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선의의 거짓말
페어리가 날개를 빠르게 파득거렸다. 놀랐을 때 하는 버릇이다.
「어떻게 열었어요?」
“내 마나를 한번 흘려 봤다. 혹시 녀석이 출입하는 게 가능하도록 해 놨을 수도 있으니까.”
「보기와는 달리 세심한 아재네요.」
“박살 나는 것보단 그게 편할 테니.”
그때, 동굴 안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뜩였다. 릴리가 다시금 깜짝 놀랐다.
「마스터! 하수인이 있나 봐요!」
“크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걸쭉한 울음이 동굴 안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준은 하수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 시뻘건 안광이 움직이더니 거대한 화염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 준이 물리쳤던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행동은 예전의 하수인과 완전 달랐다.
잡아먹을 듯 준을 내려다본 화염 늑대가 갑자기 배를 땅에 대고 얌전히 엎드린 것.
“멍멍!”
“그래. 착한 아이구나.”
준은 손을 뻗어 늑대의 목을 어루만졌다. 화염 늑대는 무서운 눈을 하면서도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혀까지 내밀면서.
릴리는 김빠진 표정으로 팝콘을 휙 던졌다.
「좋은 구경하나 싶었는데. 칫. 이 녀석 뭔가 늑대가 아닌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하하하하.”
왠지 다음에 올 때는 화염 늑대가 배를 까고 애교를 부릴 것 같았다.
준은 아공간 창고에서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꺼내 던져준 다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예전 그대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준과 릴리는 마법진에 올라 레어 내부로 이동했다.
안은 예전처럼 뜨겁지 않았다. 웅장한 것을 뺀다면, 평범한 동굴과 다를 게 없었다. 볼카누스의 몸이 안정화되면서 레어도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볼카누스는 레어의 안쪽에 마련된 안식처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엎드려 있었다.
― 음? 돌팔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기별도 없이.
“목 아프다니까.”
― 망할!
성질을 버럭 낸 볼카누스의 전신이 하얗게 빛났다. 곧 익숙한 인간 중년의 모습으로 준의 앞에 나타났다.
“됐냐?”
“내가 온 줄 알았으면 미리 좀 그렇게 하고 있어라. 손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네.”
“흥! 난 널 초대한 적도 없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다.”
“석 달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친구도 좀 만들고 그래야지. 레어에만 가만히 처박혀 있을 거야? 안 심심해?”
“알 게 뭐야?”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건강하다는 증거다. 피식 웃은 준은 가방을 열고 커다란 펜치를 꺼냈다.
물끄러미 그 장면을 지켜보던 볼카누스가 흠칫 놀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은 평범한 펜치가 아니었다. 생긴 것은 투박했지만, 재질이 범상치 않았다.
“어이. 동작 그만. 뭐냐? 그건.”
“오리할콘으로 만든 펜치.”
확실히 볼카누스도 오리할콘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신의 금속으로 만든 펜치로 뭘 하려는 걸까.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걸로 뭐 하게?”
“쫄지 마. 이걸론 사람 안 팬다. 아. 맞다. 너 사람 아니지?”
“…….”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비늘 하나만 뽑자.”
볼카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드래곤의 비늘은 굉장히 제한적인 용도로 사용된다. 썩지 않고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 갑주나 방패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인다.
그래서 물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게? 마족들도 없는 마당에 비늘로 만들 게 뭐 있나? 너라면 더 좋은 무구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놨을 텐데.”
“치료용으로 쓸 거다. 많이도 필요 없고 딱 한 장이면 돼.”
“뽑으면 아픈데.”
“어째 몸이 나아질수록 엄살이 늘어가는 것 같군. 안 아프게 뽑을 테니 걱정하지 마.”
“으음.”
잠시 고민하던 볼카누스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순간 그의 몸이 빛나더니, 원래의 거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준은 볼카누스의 배부터 꼬리까지 손으로 쓸어 만지며 적당한 비늘을 찾았다.
곧 꼬리의 가운데쯤 나 있는 작은 비늘 하나를 집었다.
“이게 좋겠군. 뽑는다?”
― 진짜 안 아프지?
“그래.”
― 진짜지?
“그렇다니까.”
미덥지 못한 시선을 외면한 준은 오리할콘 펜치로 비늘을 단단히 물었다. 그리고 마나를 일으켜 순식간에 비늘을 뽑아냈다.
쑤욱!
― 크아아아아악!
볼카누스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지진이 얼마나 심하게 일어났는지, 레어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질 정도였다. 벽과 땅에 균열이 생겼다.
― 이 돌팔이 새끼가! 안 아프다며?
“미안. 아프다고 하면 못하게 할 거 같아서. 지엄한 레드 드래곤 로드의 아량으로 용서해라.”
― 젠장! 망할! 돌팔이 새끼!
“화내지 말라니까 그러네? 고향으로 일찍 돌아가고 싶으면 주치의 말 새겨들어. 그럼 이만 간다. 쉬어라.”
준은 몸을 돌려 안식처를 빠져나왔다. 뒤쪽에서 온갖 저주와 험한 말들이 쏟아졌지만, 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진료소로 돌아오니 두 소녀가 격하게 환영했다.
그 답례로 준은 최고의 만찬을 제공했다. 향신료를 얹은 소고기 스테이크와 감자 샐러드는 냄새만 맡아도 위장이 요동칠 정도였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견습 치유사답게 입원해 있는 바스티엔 공자를 먼저 챙겼다. 소고기 스테이크 조금과 감자 샐러드를 챙겨 들고 병실로 올라갔다.
그사이, 홀로 남은 마리는 군침을 삼키며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배고프면 먼저 먹어.”
