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30화 (30/175)

30화 실력 있는 자의 여유

세사르 공자가 물러난 직후, 바이런이 진료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들이 행패를 부리지 않았나 살폈다.

마침 준이 설거지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왔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됐나? 다들 이쪽으로 몰려간 것 같던데.”

“보시다시피 아무 일 없었습니다. 애들도 미리 집으로 돌려보냈고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일단은.”

바이런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기사단이 누아 마을로 들이닥쳤을 때는 피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사르 공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준이 손짓으로 진료실 쪽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좋지.”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바이런은 진료실 의자에 앉아 탄식을 흘렸다.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최근 몬스터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마을에 평화가 오는가 싶었는데, 갑작스럽게 귀족가 사람들이 찾아와서 발칵 뒤집어 놨으니까.

차라리 몬스터들과 싸우는 게 훨씬 낫다. 이것저것 따지는 거 없이 그냥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은 그렇지 않다. 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어떤 사소한 일 하나로 뜻하지 않은 은원이 생긴다. 힘을 남용하면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게 세상의 이치다.

“자경단 쪽은 별일 없었습니까?”

“모두 무사하네. 몇몇 기사들이 시비를 걸긴 했지만 다들 잘 참아 줬어.”

“다행이군요.”

준은 찻잎을 뜨거운 물로 먼저 우린 다음 냉기 마법을 걸어 냉차(冷茶)를 만들었다. 얼마 전 시험 삼아 한번 이렇게 마셔 봤는데 맛이 썩 괜찮았다.

완성된 냉차를 바이런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 마침 시원한 게 당겼는데 잘됐군. 속에서 열불이 나서 말이야.”

“천천히 드십시오.”

준도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바이런을 살폈다. 조금 이따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됐지만, 그냥 나온 김에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자경단에서 나설 만한 문제는 아니지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문제라니. 어떤 건가?”

준은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의 어조는 평범했지만, 듣던 바이런은 하마터면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준은 그가 말을 더듬는 걸 처음 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세사르 공자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뒤에는 사우던 백작가라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경이 있다.

가문의 권세를 이용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이곳을 잿더미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가문의 체면이 걱정된다면 살수나 용병을 고용하면 그만이고.

“완치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차라리 손에 피를 묻히고 가는 쪽이 더 좋았겠어…… 젠장. 일이 쉽게 풀리나 싶었는데!”

“일이 쉽게 풀리고 있는 건 맞습니다.”

“무슨 소리야?”

“세사르 공자가 자신의 형을 처단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을 겁니다. 살인멸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바스티엔 공자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면 되는 겁니다. 이보다 더 깔끔한 결과가 있을까요?”

준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과연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에 바이런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이른 아침 볼카누스가 진료소로 찾아왔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이른 방문이었다.

문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도 아그네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가 혀를 찼다. 삶의 낙을 하나 빼앗긴 것 같은 느낌.

“망할! 그 귀족 꼬맹이 때문에 올 맛이 안 나는군.”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나이 먹으면 잠이 없어진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네.”

“개소리! 그냥 좀 일찍 와 봤다. 그런데 애들은 오늘도 안 나온 거냐? 설마 그 귀족 꼬맹이가 해코지를 한 건 아니겠지?”

“네가 너무 일찍 왔어. 이따 다들 나올 거다.”

그제야 볼카누스의 표정에서 불만이 사라졌다. 준은 그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볼카누스는 상의를 벗고 상처를 드러냈다. 아직 오염된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처음 준을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준이 손을 뻗어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좋은 정보를 하나 가져왔다.”

“뭔데?”

“고귀하신 볼카누스 님. 부디 무지몽매한 소인에게 자비를! 이라고 해 봐. 그럼 알려주지.”

“두 공자의 사이가 생각보다 좋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뭣!”

깜짝 놀란 볼카누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레 힘을 줘서 그런지 상처 부분에 통증이 느껴져 다시 침상에 누워야 했다.

준이 씨익 웃었다.

“흥분하지 마. 상처에 안 좋으니까. 특히 노령일 때는 혈압이 높아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거든.”

“시끄러! 근데 어떻게 알았냐?”

“그냥 느낌이 그래서 떠봤는데 덥석 물어줘서 고맙네. 하하하. 그럼 마저 이야기를 들어 볼까?”

“젠장! 망할!”

