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38화 (38/175)

38화 영원히 고통받는 드래곤 (2)

준은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볼카누스의 레어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점점 나아질수록, 레어도 같이 변했다. 용암이 들끓던 그곳에 화초가 자라기 시작했다.

전에는 없던 생명력이 레어 안에 퍼지고 있었다. 긍정적인 일이다.

안식처로 들어간 준은 피식 웃었다.

“나가서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라고 했더니 레어에 틀어박혀 화초를 키우고 있나? 레드 드래곤답지 않은 취미인데?”

“흥! 참견하지 마라. 이 몸이 하는 일엔 다 의미가 있는 법이다.”

볼카누스는 안경을 낀 채 화분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길고 날렵한 푸른 잎사귀를 헝겊으로 닦으며.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건지.

오늘은 미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준은 목이 좀 편했다.

“그래도 나 왔다고 폴리모프를 하고 있었네. 좋은 자세야. 이제 다른 손님을 초대해도 되겠어.”

“오해하지 마라. 본체의 앞발로는 화초 손질을 못 해서 그런 거니까.”

“하긴. 사람도 하루아침에 안 바뀌는데 드래곤은 어림도 없겠지.”

“시비 걸러 왔냐?”

“아니.”

“그럼 뭐야? 요즘 그 철부지 공자들 때문에 정신없어 보이던데. ‘명의’라는 이상한 소문도 돌고 있고 말이지.”

애지중지 화분 손질을 마친 볼카누스가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준이 목적을 밝혔다.

“비늘 몇 개 좀 얻을까 해서. 좀 큼지막한 걸로.”

“으헉!”

깜짝 놀란 볼카누스가 뒷걸음질 치다 테이블을 건드렸다. 그 덕에 아끼던 화분이 흔들렸고, 결국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분이 박살 났다. 흙이 사방으로 튀었고, 화초가 엉망이 됐다.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던 볼카누스가 버럭 화를 냈다.

“야 이 망할 자식아! 왜 가만히 있는 드래곤 놀래키고 지랄이냐?”

“고작 비늘 몇 개 가지고 까칠하기는. 이번 환자는 병소가 좀 커서 하나로는 안 돼. 가공을 해야 하니 세 개 정도는 뽑아야 한다.”

“꺼져!”

볼카누스의 머리카락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음. 알았다. 방해해서 미안하군.”

준은 흩어진 난초를 대강 수습한 뒤 몸을 돌렸다.

좀 더 간절히 부탁할 줄 알았는데, 그가 너무 쉽게 돌아서니 볼카누스의 기세가 확 누그러졌다.

아쉬운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겉으로는 툴툴거리지만, 볼카누스는 누군가 찾아왔다는 게 즐거웠다. 혼자 지내기에는 이 레어가 너무 넓었으니까. 그 주인공이 준이라면 더더욱.

“어이. 잠깐만. 가란다고 진짜 가냐?”

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볼카누스의 목소리가 더욱 간절해졌다.

“돌팔이!”

그제야 준이 멈춰 섰다.

“괜히 화만 돋웠다가는 네 건강만 안 좋아질 거고, 그럼 치료해야 하는 내 수고만 늘어나는 셈이잖아.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만큼 늦어질 거고. 서로 손해다.”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 전에 뽑아 갔던 비늘은 어쩌고?”

“잘라서 써서 재활용 못 한다. 남은 건 버렸어.”

“미친! 그 귀한 걸 버려?”

“뭐가 귀해? 눈앞에 잔뜩 있는데.”

말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볼카누스가 뒤로 물러섰다. 곧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레어에 군림했다.

― 뭐, 네놈에게 치료도 받고 케이아스의 정수도 받았으니 선심 좀 써 볼까.

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어. 너 정도 되면 사람들에게 좀 베풀고 살아야지. 그래야 극락왕생할 거다.”

― 이 돌팔이가! 극락왕생이라니? 재수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아무튼…… 알지? 살살 뽑아라.

“노력해 보마.”

― 마취 같은 건 못 하나?

“쉽지 않지. 드래곤으로 태어난 걸 탓해라.”

준은 가방에서 오리할콘 펜치를 꺼냈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손을 움직여 소리를 냈다. 딱딱거릴 때마다 볼카누스의 비늘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 풀어. 힘 들어가면 더 아프다. 보자…… 어디가 좋을까?”

이번에는 배 쪽에 나 있는 커다란 비늘을 골랐다. 매끈한 것이 수천 년 정도는 거뜬히 버텨 줄 것 같았다.

