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치유사를 위한 최고의 보상
백작의 행차는 화려했다. 거기에 위엄까지 갖췄다.
켈세타 성의 정예 기사단원들이 총출동했고, 병사들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절도 있게 움직였다. 훈련이 정말 잘 되어 있었다.
은빛 플레이트 메일과 각종 철제 무구들이 햇빛에 번쩍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행차에는 기사와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백의를 걸치고 있는 치유사도 함께였다. 그는 사우던 가문의 주치의였는데, 제대로 치료가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동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기세를 올렸다.
“켈세타의 주인이신 드뇌르 백작께서 행차하셨다! 모두 예를 갖춰라!”
마당을 청소하던 아그네스와 마리는 허리를 굽혔다. 앞에서 길잡이 노릇을 하던 하룬은 재빨리 합류하더니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네아. 시술은 어떻게 됐어? 응?”
“쉿!”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룬이 영주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아그네스는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에 댔지만, 곧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하룬은 쾌재를 부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한편, 마차 안에서 창밖을 힐끔 살핀 세사르 공자가 보고했다.
“진료소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으음.”
곧 드뇌르 백작과 세사르 공자가 타고 있던 마차가 진료소 앞에 천천히 멈췄다.
종자가 재빨리 진료소와 마차를 잇는 푹신한 융단을 깔았다. 다른 시종이 마차 문을 열었고, 드뇌르 백작이 인상을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뭐야. 이런 낡아빠진 곳에서 네 형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거냐? 믿을 수가 없군!”
‘여기가 뭐 어때서요!’라는 반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그네스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얌전히 허리를 굽혀야 했다. 목숨은 하나였으니까. 마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부루퉁하다.
그래도 냉정하게 봤을 때, 진료소 건물은 낡았다. 거기에 15년 정도 방치되기까지 했으니.
진료소를 바라본 드뇌르 백작이 탄식을 내뱉었다. 살벌한 노기가 두 눈에 맺혔다. 곧 그 노기가 세사르 공자를 향했다.
“아들아.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보잘것없는 곳임에는 분명하나, 이곳의 치유사는 수준급의 마나 유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형님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가문의 위신이라는 게 있는데…….”
한숨을 내쉰 백작이 노기를 거두었다.
바스티엔 공자가 위급한 상황이었고, 여기에 있는 치유사가 신묘한 기술로 목숨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굳게 닫혀 있던 맏아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가문의 그 누가 나선다고 해도 치료를 거부해 왔던 바스티엔 공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트집을 잡는다는 것은 자신의 체면과 가문의 위신을 깎아 먹는 일밖에 안 된다.
드뇌르 백작의 성정은 거칠었지만, 그 정도 계산도 안 되는 위인은 아니었다.
“가자.”
백작이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들이 도열하며 근엄히 경례를 올렸고, 기사단장 사이먼은 재빨리 출입문과 내부를 확보했다.
때마침 2층 계단에서 바스티엔 공자와 준이 내려오고 있었다.
동생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있자 바스티엔이 깜짝 놀랐다.
“각하!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바스티엔!”
여러 감정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말도 없이 사냥 대열에서 이탈해 화도 났지만, 어쨌든 무사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들을 살펴본 드뇌르 백작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네가 정말 내 아들 바스티엔이 맞느냐?”
예전의 그 나약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혈색은 건강했고, 얼굴엔 당당함이 묻어났다. 살만 좀 더 붙는다면 딱이다.
드뇌르 백작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걸어오더니 맏아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늘 부어 있던 손도 정상이었다. 따뜻하기까지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응? 마치 새 사람이 된 것 같구나.”
“예. 새롭게 태어난 느낌입니다. 이젠 아픈 곳 없이 건강합니다.”
총명한 눈빛이 되돌아온 것을 확인한 백작이 안도했다.
그제야 드뇌르 백작의 관심이 준을 향했다. 준은 정중히 예를 갖추며 자신을 소개했다.
“누추한 곳으로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누아 마을의 치유사 강준입니다.”
준을 빤히 바라보던 드뇌르 백작이 밖에서 대기하던 가문의 주치의를 불렀다.
사우던 가문의 주치의는 ‘독이 든 성배’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자리였다. 지금까지 쫓겨나거나 벌을 받은 치유사만 스무 명이 넘었으니까.
도널드라는 이름을 가진 주치의가 재빨리 달려왔다. 드뇌르 백작이 지엄히 명했다.
“즉시, 신속하게 대공자의 상태를 확인하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도널드가 바스티엔 공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슴에 손을 댔다.
최상급 치유사는 아니었지만, 제법 마나의 색이 짙었다. 부유한 백작가의 주치의로 들어갈 정도면 저 정도 실력은 갖춰야 한다.
마나를 일으켜 심장 주변의 혈류를 감지하던 도널드가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지? 이건 말도 안 돼……!”
“뭐가 잘못된 것이냐?”
“아, 아닙니다. 다시 살피겠습니다.”
그는 더욱 마나를 강하게 일으켜 혈류를 정밀하게 탐색했다. 분명 심장 내부의 혈류를 어지럽히는 부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두 번, 세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난 걸까?
‘완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선명해질수록 도널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도널드!”
“예! 각하. 제 진단으로는…….”
차마 완치되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자신도 하지 못한 일을 이 궁벽한 마을의 치유사가 해냈다니. 믿을 수도 없었고, 이대로라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서슬 퍼런 백작의 눈을 본 그는 거짓을 고할 수가 없었다.
“공자님의 병이 완치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믿을 수 없게도 병소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목숨을 걸고 진실임을 고합니다.”
