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뜻밖의 유명세
준은 늦잠을 잤다.
어젯밤 켈세타의 두 공자들과 어울려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물론 아직 치료 중인 바스티엔 공자는 술 대신 차를 마셨지만.
그래서 준은 세사르 공자와 대작해야 했다.
평소라면 술을 입에 잘 대지 않고, 또 마시는 즉시 주기를 배출했지만 어제는 그러지 않았다. 순수하게 먹고 마시고 즐겼다.
‘후우. 너무 많이 마셨나? 상태가 영…… 시원한 국물이라도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어.’
준은 한숨을 내쉬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편한 분위기 속에서 술판이 벌어진 와중에도 두 공자는 각자 품고 있었던 견해를 솔직히 밝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위는 대공자인 바스티엔이 계승하되, 일정 권력을 동생에게 이양하기로 했다.
두뇌가 총명한 바스티엔 공자가 내정을, 그리고 무위가 뛰어난 세사르 공자가 군무를 담당하여 영지를 더욱 빠르게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좋은 계획이지만 쉬운 일은 아니겠지. 얼마나 가신들을 빨리 중재시키느냐가 관건이야.’
이미 양쪽으로 파벌이 나뉘어 있어 극명하게 대립하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준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당사자인 두 공자들의 우애와 신뢰만 확실하다면, 그들이 힘을 합쳐 여러 어려움을 이겨 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욱 강해질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던 중, 릴리가 나타나더니 잔소리를 늘어놨다.
「어제 엄청 들이붓더니 꼴좋네요. 흥. 이럴 줄 알고 적당히 마시라고 한 거였는데.」
“오늘은 좀 봐줘. 아직 진료 시간까진 좀 남았잖아.”
「웬일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마스터 술 별로 안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 헛! 설마 클론인가? 꺅! 페어리 살려!」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같이 마실 만한 사람이 없었던 거지. 네가 대작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번거롭긴 하죠.」
“내 말이.”
준은 기지개를 켜며 늑장을 부렸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 더 자고 싶었다. 숙취가 꽤 올라왔다. 제대로 진료를 할 수 있을까.
준이 침대에서 계속 뒤척이자 릴리가 가까이 날아오며 채근했다.
「아무튼 그만 뒹굴거리고 어서 일어나요! 지금 진료대기실에 난리가 났다구요.」
“난리가 났다니?”
준은 이상하다 싶었다. 이제 바스티엔 공자도 완치됐으니 누아 마을 진료소에 올 만한 환자는 볼카누스뿐이었는데.
「가서 직접 확인해 봐요. 모자란 잠은 제가 대신 자 드릴 테니. 빠잉~」
혀를 빼꼼 내민 릴리는 작은 수면등 아래에서 잠에 빠졌다.
어쩔 수 없이 준은 간단히 씻고 머리를 정돈한 다음 백의를 걸쳤다. 그렇게 문을 나서는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진료대기실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지? 설마 환자들인가?’
마치 시장에 온 것 같이 소란스러웠다. 한두 명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혹시 바스티엔 공자와 관련해서 일이 터진 걸까?
아니면 전염병?
그 어느 쪽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표정을 굳힌 준이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이참. 이 정도 상처는 그냥 씻고 가만히 둬도 금방 낫는다니까요?”
“무슨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게야? 강준 선생한테 진찰받기 전에는 못 간다! 이러다 내가 죽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깨끗한 칼로 살짝 벤 상처는 괜찮아요. 제가 소독하고 붕대로 감아 드릴 테니까 나중에 상처가 도지면 다시 오세요. 네에?”
“싫다! 선생 보고 갈 거다!”
“아저씨…….”
친하다는 건, 때론 번거로움을 동반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그네스는 울기 직전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진료대기실에 몰려 있었다.
누아 진료소는 언제나 한산한 편이었다. 굳이 손님이 온다면 길 잘못 든 강아지나 고양이가 전부였는데.
“아그네스.”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 그래도 지금 깨우러 갈 생각이었어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아그네스가 달려왔다. 그 뒤쪽에서는 하룬과 마리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환자를 살피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요. 전에 백작께서 다녀가시고 나서 소문이 쫙 퍼졌나 봐요. 우리 마을분들뿐만 아니라 근처 마을에서까지 환자분들이 오셨어요.”
“이런.”
준은 내심 아차 싶었다.
소문이 언젠가는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 줄은 몰랐던 것.
전에 마리를 치료해 줬을 때 이제 환자들이 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온 환자는 호프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받기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평판이 달라질 줄은.
‘사우던 가의 위상이 생각보다 높았던 건가? 하긴, 켈세타의 주인이니까. 전에 백작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할 걸 그랬어.’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누아 마을은 영구적으로 세금 5할 감면이라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영지의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오히려 그게 소문을 더 부추겼을 것이다.
준은 이마를 짚었다. 왠지 숙취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내려왔으니 일을 시작해야 했다.
“아그네스. 마리. 하룬. 다들 진료실로 모여라.”
진료실에 나란히 선 세 직원들은 이미 퇴근 직전에서나 볼 법한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들 진정해. 당황하지 말고. 환자들이 많다고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 숫자가 늘어났을 뿐이니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 한마디만으로 세 사람의 표정이 편해졌다. 준은 여유롭게 업무를 지시했다.
“아그네스와 마리는 위중한 순서대로 환자를 분류해. 그 순서대로 진찰을 해야겠다.”
“그럼 먼저 오신 분들이 뭐라고 하실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내일부터는 번호표를 만들자. 오늘만 양해 말씀을 드리고 진행해. 대신 문진을 철저히 해야 한다.”
“예. 알았어요.”