볼카누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 네 개 뽑으면 안 된다. 응? 딱 세 개만 뽑아. 알았지? 엉?

“넌 왜 그렇게 겁이 많아? 신마전쟁에서 부상당한 게 아니라 겁먹고 도망친 게 아닌지 의심되는데? 솔직하게 말해 봐. 비밀로 해 줄 테니.”

― 뭐라고? 이 자식이! 크르르르!

쑥! 쑥! 쑤욱!

순식간에 비늘 세 개가 뽑혀 나왔다. 볼카누스가 진노한 순간을 노려 재빨리 뽑아낸 것이다. 덕분에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좋아. 잘 뽑혔네. 수고했다.”

준은 미소를 지으며 비늘을 가방에 담았다. 당황한 볼카누스가 앞발로 배를 더듬으며 살폈다. 정확히 비늘 세 개가 비어 있었다.

― 뭐야. 벌써 뽑았어?

“아프지 않게 뽑아 달라며. 네 소원 들어줬으니까 부탁 하나만 더 하자.”

― 이 새끼, 가만 보니 치유사가 아니라 순 사기꾼이군!

“그래. 맞아. 칭찬으로 들을게.”

준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볼카누스에게 건넸다. 그는 받으려다 앞발에 비해 종이가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닫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적힌 내용을 확인한 볼카누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건 약초 목록이잖아? 이걸 왜 나한테?”

“레어에서만 뒹굴지 말고 뒷산 오가면서 운동 좀 하라고. 그 와중에 눈에 보이는 것들 좀 캐 줘. 양은 많을수록 좋다. 가끔 좋은 영약 나오면 챙겨 먹고. 회복에 도움이 될 거다.”

“허!”

볼카누스는 기가 막혔다.

드래곤 비늘이 필요한 건 그렇다 치는데, 이제 약초 채집까지 시키는 건가? 레드 드래곤 로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제 비늘로도 모자라서 노가다까지 시키려는 거냐?”

“적당한 신체 활동은 자연치유력을 높여 주지. 회복 과정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그네스가 너무 바빠. 약초 채집까지 하면 앓아누울 거다.”

준은 비장의 ‘아그네스 카드’를 꺼냈다.

효과는 굉장했다.

콧방귀를 뀌며 종이를 구기려던 볼카누스는 아그네스가 힘들다는 말에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다시 약초 리스트를 살폈다.

“흠흠.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할 수 없지. 이 몸께서 친히 수고를 해 주겠다.”

“고마워.”

씨익 웃은 준이 손을 흔들며 안식처를 떠났다.

비늘도 세 개나 뽑히고 심부름까지 받아 왠지 속은 기분이었지만, 다음에도 준이 이곳에 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좋은 술 한 병과 함께.

“돌팔이! 다음엔 빈손으로 오지 말고 좋은 술 좀 가져와!”

볼카누스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 * *

마을로 돌아온 준은 바로 진료소로 돌아가지 않고 촌장 아론의 집으로 향했다.

“촌장님. 계십니까?”

잠시 후 아론이 반갑게 준을 맞았다.

“오, 이게 누구야. 강준 선생 아닌가?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지나가다가 차 한 잔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허허허. 물론이지. 어서 들어오시게.”

촌장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적적하던 차에 마침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 것도 있지만, 마을에 경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준이 오고 나서부터 누아 마을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췄고, 거기에 세금 감면까지 받았으니까.

처음엔 준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착을 종용한다고 촌장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준의 활약 덕에 세금도 덜 내고, 마을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조금씩 늘어가는 외지인들 덕에 시장이 점점 활기를 띠고 있었다. 덕분에 자경단의 일거리가 늘어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아론은 찻잎을 담은 찻잔에 끓인 물을 부으며 물었다.

“오늘 진료소에 환자들이 많이 몰렸다지?”

“벌써 소문이 퍼졌습니까?”

“아까 아그네스가 잠시 다녀갔다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성격상, 아마 투정을 부리고 갔을 게 분명했다. 손녀의 특권이란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좀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만.”

“그래? 어디 한번 들어 볼까.”

아론은 티스푼으로 찻물을 빙글 휘저었다.

쌉싸름한 향이 솔솔 올라오는 찻잔이 눈앞에 놓였다.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한 준은 차향을 음미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진료소의 인력을 좀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치유사도 한 명 더 두었으면 하고요.”

“으음. 그렇군. 예상은 했다만.”

