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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39화 (39/175)

39화 새로운 아이템

“계십니까?”

낯선 남성의 목소리였다. 차트를 정리하던 아그네스가 생긋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늘씬한 중년 남자였다. 셔츠와 조끼를 입어 굉장히 단정한 느낌을 풍겼는데, 혈색과 풍채가 좋아 환자 같아 보이진 않았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누아 마을 토박이인 아그네스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외지인이 분명하다.

“어서 오세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닙니다. 켈세타 성에서 나왔습니다만.”

“예에?”

아그네스는 깜짝 놀랐다. 남자는 웃으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의 이름은 폴링이었고, 켈세타 성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사우던 가문에도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었구나. 아그네스는 내심 감탄했다.

“제가 갑작스레 찾아와 놀라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니고…… 혹시 저희 선생님 찾아오셨나요?”

“예. 강준 선생님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제가 너무 일찍 온 것 같아 걱정이군요.”

“아니, 제때 오셨습니다.”

때마침 병실에서 호프만과 이야기를 마친 강준이 2층에서 내려왔다. 치유사를 상징하는 백의를 입고 있었기에, 폴링은 꾸벅 인사했다.

“아아!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저희 대공자님을 구해 주신 분이군요!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켈세타 성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폴링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폴링 씨. 강준입니다. 바스티엔 공자께서 보내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폴링이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두 손으로 준에게 건넸다. 준은 일단 편지를 챙기고 폴링을 진료실 안으로 안내했다. 환자가 아니라도 먼 곳에서 온 손님이니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찮으시면 차 한 잔 어떠십니까?”

“좋죠.”

준은 직접 손님을 대접했다.

폴링은 진료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흔해 빠진 낡은 진료소인데, 스캐너와 전기 충격기 같은 최첨단의 마법공학 장치가 들어서 있었다.

그가 치유술을 잘 몰랐기에 망정이지, 다른 치유사가 왔다면 의료기구에 달라붙어 원리와 사용 방법부터 물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떤 물건인지 짐작도 안 됩니다.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그냥 취미로 마법공학을 좀 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몇 개 더 만들 계획이지요. 자, 일단 드십시오. 향이 좋을 겁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폴링은 교양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준의 의술과 진료소의 시설을 지나치지 않게 칭찬하며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선생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아까 드린 편지를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공자께서 확답을 받아 오라고 하셔서요.”

“이런, 실례했군요.”

준은 바로 편지를 꺼내 봉투를 뜯었다. 생각 외로 장문의 편지였다. 세 페이지나 되었는데, 주로 바스티엔 공자의 근황과 건강 상태가 기술되어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바스티엔 공자의 상태는 더욱 호전된 모양이었다. 멈췄던 검술 훈련도 하고, 영지의 모든 대소사에 관여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 준은 내심 흡족했다. 그런데.

‘역시 이거였나?’

마지막 부분에 용건이 있었다. 그 대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준이 미소를 지었다.

“초청장이군요.”

“그렇습니다. 실은 영주께서 완치 기념으로 연회를 계획하셨지요. 인근 영지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기로 되었고요.”

“오래도록 기념할 만한 일이니 무척 큰 연회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께서도 참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 기적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아마 누아 마을은 물론 선생님께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글쎄요.”

준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말에는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운이 좋으면 더 큰 병원으로 갈 수도 있고, 각종 이권 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역시 방법이 없었다.

준에게 재물과 명예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공간 창고를 열기만 해도 부와 명예를 얻는 건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참가는 어려울 것 같네요.”

“역시 그렇습니까.”

“예상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하하하. 실은 대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자기는 특별한 환자가 아니닌, 아마 수많은 환자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그래서 다른 환자를 보느라 못 오실 것 같다고요.”

준은 싱겁게 웃었다. 역시 총명한 사내였다. 아픈 와중에도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폴링이 물었다.

“역시 진료를 하셔야 하니 자리 비우기가 어려우시지요?”

“예.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환자가 적어서 짬을 낼 수 있었는데, 대공자님 덕분에 많이 바빠졌거든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방법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부정적인 대답을 들었는데도 폴링은 환하게 웃었다. 준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격식도 격식이지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매력이 있는 사내였다.

그림이 그려졌다.

이곳의 사무관으로 영입하면 딱일 텐데.

“최근에 많이 바빠지셨다면 일손이 좀 더 필요하시겠군요.”

“안 그래도 치유사를 한 명 더 초빙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분이 오셨으면 좋겠는데요. 아! 마침 잘됐군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폴링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한 아름은 될 만큼 커다란 종이였는데, 자세히 보니 어떤 건축물의 도면이었다.

“이게 뭡니까?”

