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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33화 (33/175)

33화 작은 기적

바스티엔 공자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인 것 같다. 손도 조그맣고, 어머니가 살아 있었으니까. 열이 나서 몸져누우면 어머니는 직접 스튜를 만들곤 했다.

― 어서 건강해져서 훌륭한 영주가 되어야지. 많은 영지민들이 널 사랑하고 있단다. 네가 태어났을 때, 모두가 축하를 해 주었지.

― 정말요?

― 그래. 사람들이 널 사랑한 만큼, 너도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껴야 한단다.

그때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치료를 받고 있었고, 나이가 들고 신체를 단련하면 잔병치레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병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호흡이 가빠오거나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가끔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컸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더울 때 그늘을 만들어 주던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으니까.

슬프고 아팠다.

문득, 임종 직전 남긴 어머니의 유언이 떠올랐다.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 잊히지 않았다.

― 너희 형제들이 서로 힘을 모아 우리 가문을 왕국의 명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구나. 다투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렴.

굳이 유언으로 남기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의 두뇌와 동생의 무력을 합친다면, 왕국의 명문세가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몸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주변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온갖 모략과 암투가 시작되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부하와 시종들이 발 벗고 나서 동생을 헐뜯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은연중 자신을 향한 위협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결국 독살을 당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까지 번지게 됐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버지인 드뇌르 백작이 이 모든 것을 방관하고만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중재를 해 준다면, 이런 시답잖은 다툼은 사라질 텐데.

며칠 전 사냥터에서 몰래 빠져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수하 기사가 잘못 쏜 화살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한 것이다. 동생이 이곳까지 찾아와 해명하지 않았더라면 오해는 영원히 풀리지 않았을 터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모든 가문 사람들이 동행한 사냥터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해도, 그런 공적인 자리에서 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심신이 나약해져 있다는 증거였다.

“……후우.”

바스티엔 공자가 눈을 떴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멈추진 않았는지, 자신이 저승에 온 건 아닌지 확인했다. 눈을 뜰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다행히 심장은 부드럽게, 천천히 뛰고 있었다. 치료를 결정하고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상태가 안정적이었다. 불규칙한 심박도, 호흡이 거친 것도 다소 나아졌다.

“정말 내 병이 치료될 수 있는 건가?”

왠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치유사들을 거쳐 온 그였다. 수십 년 동안 쌓인 의심과 불신이 이 정도로 쉽게 없어지기는 어려웠다.

한숨을 내쉰 바스티엔 공자는 몸을 일으켰다.

창가엔 어느새 아침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소녀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바스티엔 공자가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슬쩍 여니, 빗자루로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 아그네스와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우연히 아그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그네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어 마리도 꾸벅 인사했다. 물끄러미 두 소녀를 바라보던 바스티엔 공자는 인사를 받지 않고 커튼을 쳤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어머니의 한마디.

― 많은 영지민들이 널 사랑하고 있단다.

바스티엔 공자는 다시 커튼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두 소녀는 어느새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커튼에서 손을 떼었다.

문에서 노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오라.”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준이었다. 그는 손에 차트를 들고 있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좋다. 이곳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구나. 왕도의 장인이 만든 가구와 명공의 그림은 없지만 마음 놓고 쉬기엔 안성맞춤이야.”

“쉬시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준의 한마디에 바스티엔 공자가 눈매를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건강을 되찾으시면 영지로 돌아가서 큰일을 하셔야지요.”

“큰일…… 그건 동생에게 어울리는 일이겠지.”

“형제가 의기투합하여 가문의 이름을 떨친 경우는 의외로 많습니다. 알하라트 왕국의 쉬폰 후작가의 예가 그러하고, 모나크 왕국의 나이론 자작가가 그렇지요. 그 정도는 귀하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그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준의 확신에 찬 눈빛과 동생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동생은 말했다. 후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어머니의 유언대로 힘을 합쳐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자고.

“알겠다. 그대의 충언은 잊지 않겠다.”

“영광입니다.”

가까이 다가온 준은 오늘 있을 시술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허벅지 쪽의 혈관을 살짝 찢어 금속을 넣은 다음, 그것을 심장으로 유도해 병소를 막는다는 것이 설명의 요지였다.

살을 베고 혈관을 가른다는 말에도 바스티엔 공자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가 좋아지다 보니, 원래 갖고 있던 총기가 점점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따 모시러 오겠습니다. 송구하지만 오전 식사는 금식입니다.”

“알았다.”

준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갔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돌리게 만든 준의 충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나약한 군주 밑에는 교활하고 불행한 신민이 있을 뿐입니다.

그 한마디는, 여전히 강한 울림을 주고 있었다.

* * *

진료실로 내려온 준은 시술 준비 상황을 확인했다. 아그네스는 스캐너를, 마리는 시술에 쓰일 여러 도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그네스. 준비는?”

“끝났어요.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혈관 안으로 들어간 금속을 놓치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한다. 심장으로 제대로 이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잘 막혔는지 끝까지 확인해야 해.”

“네.”

