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영원히 고통받는 드래곤 (1)
오전 진료가 모두 끝났다. 대기실을 꽉 채웠던 환자들은 모두 만족하며 돌아갔다.
아그네스는 ‘진료 준비 중’ 팻말을 현관에 걸고 문을 닫았다. 급환을 제외하고, 진료는 한 시간 반 이후에 다시 시작된다.
“휴.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요. 선생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너희들이 애썼지.”
“아침에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마당 청소도 제대로 못 했어요. 환자분들이 몰려오셔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은 대기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종잇조각과 이리저리 널린 쓰레기들, 거기에 바닥이 흙과 모래로 엉망이었다.
준은 한쪽에 있는 청소도구를 집었다. 그리고 묵묵히 청소를 시작했다.
“선생님!”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준의 빗자루를 뺏었다. 마리는 반대편에서 쓰레받기를 뺏었다. 좋은 팀워크였다.
“들어가서 좀 쉬세요. 청소는 저희들이 해야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거지.”
“그래도 청소는 좀 번거로운 일이잖아요.”
“번거로운 일 하는 사람 따로 있나?”
준은 다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뺏었다. 그리고 빗자루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굳이 돕겠다면 다른 일을 해. 아그네스는 새로 온 환자 차트 정리를 하고. 마리는 약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줘.”
“그렇게 할게요. 힘쓰는 건 하룬이 잘하니까 걸레질은 걔한테 맡기세요. 아셨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꼬르륵―
진료실로 달려가던 두 소녀가 멈칫하더니 하룬을 노려봤다. 모두의 시선이 하룬의 배로 향해 있었다. 당사자는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하! 이거 너무 열심히 일을 했나? 배가 고프네. 자자, 여러분. 청소도 좋지만 간단히 뭐라도 먹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오후에 환자들 상대하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고요.”
“일리가 있는 말이네. 아그네스. 차트 정리는 나중에 하고 간단히 먹을 걸 준비해 줄래?”
“넵. 맡겨 주세요!”
아그네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당으로 달려갔다.
실은 요즘 취미가 하나 늘었다.
바로 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 아직은 ‘먹을 만하네’ 정도였지만, 언젠가는 ‘맛있다’란 칭찬을 듣고 싶었다.
한편, 준과 함께 빗자루질을 하던 하룬이 투덜거렸다.
“저 선생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이상한 의료기구 만들 시간에 청소를 대신해 주는 마법 도구부터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뭐, 안 될 건 없지. 간단히 응용만 하면 되는 일이니.”
“오! 진짜요?”
“그래도 청소는 직접 하는 게 좋지.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면 나태해지거든. 환자분들이 머무는 곳이다. 정성껏 청소하는 게 좋아.”
“선생님은 그렇게 젊으신데 왜 우리 부모님하고 똑같은 잔소리를 하시는 걸까요? 이상하네…….”
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두 남자는 빗자루질을 끝내고 물걸레질을 시작했다. 특별히 약재를 녹여 만든 물로 바닥을 닦았는데, 청량한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걸레질을 모두 마친 하룬이 보람찬 표정으로 이마를 슥 닦았다.
“아주 바닥에서 광택이 번쩍번쩍하네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고생했다.”
“걸레 주십쇼. 제가 정리할게요.”
나머지를 맡기고 준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기구와 책상, 침상은 모두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마리는 찬장에서 약초 재고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좀 어때?”
“생각보다 많이 줄긴 했는데 며칠 정도는 괜찮아요. 중요한 약재들은 거의 쓰지 않아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만 줄었어요.”
“환자들의 증세가 대부분 가벼웠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구나.”
환자가 없을 때는 아그네스와 하룬이 약초 채집을 나간다. 그런데 오늘처럼 환자가 몰려온다면 두 사람의 빈자리는 클 것이다.
‘아픈 사람들은 신경이 예민해져 있으니 다루기 어려워. 손이 많이 필요해. 환자 대기실에서 접수를 하는 인원이 한 명 있어야 하고. 가만, 그러면 약초 채집은 누가 하지?’
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방법이었는데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셔서 식사들 하세요!”
그때, 식당에서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심 준비가 끝난 거 같은데 슬슬 가자.”
