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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31화 (31/175)

31화 다시 드래곤 레어로

준의 믿음직한 한마디에 바스티엔 공자는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공자의 표정은 예의 그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되돌아갔다. 말 그대로 희망은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모두가 그랬지. 나를 진찰한 모두가. 그들은 치료할 수 있다 말했고, 나중엔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개중엔 가문의 명예를 어지럽힌 죄로 참수를 당한 자들도 있었지.”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바스티엔 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치유사들을 만나 왔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고강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대범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치유사가 아니라 왕궁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그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군.”

“무릎을 꿇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목이 잘리는 건 더더욱.”

“그런 농담을 할 정도로 자신이 있나?”

바스티엔 공자의 목소리가 커지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그네스는 두 손을 가슴으로 모은 채 준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한가득이다. 준은 예의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수위가 아슬아슬했다.

준이 말했다.

“저희 진료소는 켈세타의 병원도 갖추지 못한 훌륭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양하기 좋은 곳이지요. 풍경도, 음식도, 민심도 모두 좋지요.”

“본인의 실력을 어필하지 않는군.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백 번 말하는 것보단 한 번 보여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시술은 3일 후 진행하도록 하지요. 어떠십니까?”

“시술을? 내 몸에 칼을 댄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화를 낼 법도 한데, 바스티엔 공자는 그러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침상에서 일어날 뿐.

“알겠다. 기다리지.”

“그럼 병의 원인과 시술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니. 됐다. 누구의 말처럼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 번의 결과를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바스티엔 공자는 점잖게 걸음을 옮기며 진료실을 나섰다. 문을 막 나서던 그가 멈춰서더니 몸을 돌렸다.

“강준. 아까 병실에서 했던 말, 그대의 진심이었나? 아니면…….”

“충언입니다.”

충언?

뜻밖의 대답에 바스티엔 공자가 준을 노려보았다. 한참 동안.

이윽고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는, 맛있게 먹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군.”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바스티엔 공자가 계단을 올랐다. 도대체 병실에서 무슨 말이 오갔던 걸까? 궁금했지만, 아그네스는 재빨리 공자에게 따라붙어 그를 병실까지 안내했다.

잠시 후 아그네스가 한숨을 돌리며 진료실로 돌아왔다.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이다.

“뭔가 태풍이 조용히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아직 안 끝났다. 공부해야지. 다들 모여라.”

준은 스캐너를 다시 켰다. 검은빛 유리판에 마나의 잔상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준은 막대기를 조작해 아까 저장했던 영상을 불러왔다.

아그네스는 물론, 하룬과 마리도 그 영상에 집중했다.

“아까 기억하라고 하신 화면이네요.”

“그래. 인간의 심장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있나?”

“피를 쥐어짜서 온몸으로 보내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두근두근 뛰는 거고요.”

아그네스가 할 대답을 하룬이 가로챘다. 아그네스는 다소 놀란 눈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마리도 마찬가지.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도 명색이 진료소 직원인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후훗.”

“하룬이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거니까 설명을 생략해도 되겠는데?”

“…….”

“하하하하.”

아그네스와 마리는 좋다며 웃었다. 하룬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진료소 사람들은 모두 준의 편이었다.

왠지 이 셋과 같이 있으면 농담을 하게 된다. 그만큼 편해진 것이리라.

준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심장 안에 흐르는 피는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룬이 얘기한 것처럼 피를 쥐어짜기 때문에 압력이 크지. 그런데 바스티엔 공자는 그 혈류에 문제가 있다.”

준이 손가락으로 심장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 부분을 심실이라고 하는데, 수축해서 심장 밖으로 피를 내보내는 곳이지. 정상적인 심장이라면 심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다.”

준은 그 분리되어 있는 곳에 찍힌 검은 음영을 가리켰다. 그리고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이 부분이 어떻게 보이지?”

“뭔가 뚫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혹시?”

“그래. 원래는 막혀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심실 중격에 구멍이 난 탓에 피가 새고 전체적인 혈류에 문제가 생기는 거다. 선천적인 병이야. 태어날 때부터 구멍이 나 있었던 거지.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막히기도 하는데, 잠깐 이쪽을 봐. 이렇게 판막 아래에 형성된 구멍은 거의 막히지 않아.”

“세상에…….”

병도 병이지만, 아그네스는 준이 만든 스캐너의 위력을 실감했다. 스캐너가 없었더라면 이 병의 원인은 결코 찾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준의 치유술과 마법공학 지식은 어느 경지에까지 올라간 걸까?

새삼스러운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럼 치료는 어떻게 해요? 뚫린 부분을 막는 게 쉽지 않아 보여요. 혹시 가슴을 열고 심장을 갈라서 직접 막아야 하나요?”

“그건 위험해. 더 쉽고 안전한 길이 있으니 그 방법을 쓸 생각이다.”

아그네스는 물론 하룬과 마리도 준을 바라보며 정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스캐너의 전원을 내렸다.

탁.

바스티엔 공자의 심장 영상이 유리판에서 사라졌다.

“어떤 방법이 쉽고 안전한지 각자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해. 맞춘 사람에겐 특별히 상품을 주지. 원하는 것으로. 기간은 내일까지.”

“네!”

아그네스와 하룬이 열의를 불태웠다. 아그네스는 또 다른 사탕 주머니를, 하룬은 기사단 입단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 옆에서 철없는 언니 오빠를 멀뚱히 바라보던 마리도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때, 아그네스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준에게 물었다.