“영주께서 이번에 하명하신 일인데, 신축 진료소의 도면입니다. 켈세타에서 소문난 명공이 설계한 작품이죠.”

준은 왜 자기에게 보여 주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일단 치유사이기도 하니 확인은 해 주었다.

러프한 이미지라 정교한 설계는 아니었고 대강 어느 위치에 무엇이 들어서는지만 그려져 있었다.

건물은 총 두 채였다. 하나는 환자들이 요양할 수 있는 전용 병동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각종 검사실과 실험실, 연구실과 약재 보관실 등이 들어가 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단순히 치료에만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연구실까지 들어선 멋진 진료소입니다. 켈세타 병원이 증축될 예정인가 보죠?”

“아쉽게도 아닙니다. 바로 이곳, 누아에 들어설 진료소지요.”

폴링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준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일종의 포상 개념일 것이다.

준이 되물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제법 큰 돈이 들어갈 것 같은데요?”

“영주께서는 작은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이군요.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보다 넓고 쾌적한 공간이 들어선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방문하는 환자들이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폴링이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아까 치유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지 부탁드리긴 좀 죄송한데요.”

“하하하! 아닙니다. 영주께서도 앞으로 신경을 쓰라고 하셨으니 부담가질 필요 없습니다. 제 일이니까요. 앞으로 선생님을 자주 뵙게 될 것 같네요.”

“저희도 켈세타에 공고를 내긴 할 겁니다만, 폴링 씨가 도와주시면 일이 좀 더 수월하게 풀리겠군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인 것은 폴링이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가 더 감사드리죠. 전 사우던 가문에서 대공자님을 오래 모셨습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힘들어하시는 걸 보기 괴로웠는데…… 선생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셨네요. 덕분에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을 사우던 가에서 빼 오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다.

괜히 머쓱해지는 느낌이라 준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건축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아직 세부 도면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오는 길에 보여 드리려고 급하게 만든 거라서. 일정이 나오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지요.”

그때, 아그네스가 조심스레 노크했다.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환자분 오셨어요.”

“아! 이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이만 돌아갈 테니 일 보십시오.”

“바로 켈세타로 가십니까?”

“하루 정도 쉬었다 가려고 합니다. 이곳에 여관이 하나 있다고 들어서요.”

“거기 주인에게 제 이름을 대면 조금 더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빵은 꼭 챙겨 드세요. 켈세타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겁니다.”

“좋은 팁이군요!”

정중히 인사를 한 폴링이 진료소를 떠났다. 배웅을 나가려 했으나 그는 극구 사양했다.

찾아온 환자는 가벼운 복통 환자였다. 특별히 문제 되는 부분이 없어서 약을 처방해 주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돌팔이!”

밖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준과 직원들이 진료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볼카누스가 거대한 보자기에 약초를 잔뜩 담아 등에 메고 있었던 것이다.

아그네스와 하룬이 황급히 달려가 보자기를 볼카누스의 등에서 내렸다.

“볼카누스 씨. 이게 다 뭐예요?”

“약초지 뭐야. 너희 선생이 필요하다길래 산에서 좀 캐 왔다.”

“여기까지 혼자 메고 오신 거예요? 허리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 아니. 좀 쑤시는 거 같은데?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준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완치되면 왕도로 가서 극단에 들어가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어떠냐고 충고해야 할 것 같다.

준이 지시했다.

“아그네스. 모시고 가서 찜질 좀 해 드려.”

“네. 선생님.”

준은 하룬과 함께 약초 정리를 시작했다. 마리는 대기실에 남아 환자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창고에서 약초 보자기를 펼친 준은 이마를 짚었다.

“역시. 예상대로 엉망이군.”

리스트에 적어 준 약초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볼카누스의 성격이라면 애초에 정리와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소요될 것 같았다.

그래도 고마운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 많은 약초를 이렇게 빠른 시간에 구해 올 줄은 몰랐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때, 마리가 창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곧 가마. 하룬. 일단 모양이 비슷한 약초끼리 한데 모아 놔. 뿌리나 잎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분류해야 한다.”

“맡겨 주십쇼!”

그 길로 준은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가벼운 증세의 환자였다. 목이 살짝 부어 있었다. 준은 금방 진료를 마치고 다음 환자를 받았다. 그 환자도 가벼운 근육통을 앓고 있었다.

진료를 마친 준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찾아오는 환자의 9할, 아니 거의 모두가 가벼운 증상을 앓고 있어. 인력이 충분하다면 모를까. 문제가 있다.’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아픈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가벼운 증상의 경우는 약을 받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대응 가능했다.

‘약국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하던 생각에서 준은 힌트를 얻었다.

약국.

바로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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