끄덕끄덕.
몸은 훌쩍 자랐지만 마리의 끄덕거림은 언제 봐도 귀엽다.
식당에서 좋은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준의 배에서도 신호가 왔다.
숙취가 올라오는 와중에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하고 진료만 했다. 아무리 전직 절대자라고 해도 시원한 해장국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믿는다. 아그네스.’
소소한 기대와 함께 준은 마리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의리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하룬은 어느새 앉아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앞치마를 걸친 아그네스가 큰 냄비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몇 가지 양념을 털어 넣고 큰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마무리를 했다.
냄새가 기가 막혔다.
“어서 앉으세요. 다 됐어요.”
“뭔데?”
“잠깐만요…… 이렇게 건더기랑 국물을 같이 퍼 넣고. 짠! 어때요. 맛있겠죠?”
아그네스가 자신 있게 내민 것은 뜨거운 장국 요리였다. 밀가루 반죽을 넣어 익힌 것으로, 준도 옛날에 먹어 본 적이 있었다.
“수제비?”
“수제비요? 그게 뭐예요?”
“내 고향에서는 이 요리를 그렇게 부르곤 했지. 간편하게 먹기 좋은 음식이야. 흐음. 고춧가루에 대파를 넣고, 무도 넣었구나. 감자까지?”
준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이보다 더한 해장국이 따로 있을까?
국물을 한 모금 떠먹었다.
후루룩!
곧 그의 얼굴에 묘한 쾌감이 번졌다. 답답하던 가슴이 한방에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맛있네.”
“정말요? 와아!”
아그네스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이렇게 빨리 목표를 달성할 줄은 몰랐다.
준이 물었다.
“근데 어떻게 이걸 만들 생각을 다 한 거야? 재료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렸을 것 같은데.”
“어제 선생님 술 많이 드신 거 같아서 아침에 해 드리려고 미리 준비했어요. 할아버지께 배운 요리인데, 울 아버지도 이 음식 좋아하시거든요. 술 드신 다음 날엔 꼭 찾으세요.”
“과연 촌장님이야. 좋은 걸 가르쳐 주셨구나.”
하지만 지금은 말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준은 지체 없이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후루룩!
숟가락으로 성에 안 찼는지 그릇을 손에 쥐고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들이마셨다.
준이 너무나도 맛있게 먹자 마리는 매운 수제비를 결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꿀꺽 삼켰다.
“으…….”
후끈한 감각이 입 안을 자극하자 마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괜찮니? 너무 맵게 됐나? 빵 좀 남은 거 있는데 우유 데워서 같이 먹을래?”
“괜찮아요. 저 이거 먹을 수 있어요.”
마리는 꾸역꾸역 수제비를 먹었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물을 집었다.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수제비를 먹는 걸 반복했다.
그때, 대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냄새 한번 끝내주는군. 나도 좀 낄 수 있나?”
세사르 공자였다. 얼굴이 초췌해 보였는데, 그도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벌떡 일어났다.
“공자님! 그, 그게. 이건 좀 올리기 민망한 음식이라…… 공자님 식사는 제가 따로 준비할게요.”
“됐다. 숙취 앞엔 만인이 평등한 법이지. 같은 걸로 다오.”
아그네스는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큰 그릇에 매운 수제비를 가득 담아 공자의 앞에 대령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조금 맵긴 한데요…….”
후르륵!
시원하게 국물을 한 숟갈 넘긴 공자가 탄성을 질렀다. 눈이 번뜩 뜨일 정도로 시원했다.
“오오! 이거 정말 기가 막히는군. 뭘로 이렇게 만든 거지? 이따 전령을 보내 사우던 가의 주방장을 불러야겠어. 이렇게 맛있는 건 배워 가야지.”
세사르 공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은근한 눈으로 아그네스를 바라본다. 깜짝 놀란 아그네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썩기는 아까운 재능이야. 혹시 우리 가문의 요리사로 올 생각은 없나? 보수는 잘 챙겨 주지.”
“아, 저…… 그게…… 황송하지만…….”
“농담이다. 하하하!”
세사르 공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세 직원들은 그를 대하는 게 어려웠지만, 준은 공자와 허물없이 어울렸다.