아그네스는 긴장했지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 준이 술식을 알려준 후부터 계속 이미지트레이닝을 해 왔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이번 시술은 선생님이 마나로 이 금속을 심장까지 옮기는 거잖아요?”

“그렇지.”

“마나를 이용하지 않고 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을까, 없을까?”

준이 짓궂게 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장난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아그네스는 골똘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곧 그녀가 조심스레 추측했다.

“있을 거 같아요. 얇고 튼튼한 실 같은 걸 넣어서 심장에 도달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들기 굉장히 어렵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한번 방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 숙제다.”

“넵!”

준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라면 분명 답을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것은 치유사로서 큰 결점이지만, 이런 경우엔 큰 장점이 되기도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아그네스가 바스티엔 공자를 진료실로 데려왔다. 시술 준비가 끝난 침상은 마법이 걸려 있어 상당히 깨끗했다.

“이쪽에 잠시 누워 계세요.”

바스티엔 공자가 침상에 누웠고, 아그네스는 미리 준비한 약물을 가져왔다.

“시술 도중에 불쾌감이나 통증이 있을 수 있는데요. 이 약은 수면 효과가 있는데, 드시면 시술받으실 때 꽤 편해질 거예요.”

“됐다. 그냥 진행하도록.”

시술을 참관하던 수행기사들도 눈을 부라렸다. 그 속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스티엔 공자가 간섭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약은 그렇다 쳐도 대공자의 몸에 칼을 대는 거니까.

한편 아그네스는 난처한 눈으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여 약을 거두게 했다.

가까이 다가온 아그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칼을 대는 건데 아프진 않으실까요? 비명이라도 지르시면 저 기사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준은 찬장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커다란 독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아그네스가 살짝 놀랐다. 어디선가 많이 본 독침이었다.

“맞다. 이거 전에 고블린이 쐈던 독침 아니에요? 하룬이 맞았던 거요.”

“기억하고 있구나. 고블린 독은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약물이 된다. 희석시키면 일시적으로 마취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정말요? 신기하네요.”

“독을 잘 이용하면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지. 어떤 독은 잘 희석시켜 주사하면 얼굴에 난 주름을 펼 수도 있고.”

준은 독침에서 독을 채취한 후 약물에 희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둔 주사기에 약물을 가득 담았다.

아그네스는 눈에 힘을 주고 그 장면을 생생히 머릿속에 담았다.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곧 마취약 준비까지 끝나고, 준과 아그네스는 시술용 장갑을 꼈다.

준이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시작하라.”

“라이트.”

침상 위에 주먹만 한 광원이 떠올랐다. 허공에 빛이 떠 있어서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볼 수 있었다. 준은 마나를 흘려 빛의 밝기를 조절했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준은 마취약이 든 주사기로 시술 부위를 마취시켰다. 감각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준이 손을 뻗었고, 아그네스가 의료용 칼날을 쥐여 주었다.

스윽.

허벅지 쪽의 피부가 깔끔하게 절개되었고, 곧 준은 혈관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통증은 어떠십니까?”

“괜찮다. 계속하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준은 특수 칼날로 혈관에 살짝 상처를 냈다. 미리 마법을 걸어 둔 탓에 피가 울컥 쏟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살짝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 틈 사이로 성형한 드래곤의 비늘을 넣고 바로 지혈시켰다.

“스캐너.”

신호를 주자 아그네스가 스캐너를 작동시켰다. 준은 이미 마나를 흘리고 있었기에, 비늘은 혈류에 쓸려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니터에 찍힌 작은 점을 확인한 아그네스가 보고했다.

“금속 위치 확인됐어요.”

“좋아. 시작한다.”

준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심장 쪽으로. 아그네스도 그 움직임에 맞춰 스캐너를 따라 움직였다. 유리판에 움직이는 작은 점이 선명히 보였다.

드래곤의 비늘은 허벅지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점점 상체 쪽으로 이동했다.

준은 천천히,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곧 준의 손이 바스티엔 공자의 가슴에 다다랐다. 심장 혈관을 지나쳐 심장 안으로 비늘이 들어간 것이 스캐너 영상에 잡혔다.

“선생님. 환부에 도달한 것 같아요.”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볼카누스의 마나를 비늘에 천천히 주입했다. 유리창에 보이던 작은 점이 점점 커지며 심장에 난 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으윽.”

기묘한 느낌에 공자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기사들이 아니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소란 떨지 마라. 방해하는 자는 목을 치겠다.”

지엄한 명령에 기사들이 물러났고, 공자는 어금니를 깨물며 꾹 참았다.

곧 원래의 크기대로 펴진 볼카누스의 비늘이 구멍을 완전히 막았다. 준은 마나를 흘려 심장 조직과 비늘이 완벽하게 결합되도록 했다.

거기에 볼카누스의 마나를 더해 비늘이 심장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변성시켰다.

이제 시술이 모두 끝났다. 준은 한참 동안 검은빛 유리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볼카누스의 비늘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했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좋다. 편안하군.”

“시술은 모두 끝났습니다. 성공입니다. 공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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