도널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자신은 해고당할 것이다. 아니, 그 정도로 처분이 끝난다면 다행이다. 전임 치유사들의 뒤를 따라 황천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드뇌르 백작은 기뻐하면서도,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수십 년간 가문을 어지럽힌 병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이야.
그때, 세사르 공자가 나섰다. 완치 판정을 확인한 사람 중 가장 기뻐한 사람이 그였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형님께서 건강해지셨으니 기쁜 일이 아닙니까? 가문의 경사지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사우던 가문은 법도를 중시하는 가문. 세간의 이목도 있으니, 이번 일을 책임진 저 치유사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드뇌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맏아들이 완치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둔 것도 있으나, 당사자에게 이번 처분을 맡겼다.
“바스티엔. 대공자인 네가 결정해라.”
“저는…….”
결정권이 자신에게 넘어왔다. 바스티엔 공자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소신을 밝혔다.
“이 선생에게 두 가지를 빚졌습니다. 목숨을 구한 것과 새 희망을 얻은 것. 이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한편 아그네스와 하룬, 그리고 마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어질 공자의 말을 기다렸다. 어마어마한 포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곧 바스티엔 공자가 말을 이었다.
“선생에게 준남작위를 수여하고 가문의 주치의로 삼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의 치유술이라면 가문 모두가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나와 비슷하구나.”
준남작은 영지의 준귀족으로, 봉토 대신 봉급을 받는다. 기사단장과 비슷한 급이었다. 그랬기에 몰래 숨어 있던 릴리가 ‘대박’을 외쳤다.
돌아선 드뇌르 백작이 준을 마주하며 위엄을 보였다.
“강준. 그대에게 준남작위를 수여하고, 사우던 가의 주치의로 임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상금 50골드를 내리겠다.”
“영광입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뭐라?”
곳곳에서 탄성이 들렸다.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매혹적인 포상이었다. 하지만 준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것을 거절했다.
그때,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아그네스 무리에 끼어들었다.
“흥! 내 저럴 줄 알았지. 하여간 전직 절대자 놈이라 그런지 온갖 폼은 다 잡는다니까.”
“어머, 볼카누스 씨. 언제 오셨어요?”
“방금.”
“그런데 전직 절대자라는 말씀은 뭐예요?”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볼카누스는 장난스러운 경멸을 준에게 보냈다.
준이 드뇌르 백작에게 정중히 청했다.
“치료의 대가는 서신으로 전달해 드린 게 전부입니다. 3골드만 주시면 됩니다.”
“고작 3골드만 받겠다고?”
드뇌르 백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내리는 작위와 포상을 거절한 가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것을 거절했다.
살 만큼 산 노인도 아니고 한창 젊은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욕심이 없다니?
“혹시 포상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이냐?”
“바스티엔 공자께서 미소를 되찾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의 웃음이야말로 치유사들에게 있어 최고의 보상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도널드 씨.”
“아, 그, 그렇지요. 하하하…….”
이 청년은 뭔가 다르다.
드뇌르 백작은 물론, 세사르 공자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진료를 받은 당사자인 바스티엔은 말할 것도 없었고.
“서기관.”
백작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우던 가의 서기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치료비를 지불하라.”
서기관이 금화 세 개를 준에게 건넸다. 준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금화로 볼카누스에게 맛있는 걸 대접할 생각이었다.
“덧붙여 하명한다. 앞으로 누아 마을이 납부해야 할 세금을 절반으로 줄여 주고, 이 진료소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가문의 역사에 기록하여 후대에 남겨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거기까지는 준도 거절할 수 없었다. 영주가 직접 내린 행정명령이었으니까.
드뇌르 백작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차창 너머로 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백작의 눈엔 여전히 흥미가 감돌았다.
곧 마부가 고삐를 쥐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제야 진료소 직원들도 허리를 펴고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표했다.
그 와중에 준이 세사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같이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형님과 같이 가겠소.”
“마침 잘됐군요. 전에 드셨던 스튜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오신 김에 같이 드시죠.”
세사르 공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강준 선생. 그간의 결례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나와 내 부하들이 선생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군요. 내 불찰이오.”
세사르 공자의 어투가 달라졌다. 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신뢰가 담겼다.
자신의 형에게 새 생명을 준 사람이다. 결코 가볍게 대할 수가 없었다. 준남작위를 거절했지만, 마음만큼은 준남작 그 이상이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꾸한 준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바스티엔 공자가 서 있었다.
두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모든 오해를 풀고 예전의 우애를 다시 확인한 두 형제는 격하게 포옹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
“고맙구나. 네 덕이다.”
그 훈훈한 모습을 뒤로한 채, 준은 식당으로 들어와 앞치마를 걸쳤다.
릴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나타났다.
「좀 아깝지 않아요? 준남작위 하나 정도는 달아 놓는 게 좋을 텐데.」
“마음만 먹으면 준남작이 뭐야? 만만한 왕국 가서 병 하나 딱 고쳐 주고 공작위도 얻을 수 있겠지. 잘하면 부마가 될 수도 있고.”
「하지도 않을 거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구!」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 하하하.”
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아공간 창고에서 재료를 하나둘 꺼냈다. 가장 중요한 재료인 가노데르마도 잊지 않았다.
통통통통!
경쾌한 칼질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준이 울린 소리는 그뿐이 아니었다. 바로 바스티엔 공자의 불치병이 완치되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
그 중심엔 준의 이름이 놓였다.
치유사 강준.
무명이었던 그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