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34화 (34/175)

34화 스튜에 얽힌 어떤 비밀

저 멀리 켈세타 성의 모습이 보였다.

사우던 가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거대한 성벽을 따라 병사들이 정자세를 취하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되겠구나. 네아, 마리…… 행복해라. 선생님은 행복하지 마시고요.”

한숨을 내쉰 하룬이 말에서 내렸다.

내리고 싶지 않아도 그래야 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하룬은 말을 조심스레 끌고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허름한 차림을 본 기사가 매섭게 몰아붙였다.

“무슨 일인가?”

“아, 저…….”

시퍼런 창날을 보니 다리가 벌벌 떨렸다. 식은땀도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자신도 언젠가 눈앞의 기사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더니 조금 용기가 생겼다.

하룬이 입을 열었다.

“흠흠. 전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온 하룬입니다. 세사르 공자님께 편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기사가 살짝 놀랐다. 동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스티엔 공자는 중환에 빠져 있었다. 외딴 숲에서 실신한 데다가 응급처치까지 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임종이 머지않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 영주와 소공자가 성 입구를 지키는 수하들에게 내린 명이 하나 있었다. 누아 마을의 진료소에서 소식이 오면 바로 알릴 것.

기사가 표정을 바꾸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바스티엔 공자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오?”

하룬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갑자기 어투가 조심스레 바뀌었으니까.

“공자께서는 건강히 잘 계십니다. 식사도 잘하고 계시고요.”

“후, 다행이군.”

기사가 돌아서 병사들에게 지엄히 명령했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온 분이다. 즉시 접객실로 안내해 드려라!”

“옛! 이쪽으로 오시죠.”

켈세타 성에 들어가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하룬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더욱 기분이 좋았던 건, 단순히 성안으로 들어가서가 아니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자신을 빈객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살다 살다 백작가의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캬! 역시 이 맛에 출세를 하는 건가? 선생님! 절 여기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충성충성! 아까 한 말은 잊어 주시고!’

방금 전까지 진료소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긴 하룬이었지만, 표정이 거만해졌다. 그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병사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하룬이 아니지.

“이봐요. 병사 아저씨. 접객실은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자, 이쪽으로.”

“아이고. 다리가 너무 아프네. 왜 이렇게 성이 크담?”

하룬은 병사의 뒤에서 은근 내색을 하며 시시덕거렸다.

그렇게 붉은 카펫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성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가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시녀들이 지나쳐갔다. 그 장면을 보며 하룬은 기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잠시 접었다.

‘역시 남자라면 영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목표를 세운 하룬의 눈에서 열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아그네스가 봤다면, 등짝이 남아나질 않았겠지만.

곧 거대한 접객실에서 병사가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지요. 머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오, 잘 부탁해요.”

하룬은 윙크를 보냈고, 꾸벅 고개를 숙인 병사가 물러났다. 안에는 시녀 두 명이 있었는데 아그네스보다는 덜 예뻤지만 미소와 향기에 백작가의 기품이 묻어나 있었다.

시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따뜻한 차 어떠셔요?”

“좋지!”

“어머. 화끈하셔라.”

생긋 웃은 시녀가 따뜻한 차와 쿠키를 준비했다.

평민인 데다가 산골 마을 출신인 하룬이 차의 묘미를 알 턱은 없었다. 굉장히 귀한 차였지만, 그는 물을 마시듯 후루룩 마셨다.

하룬이 다리를 꼬며 건방지게 물었다.

“몇 살이에요?”

“저요? 이제 열여섯이에요.”

“딱 좋네.”

“뭐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룬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그네스가 없었더라면 바로 작업에 들어갔을 텐데.

그때, 밖에서 문이 열리더니 남자 시종이 뛰어 들어왔다.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오셨습니까?”

“그런데요?”

“백작께서 찾으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예? 전 세사르 공자님을 만나러 왔는데…….”

“함께 계십니다. 자, 어서.”

시종은 굉장히 급해 보였다. 아무래도 드뇌르 백작이 닦달을 한 모양이었다. 하룬은 시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접객실을 나섰다.

‘이거 뭔가 일이 좀 커지고 있는 거 같은데?’

하룬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웅장한 출입문에 도착했다. 나무 테두리에 금빛으로 도금된 장식이 들어간 문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초로의 사내는 드뇌르 백작인 듯했고, 그 곁을 세사르 공자가 지키고 있었다.

“가까이 오라.”

쫄지 말자. 백작도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되뇌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살짝 숙여 백작에 대한 예를 차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 바이런이 충고해 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하룬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누아 마을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치유사께서 서신을 전해 드리라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가져오라.”

세사르 공자가 직접 서신을 받아 드뇌르 백작에게 건넸다. 백작은 나이프를 움직여 날렵히 봉투를 제거하고 편지지를 꺼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드뇌르 백작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료비 청구?”

“그, 그, 그렇습니다. 치료에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귀한 물건이라…….”

하룬은 평정심을 잃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백작의 위엄은 문지기 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줄 알았다.

감히 하늘 같은 영주에게 진료비를 청구하다니!

하지만 하룬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백작은 하룬에게 관심을 끄고 세사르 공자에게 대신 불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네 형의 병세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어. 병실 이용료, 약제비, 시술 재료비, 시술비. 이딴 것만 나열되어 있군. 푼돈이긴 하다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더냐?”

“그 치유사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때 결과를 확인하면 되겠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나 유저에다 보통이 아닌 자였다고요.”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안 그래도 내일 아침 누아 마을로 출발할 계획입니다. 가는 데 이틀 정도 걸리니, 도착하면 약조한 일주일이 모두 흘렀을 겁니다. 처분은 그때 결정하지요.”