“아, 맞다. 근데 선생님. 아까 병실에서 공자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충언이라고 하셨던 그거요.”

“별일 아니야.”

준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두꺼운 책을 펼쳤다.

* * *

다음 날 오후, 준은 직원들을 모두 진료실로 모았다.

“다들 시술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나?”

“예…….”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걸 보니, 다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아그네스가 손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구멍이 난 부분에 마나를 응축시켜서 막아 버리는 방법은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일시적인 방법이야. 영구적으로 막으려면 마나를 매개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막아 버리는 게 가장 좋지.”

“하지만 가슴을 열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방법이 있다.”

이어 하룬과 마리가 각자 생각한 바를 말했지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건 아그네스의 의견이었다. 준이 생각하는 것을 맞춘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떤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적당한 답을 찾진 못했지만, 너희들이 하루 동안 고민했던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그래도 아쉽네요. 다음엔 꼭 맞출 거예요. 또 퀴즈 내주실 거죠?”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이제 시술을 어떻게 하실 건지 설명해 주실 차례예요.”

“아직. 재료를 만들어야 해서.”

그렇게 대꾸한 준은 미리 써 놓은 편지를 하룬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싶어 하룬은 앞뒤를 살펴보았다. 밀봉된 편지였다.

준이 설명했다.

“사우던 가문으로 보내는 서한이다. 켈세타로 가서 세사르 공자에게 전해.”

“헐? 제가요?”

“그래. 가는 김에 성 구경도 좀 하고.”

하룬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켈세타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최근 몬스터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

문제는 세사르 공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자신은 작위도 없는 시골 마을의 평민이었다. 과연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아니, 애초에 만나 주기라도 할까?

“걱정하지 마. 바스티엔 공자가 여기에 머물고 있는 한 특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음식을 내준다면 꼭 먹고 와라. 필요하면 숙소도 달라고 하고.”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지 모르겠네요. 근데 이거, 무슨 내용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진료비 청구.”

하룬은 깜짝 놀랐다. 아니, 하룬만이 아니라 아그네스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누아 마을 진료소는 기본적으로 진료비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이 근방을 통치하는 영주에게 진료비를 청구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선생님! 제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해고해 주세요. 네? 선생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게요. 왜 절 죽이려고 하시는 겁니까? 네?”

“진료 행위에 대한 정당한 청구야. 널 어떻게 하진 않을 거다.”

“근데 얘 말도 일리는 있어요. 우리 진료소는 대가를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주잖아요? 공자님만 진료비를 청구하는 건 좀…….”

아그네스의 말은 타당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만 청구한다는 식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바스티엔 공자는 누아 마을 주민이 아니니까 받아야 한다. 이게 내 원칙이야. 무상 진료는 마을 주민들만. 앞으로도 진료소는 이렇게 운영할 생각이다. 전에 너희들이 그랬잖아?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고.”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럼 볼카누스 씨는요?”

“집이 뒷산에 있으니 마을 주민으로 쳐 주려고.”

“청구 비용은 얼맙니까?”

하룬이 조심스레 물었고, 준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3코퍼요? 에이, 뭐야. 시장에서 네아한테 사 준 머리핀보다도 못한 가격이잖아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준이 손가락을 내리지 않자 하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3실버?”

여전히 준의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았다. 하룬은 현기증을 느꼈다.

“3골드…….”

잘 나가는 기사들이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제야 준이 손가락을 내렸다.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시술에 들어가는 금속이 조금 특별한데, 그게 좀 비싸거든. 청구서에 설명을 해 놨으니 딴지는 안 걸 거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선생님. 제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시길…….”

하룬은 창백한 얼굴로 진료소를 나섰다. 그를 배웅하고 온 아그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쟤 괜찮을까요? 긴장해서 실수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편지에 따로 부탁했으니 손해는 아닐 거야. 세사르 공자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화로운 곳에서 며칠 묵었다 올 수 있을 거다. 운이 좋으면 드뇌르 백작을 만날 수도 있겠지.”

“정말요? 와, 그건 좀 부럽네. 그럼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준이 미리 준비해 둔 왕진용 가방을 들었다.

“잠시 나갔다 오마.”

“멀리 가세요?”

“아니. 금방 다녀올 거다. 저녁은 먹지 말고들 있어. 와서 맛있는 걸 해 줄게.”

뜻밖의 행운에 두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룬이 먼 길을 떠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 * *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약초라도 캐시게?」

“재료 구하러 간다. 아까 말했던 그 특수한 금속.”

「광맥이라도 파려는 거예요?」

릴리는 궁금했지만, 준은 뒷짐을 진 채 한가롭게 뒷산을 오를 뿐이었다.

가을 초입이라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물들어가고 있었다. 보름만 더 지나면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 같았다. 좋은 풍경이었다.

‘이제 위험한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을 테니 마을 주민들도 이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겠지.’

곧 준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예전에 한번 와 본 곳이었다. 높이 솟아오른 절벽. 예전에 주먹으로 박살을 냈었는데, 지금은 멀쩡히 복구되어 있었다.

「엥? 여긴 볼카누스 아재네 레어잖아요?」

“그 금속은 녀석에게 구해야 해서.”

「흐응, 도무지 감이 안 오네. 오리할콘이나 미스릴 정도는 마스터도 가지고 있잖아요.」

“그걸론 안 되니까.”

준은 주먹을 움켜쥐고 결계를 박살 내려고 했지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주먹을 폈다. 대신 절벽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렸다.

쿠구구구!

놀랍게도 바위로 된 절벽이 입을 쩍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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