 자신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아그네스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한번 지켜봐야지.

“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왠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깨우지 마요!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요!」

팝콘을 손에 쥔 릴리가 강력히 저항했지만 준은 아그네스의 어깨를 툭 쳤다.

동시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준이 자신의 앞에 서 있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어, 언제 오셨어요?”

아그네스는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곧 그녀는 꿈을 꿨다는 걸 깨닫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면 올라가서 자. 나 없는 사이에 별일 없었지?”

“별일은 없었어요.”

“근데 무슨 꿈을 꾼 거야?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던데.”

“꺄앗!”

비명을 지른 아그네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녀는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진료실을 도망가듯 나가 버렸다.

「마스터 은근 잔인한 구석이 있었네요. 그걸 대놓고 말해요? 소오름.」

“농담으로 한 건데.”

「마스터는 농담하고 진담하고 구분이 안 되니까 조심해야 한다구요. 무미건조한 사람이라.」

싱겁게 웃은 준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창 너머로 환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루치아.

왠지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떠오른다. 신의 전령과 대리인으로 만났던 그날도 함께.

과연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저 달을 보며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그날 밤, 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책상에 앉아 펜과 종이를 꺼냈다. 그러곤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편지는 아니었다. 일기는 더더욱.

그것은 준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는 가정용 상비약의 조제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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