바스티엔 공자가 내성적이라면, 세사르 공자는 외향적이였다. 말이 잘 통하고 호탕한 면이 있었다.
그렇게 귀족과 평민이 함께한 기묘한 식사가 끝났다.
직원들은 뒷정리를 맡았고, 준과 세사르 공자는 진료소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수행기사 둘이 그 뒤를 은밀히 수행했다.
하지만 세사르 공자가 손을 뻗어 돌아가라고 지시하자 다시 물러났다.
뒷짐을 지며 한참을 걷던 세사르 공자가 걸음을 멈췄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누아 마을의 전경은 제법 괜찮았다.
준이 물었다.
“대공자께서는 뭘 하고 계십니까?”
“푹 주무시고 일어나자마자 정책 구상을 하고 있소. 살생부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비슷한 걸 만들고 있더군요. 형님은 보기보다 꽤 무서운 분이라서. 아마 성으로 복귀하면 이래저래 시끄러워질 겁니다. 하하하.”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군요.”
세사르 공자가 돌아섰다. 그는 정면으로 준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다.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선생 덕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눈이 좀 트인 그런 느낌입니다.”
“내면을 살피는 건 늘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보람도 있고.”
“가끔 들르겠소. 그때도 술 한잔합시다. 우리 형님도 같이 껴서.”
“빠른 쾌유를 빌어야겠군요.”
세사르 공자가 손을 내밀었다. 준은 기꺼이 악수에 응했다.
* * *
사우던 가문의 두 공자는 기사단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성으로 돌아갔다. 진료소는 물론,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공자들을 환송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손에 뭔가 하나씩 들고 진료소를 찾았다. 아그네스는 또다시 환자들이 들이닥친 줄 알았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젊은 선생 덕분에 세금이 반이나 줄었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가만히 있으면 도둑놈이게?”
“부담 갖지 말고 받으쇼! 영차!”
다들 가축이나 채소, 먹거리 등을 하나씩 놓고 갔다. 대장장이 파토스는 잘 제련된 의료용 칼날을 선물했고, 펜터는 직접 만든 목걸이를 놓고 갔다.
아그네스와 마리는 신난 얼굴로 식료품을 정리했다.
“당분간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요? 와, 이걸 다 어떻게 보관한담?”
양이 상당히 많았다. 하룬까지 나서서 거들어야 했다.
준은 파토스가 선물한 의료용 칼날을 쥐었다. 혹시나 해서 마나를 흘려 보니, 역시나 마법이 걸려 있었다. 펜터가 만든 목걸이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엔 정말 장인들이 많나 봐요. 효과가 약하긴 해도, 이 정도면 일반인 수준에선 훌륭하죠.」
‘어딜 가든 재야의 고수들이 있는 법이지.’
의료용 칼날엔 지혜와 마력을 소폭 상승시켜 주는 마법이, 그리고 목걸이엔 지력을 조금 상승시켜 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준은 의료용 칼날을 아그네스에게, 목걸이는 마리에게 주었다.
당연히 하룬에게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줄 게 없었으니까.
“선생님? 우리 사이에 이러깁니까? 전 뭐 없나요?”
“마침 적당한 게 하나 있구나. 받아라.”
준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건넸다. 그것을 본 하룬의 눈이 빛났다.
“오! 마법 청소 도구입니까? 안 만들어 주실 줄 알았는데 그새 만들어 주셨네. 이제 청소 당번에서 해방되겠네요!”
“아니. 거기 부스러기 떨어진 것 좀 치우라고.”
“…….”
하룬은 정색했지만, 이미 진료소는 온통 웃음바다가 된 뒤였다.
진료실로 돌아온 준은 왕진 가방을 열었다.
릴리가 물었다.
「또 어디 가시게요?」
‘내일 호프만 씨 시술 있잖아. 재료 구해 와야지.’
「설마!」
‘그래. 비늘 뽑으러 간다.’
씨익 웃은 준이 오리할콘 펜치를 꽉 쥐었다. 릴리는 두 손을 모으며 애도를 보냈다. 조만간 볼카누스의 비늘이 다 뜯겨 알몸이 되지 않을까?
상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