아그네스와 마리가 먼저 나가서 문진을 시작했다. 마리는 틈틈이 아그네스에게 치유술을 배웠는지, 제법 수습 티가 났다.
“그리고 하룬. 너는 진료실 질서 유지에 신경을 써라. 외지인들도 있으니까 방심하지 마. 소지품이나 이런 게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오, 그것만 하면 되나요?”
방금 전 아그네스와 실랑이를 벌이던 마을 어르신을 떠올린 준은 하나를 더했다.
“응급처치 키트 남은 거 창고에 있지?”
“잔뜩 있죠.”
“그거 꺼내다가 외상 환자들은 네가 키트로 치료를 해라. 방법은 알고 있지?”
“하하하! 선생님도 참.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죠. 저 자경단의 에이스 하룬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고 맡겨만 주시죠.”
“그래. 부탁한다.”
하룬이 창고로 뛰어 들어가 응급처치 키트를 한 아름 가져왔다.
그렇게 세 직원들이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준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진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진료를 준비했다.
‘이거, 아무래도 치유사 한 명을 더 구해야겠는데?’
원래는 아그네스를 잘 키워 내년에 시험을 치르게 한 다음 이곳에서 정식으로 일을 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늘 환자들이 많이 몰려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즉시전력감이 필요했다. 실력도, 붙임성도 어느 정도 있는.
아그네스가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 준비 끝나셨나요?”
“그래. 환자분 모셔와.”
준은 잠시 그 생각을 뒤로 미뤄야 했다.
첫 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준은 깜짝 놀랐다. 환자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준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호프만 씨.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켈세타 병원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그게 말이야…….”
그는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주점 겸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호프만이었다. 얼마 전 치료를 위해 켈세타로 떠났던.
호프만은 멋쩍게 웃으며 콧등을 긁적거렸다.
“치료는요?”
“그게…… 그쪽에서도 치료가 어렵다고 하더군. 그래서 다른 병원을 알아보던 차에 자네 소식을 들었어. 불치병에 걸린 백작가의 공자를 살려냈다며?”
“그렇긴 합니다만.”
“염치없지만 나도 다시 자네에게 치료를 받고 싶네. 요즘 증상이 심해지고 있어. 복통도 심하고, 다리도 너무 붓고 있고, 어지러워서 걷기가 힘들 정도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
“병세가 더 심해진 것 같군요.”
“미안하네. 한번 부탁함세.”
호프만은 두 손을 간절히 모아 부탁했다. 준은 되레 미소를 지었다.
더 늦기 전에 이렇게 찾아온 그가 고마웠다. 켈세타 병원을 택한 것도 이해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릴 수 있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아그네스. 스캐너 준비해.”
“예!”
아그네스가 이동식 수레에 스캐너를 싣고 왔다. 준은 호프만을 침상에 눕게 했다.
그런데 준은 의자에 앉지 않고 옆에 서기만 했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검사하셔야죠?”
“오늘은 네가 해.”
“제가요?”
팔짱을 낀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네스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기계를 켜고 작동했더라? 화면은 어떻게 읽어야 했지?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혼란스러울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어깨를 짚었다. 준의 손이었다. 긴장됐던 마음이 탁, 풀어졌다.
“지금까지 한 대로만 하면 돼. 전원 올리고 핸들부터 세팅해. 정제액은 내가 준비하지.”
“아, 감사합니다.”
정신을 차린 아그네스가 핸들을 쥐었다. 그새 준은 정제액 도포를 마친 상황이었다.
“아저씨. 그럼 검사 시작할게요.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오냐. 잘 부탁한다.”
아그네스는 조심스레 핸들의 끝을 호프만의 배에 올렸다. 곧 검은빛 유리판에 영상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는 핸들을 신중하게 움직였다. 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그녀는 병소를 찾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 이쪽이에요. 예전보다 조금 더 커진 거 같은데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아그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마리가 데려온 새로운 환자를 진찰하고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아그네스는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검사를 진행했다.
준이 기껏 마련해 준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고 싶진 않았다.
눈이 번뜩 뜨였다.
“병소가 예전보다 더 커졌어요. 이대로라면 금방 파열될 것 같아요. 술 담배는 끊으셨죠?”
“으, 으음. 그래. 아마도…….”
“설마 드신 거예요?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얼마나 드셨어요?”
“조금?”
아그네스는 핸들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병소 사진을 저장했다. 이 사진으로 준과 상의를 할 생각이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아그네스는 핸들을 치웠다.
“검사는 다 끝났어요. 자세한 건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게냐?”
“많이 안 좋았다면 여기까지 오시지도 못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여긴 어떤 환자가 와도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제야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호프만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아그네스. 검사는?”
때마침 다른 환자의 진료를 끝낸 준이 다가와 물었다. 아그네스는 검은빛 유리판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준에게 보여줬다.
“여기 보세요. 예전보다 더 부풀어 오른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한계에 도달한 것 같은데. 어때요?”
“그렇군.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곧 터질지도 모르겠어.”
“어떤 식으로 치료하실 거예요?”
“이것도 바스티엔 공자의 경우와 비슷한 방법으로 시술할 생각이다. 자세한 술식은 나중에 설명하지. 이것도 재료가 필요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준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 호프만에게 다가가 설명했다.
“입원을 하셔야겠습니다. 내일 바로 시술에 들어가야 하니 병실에서 충분히 안정을 취하세요.”
“알았네. 잘 부탁함세.”
“아그네스. 병실로 모시고 가.”
두 사람이 올라가자 준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쉴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역시 치유사를 한 명 더 구하는 게 좋겠어. 뭐 좋은 방법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