“아니에요. 언니 내려오면 같이 먹을래요.”
그러면서도 음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마리였다. 처음 사탕을 봤을 때의 그 눈빛과 무척 닮아서 준은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식당으로 다시 돌아온 아그네스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밖에 계신 수행기사님들 건 따로 안 챙겨도 되겠죠?”
“우리는 환자한테만 신경 쓰면 돼. 저녁 식사 정도야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넵!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아그네스는 소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입 안에 넣었다.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맛있어요! 와.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지?”
“저도요.”
소고기 한 점에 이렇게 행복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두 소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마리는 숨긴 마나가 내부에서 요동칠 정도였다. 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감자 샐러드를 한 입 먹었다. 구수한 감자와 각종 신선한 채소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소고기가 줄 수 있는 느끼함을 완벽히 없애 주는 최고의 사이드 메뉴였다.
아그네스가 고기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선생님. 혹시 요리사였어요? 어쩜 이렇게 음식을 잘하세요?”
“그냥 예전에 취미로 좀 했었지.”
“취미가 이 정도인데 마음먹고 하시면 장난 아니겠는데요? 왕궁 주방에 취직하셔도 되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
“나중에 저도 요리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그건 네가 초급 치유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 생각해 보마.”
그렇게 세 사람은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중엔 하룬이 말을 빌려 타고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역시 수행기사님들께 편지를 대신 전하는 게 나았을 것 같아요. 하룬 그 녀석, 왠지 공자님 앞에서 실수할 거 같아서요.”
“저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자리를 비우게 하면 의심을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번 켈세타행은 하룬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지.”
“부럽네요. 아, 나도 켈세타에 가고 싶다!”
“한 번도 안 가 봤어?”
“어렸을 때 몇 번 가 보고는 못 가 봤어요. 최근엔 몬스터들이 많아서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 주셨거든요.”
준은 언제 기회가 되면 켈세타의 병원을 견학시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참, 공자님 상태는?”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었어요. 음식 갖다 드렸을 때도 그냥 알겠다, 그 한마디만 하셨고요. 시술 때문에 좀 불안하신 건 아닐까요?”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다음에는 향신료를 좀 줄여야겠다는 판단했다.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귀한 향신료를 계속 쓰면 아그네스가 자신을 귀족이라고 더 의심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그네스의 나이프질이 조금 느려졌다.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병의 원인도 나왔고, 이제 나을 수 있다는 걸 아셨으니 좀 기뻐하셔도 괜찮을 텐데…… 역시 저희들을 믿지 못하시는 걸까요?”
“오래도록 아픈 환자들의 특징이야. 수많은 치유사들을 거쳐 왔다면 더더욱. 희망보다는 절망에 익숙해지지. 그러니까 더 신경 써서 보살펴야 한다.”
“네. 명심할게요.”
식사가 모두 끝나고 아그네스와 마리는 식기를 정리했다. 준은 바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볼카누스의 비늘을 책상 위로 꺼냈다.
이어 아공간 창고를 열었고, 그곳에서 가위 하나를 집었다.
전직 절대자의 창고에서 나온 만큼 보통의 가위는 아니었다. 가위의 손잡이는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졌고, 날의 재질은 오리할콘이었다.
준은 가위로 비늘을 자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드래곤 로드의 비늘이 종이 잘리듯 쉽게 잘려나갔다.
릴리가 모습을 드러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호, 이제야 알겠네. 그걸로 바스티엔 공자를 치료하려는 거군요?」
“맞아. 드래곤의 비늘이라면 어디에 심어도 변성 없이 잘 버틸 테니까. 마나 흡수율도 좋고.”
「역시 우리 마스터는 뇌섹남! 음, 근데 어떻게 집어넣으려고요? 좀 큰 거 같은데. 가슴에 칼 안 댄다고 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준이 잘라낸 비늘은 동전만 한 크기였다. 심장을 가르지 않고 그걸 병소에 심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다 방법이 있지.”
준은 경량화 마법을 응용해 잘린 비늘 조각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곧 비늘이 몸을 떨더니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늘은 콩보다 작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준이 불어넣은 마나를 거두니 비늘이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그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다.
일반적인 마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준은 자신의 마나가 아닌, 비늘의 주인인 볼카누스의 마나를 이용했던 것.
「옴마나. 이런 방법이?」
“예전에 내가 살던 세계에도 있던 기술이다. 형상기억 합금 기술을 응용한 거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거.”
준은 다시 비늘 조각을 작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손을 조각 위에 올리고 옆으로 움직였다.
스스슥.
손을 따라 조각이 움직였다. 마치 실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원하는 방향으로. 다음으로 준은 수조에 비늘을 넣고 똑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물속에서도 비늘 조각은 준의 뜻대로 조종됐다.
준은 마나를 일으켜 수조에 물결을 일으켰고, 그 실험에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그제야 준은 수조에서 비늘을 꺼내고 깨끗이 소독했다.
「이 기회에 사우던 백작가 장남의 불치병을 고친 불세출의 천재 치유사로 거듭나는 거예요. 또 알아요? 드뇌르 백작이 남작위라도 하사할지. 왕도에 소문이 나면 국왕의 주치의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만 해도 피곤하군.”
준은 책상을 정리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때마침 밖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힐끔 내다보니 사우던 가의 수행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세사르 공자의 명을 받들어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모닥불을 준비하고 있는지 장작더미가 보였다. 그런데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밤늦게 고생들 하네.”
「쟤들은 고생해도 싸요. 마스터한테 개겼으니까 벌 받는 거지.」
“저자들이 무슨 힘이 있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모닥불에 불길이 치솟았다. 수행기사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어쨌든 불이 켜졌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준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바스티엔 공자의 시술일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