“흐음.”

편지를 움켜쥔 드뇌르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서슬 퍼런 눈으로 하룬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세사르. 제1, 2기사단원들을 모두 데리고 가라. 우리 가문의 위엄을 보여 줄 때가 온 것 같구나.”

하룬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백작의 한마디에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나도 동행하겠다. 준비하도록.”

“예. 각하.”

세사르 공자가 아니라 드뇌르 백작까지 누아 마을에 온다고?

‘선생님! 제발! 꼭! 대공자님을 완치시켜야 합니다! 안 그러면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다 죽을 거라고요! 으악!’

백작이 앞에 있어 속으로만 간절히 외쳤다.

편지를 받아든 세사르 공자가 편지 말미에 적힌 준의 부탁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준은 몇 가지 부탁을 편지에 적었다.

그의 시선이 하룬을 향했다.

“이름이 하룬이라고 했나? 일단 숙소로 돌아가 쉬고 있어라. 곧 사람을 보내지.”

“넵. 알겠습니다!”

하룬은 시녀의 안내로 숙소로 돌아왔다.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평생 처음 먹어 보는 음식들로 배를 가득 채웠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은 법이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 젊은 기사가 숙소로 들어오더니 하룬을 기사단 본부로 데려갔다. 준이 편지 말미에 적은 대로, 하룬에게 기사단원들의 훈련 모습과 시설을 견학할 기회를 주었다.

하룬은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간 듯한 기분이었다.

“히야. 끝내주네요!”

휘황찬란한 갑옷과 무구, 그리고 기사들의 위용을 눈에 담은 하룬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바스티엔 공자의 시술이 끝나고 사흘이 흘렀다. 평소와 다를 거 없이 좋은 날이었지만, 약조했던 일주일이 모두 지나간 운명의 날이기도 했다.

잠에서 깬 바스티엔 공자는 버릇대로 손을 심장에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힘차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시술이 끝난 이후부터 준이 처방한 약을 먹었는데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기분만 변한 게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엔 건강한 혈색이 돌았고, 입술은 붉은빛을 띠었다. 피부도 예전보다 훨씬 깨끗해졌다.

‘정말 다 나은 건가?’

괴롭히던 증상들은 완전히 없어졌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 의문이 들었다. 그만큼 오래도록 지병과 싸워 왔으니까.

잠깐 괜찮다가 다시 아파지는 건 아닐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몸이 좋아지니 머리가 한층 맑아진 것 같았다.

바스티엔 공자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좀 조용하군. 곧 마당 청소를 할 시간일 텐데? 아, 이제 시작인가.’

얼마 전 경험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고, 밖에서는 소녀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

바스티엔 공자가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슬쩍 여니, 빗자루로 마당을 쓸기 시작한 아그네스와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부지런한 아이들이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하기에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몇 시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우연히 아그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그네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어 마리도 꾸벅 인사했다. 지금까지 늘 반복되어 왔던 장면이었는데, 딱 하나가 달랐다.

물끄러미 두 소녀를 바라보던 바스티엔 공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준 것.

진료소에 온 이후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아니,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첫 미소였다.

똑똑―

“들어오시오.”

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공자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음을 파악했다.

“좋은 아침이군요. 기분은 어떠십니까?”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어지러운 것도 없어졌지요. 숨이 차지도 않고. 이 모든 게 그대의 덕이오.”

시술이 성공한 이후, 바스티엔 공자는 준을 예우했다. 어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신분을 넘어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다행이군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했지만, 아직 몇몇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약을 꼬박꼬박 드셔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남았다는 것인지…….”

준은 차트를 훑어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래도록 심장에 이상이 있었기 때문에 혈관 등 주변 장기가 온전하지 않습니다. 약으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괜찮소.”

“아뇨. 아직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지실 겁니다.”

준의 말에 바스티엔 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먹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약을 먹어 왔으니까.

“선생.”

잠시 말을 끊고 활짝 웃은 바스티엔 공자. 곧 그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청했다.

“가능하다면, 전에 줬던 스튜를 다시 만들어 줄 수 있겠소?”

“하하하. 어려울 거 없지요. 아침 식사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질문 좀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스튜를 처음 드신 그날, 세사르 공자께서도 그 스튜를 먹어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미묘한 반응을 보이셨는데, 혹시 그 스튜에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 그거.”

바스티엔 공자는 잠시 주저했다.

“답하기 곤란하시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궁금증일 뿐이니까요.”

“우연이겠지만 선생이 만든 스튜가…… 옛날 내 모친께서 해 주셨던 스튜와 맛이 비슷했소. 달짝지근하면서도 떫은맛이 났지요. 그 얘길 하니 동생이 놀라더군요.”

“그건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준은 백의 주머니에서 약초를 하나 꺼냈다. 버섯처럼 생긴 주먹만 한 약재였다.

“이 약초의 이름은 가노데르마라고 합니다. 원기를 회복시키고 순환계에 좋은 작용을 하죠. 구하기 어려운 만큼 효과가 좋습니다. 아마 백작 부인께서는 공자님의 건강을 위해 매번 이 약재를 넣었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 그래서 비슷한 맛이 났겠지요.”

“그런…….”

준은 실하게 자란 가노데르마 한 뿌리를 바스티엔 공자에게 선물했다.

공자는 다소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밝아졌다. 레시피를 확인했으니, 이제 언제든 어머니의 스튜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선생에게 또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이군요.”

“영광입니다.”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때마침 드뇌르 백작과 세사르 공자가 타고 있는 마차가 진료소에 도착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