“장기적으로 볼 때 진료소를 찾는 환자들은 늘어날 겁니다. 치유사는 구하기 어려우니 보류하더라도 다른 인력은 더 필요해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준의 활약상은 이미 외부로 퍼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환자들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귀족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 바스티엔 공자의 중병을 치료했으니, 그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

아론이 물었다.

“치유사는 내 한번 알아보겠네. 여기서 구하기는 어렵고, 아마 켈세타에 공고를 내야 할 거야. 그런데 인력은 몇 명 정도 필요한가?”

“아직 상주 인력은 필요 없고, 약초 채집과 손질을 도와줄 사람들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아론과 아그네스를 제외하고는 치유술을 익힌 사람이 없었다. 반면 약초를 캐거나 다듬는 건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으니 전문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아론은 방도가 떠올랐는지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알았네. 조만간 소식을 주지. 참, 마리는 어떤가? 잘 지내고 있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법 수련을 할 시간이 좀 줄어서 아쉬워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어느 경지까지 올랐나?”

“글쎄요. 사실 녀석에게 경지는 의미가 없지요. 금제가 완전히 깨지게 되면 인간의 경지를 초월할 테니까.”

한때 마법사의 길을 걸었던 아론은 가슴이 후끈거림을 느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마법사가 귀한 세상인 만큼, 그들은 자존심이 세며 강한 힘을 열망한다. 지금은 은퇴했어도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마리에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열정을 계속 불태우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대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지도할 계획인가?”

“가르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더군요. 그래서 방향을 좀 바꾸었습니다.”

“가령?”

“마법공학 지식을 전수할 생각입니다.”

그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아론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그네스에게 듣긴 했어. 신묘한 의료기구를 만들었다지? 내 아들은 좀 걱정하고 있는 거 같네만…… 아무튼 자네에게 마법공학 기술도 있을 줄은 몰랐네.”

“어깨너머로 배운 잔재주일 뿐입니다.”

“허허허! 자네가 처음 마리를 치료했을 때도 아마 그런 얘기를 했었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준은 멋쩍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마법공학자 쪽이 훨씬 더 나을 겁니다. 대우도 좋은 편이고, 위험한 일에 휘말릴 일이 적으니까요.”

“하긴, 왕립학술원에 들어가서 활약한다면 작위도 받을 수 있고 좋겠지.”

“무엇보다도 마리도 그쪽이 더 적성에 맞는 듯합니다.”

“다행이구먼.”

마나를 느낀다고 해서 아무나 마법공학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훌륭한 마법공학자가 되기 위해선 응용력과 창의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드래곤 로드의 힘을 이어받았고, 속성에 대한 감응력도 뛰어나니 기본적인 지식만 전수한다면 다양한 도구와 장치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그네스를 성실한 치유사로, 하룬을 의젓한 기사로, 마리를 창의적인 마법사 겸 마법공학자로.

준의 머릿속에서 흥미로운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호프만의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준은 바스티엔 공자의 시술과 비슷한 방법으로 약해진 혈관을 보강했다. 이제 혈관은 더 이상 부풀지 않을 것이고, 터질 염려도 없었다.

시술을 모두 마치고, 회복 단계에 접어든 호프만의 표정은 평온했다.

“정말 고맙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하하!”

참 가까운 길을 이렇게나 돌아왔구나.

시술 후 호프만이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몸 상태도 훨씬 좋아졌고, 불안감도 사라졌다.

평소라면 괜찮습니다, 한마디로 넘어갈 준이었지만 이번엔 은혜를 갚게 할 생각이었다. 마침 필요한 것도 있었고.

“혹시 가게에 괜찮은 술이 좀 있습니까?”

“술? 술이야 넘쳐나지. 그런데 왜?”

“호프만 씨 시술에 특수한 금속이 들어간 건 알고 계실 테고. 준비에 도움을 준 친구가 있는데, 보답 겸 한 병 보낼까 해서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내줘야지! 독한 게 필요한가? 아니면 숙성이 잘된 것?”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볼카누스는 화염 속성의 드래곤이니 높은 도수의 술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성질도 그랬고.

“독한 쪽이 좋을 거 같군요.”

“알았네. 내 집에 돌아가는 대로 준비해서 보내 주지. 입에서 불이 나갈 정도로 화끈한 놈으로!”

“기대하지요.”

준은 차트를 정리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누아 마을에서 듣기 힘든 마차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던 그 소리는 정확히 진료소 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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