힘으로 안 되면 입으로라도 눌러야 하는데, 볼카누스는 늘 그에게 지는 쪽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두 공자는 같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지금은 죽었지만, 생전에 아이들을 잘 키웠나 보더군. 어려서부터 우애가 좋았다고 해. 최근에 가신들이 두 패로 나뉘어 밥그릇 싸움을 해서 그렇지 서로 어떻게 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한다.”

“흥미롭군.”

이미 준은 세사르 공자가 친형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친형이 무사하다고 했을 때 잠깐이나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런데 같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준은 직감적으로 어제 세사르 공자가 왜 스튜를 맛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어머니를 매개로 두 형제만 공유하고 있는 어떤 추억이 있겠지.

“근데 그런 정보는 어디서 구했어?”

“흥. 명색이 드래곤 로드인데 이 정도 정보력은 있어야지.”

“너무 돌아다니지 마라. 괜히 눈먼 칼 맞고 다칠 수도 있으니까.”

“잔소리는!”

치료를 모두 마친 준은 미리 만들어 놓은 약을 그에게 건넸다. 그때 뭔가 떠올랐는지 준은 아공간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 절대악 케이아스의 정수를 꺼냈다.

“받아.”

준이 던진 정수를 받아 든 볼카누스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정수와 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왜 나한테?”

“고향 갈 때 쓰라고. 생각해 봤는데, 몸이 치료된다고 해서 바로 힘을 되찾긴 어려울 테니까. 그걸 이용하면 좀 빨라지겠지.”

“그냥 받아도 되는 거냐?”

“정보 값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전리품은 나눠야지. 같이 싸웠는데.”

그제야 볼카누스는 정수를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왠지 쑥스러워 코를 긁적이기만 했다.

“크흠. 그럼 내일 보자고.”

“잘 가라.”

원래 기다렸다가 아그네스를 보고 가려고 했는데, 왠지 멋쩍은 느낌이라 일찍 진료소를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나타났다.

「이젠 퍼줄 게 없어서 케이아스의 정수까지 퍼줘요? 세상에.」

“무리해서 차원 이동을 시도하면 상처가 터질 수도 있다. 그걸 막으려고 준 거야. 일종의 의료 목적의 처방인 셈이지.”

「갖다 붙이는 건 참 잘해요. 그쵸?」

준이 말없이 정령 소환용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그것을 불면 프레어가 나타날 것을 잘 알고 있던 릴리는 모습을 감췄다.

곧이어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준은 세 직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현재 처한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하룬이 분통을 터트렸다.

“일주일이라니…… 허! 너무 멋대로 구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렇지. 목숨을 살려준 게 누군데 겁박을 합니까?”

하룬은 기분이 무척 나쁜 상태였다. 어제 자신이 믿고 따르던 스승이 사우던 가문의 기사단원들에게 얕잡아 보인 일 때문이었다.

자경단원들의 사기는 거의 바닥이었다.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눌려야 했기에.

아그네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바스티엔 공자님이 치료를 받지 않을 걸 아니까, 그걸 빌미로 우리를 궁지에 몰려고 하려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십니까? 귀족들이 하는 짓이야 다 뻔하잖아요. 이건 생트집이라고요.”

“모든 귀족들이 악한 건 아니다. 반대로 모든 평민들이 선한 것도 아니지.”

“방법이 있으시니까 그렇게 여유로우신 거죠?”

모두가 걱정했지만, 준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걱정이 사라졌다.

그라면 분명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마리의 병을 치료했던 그때처럼.

“잠시 공자를 만나고 오마. 다들 진찰 준비해.”

“예!”

마리는 깨끗이 세탁한 침대보를 가져와 교체했고, 아그네스는 스캐너를 준비했다. 하룬은 창고에서 슬라임 정제액을 가져왔다.

“언니. 이거요.”

“고마워.”

마리는 새 차트를 준비해 주었다. 차트를 한쪽에 내려놓은 아그네스는 스캐너의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

배터리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검은빛 유리판에 쏘아지며 영상을 띄웠다. 아그네스는 핸들을 잡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세 사람의 시선은 진료실 입구를 향해 있었다. 과연 준이 바스티엔 공자를 데리고 내려올 수 있을까? 모두 그런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 그 공자님, 완전 체념했잖아. 살고 싶다는 의지가 조금도 안 보였다고.”

“그래도 분명 해내실 거야. 선생님이니까.”

“그러면야 소원이 없겠는데…… 어?”

그때였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료실에 있던 세 직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바르게 섰다.

곧 준이 진료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그는 혼자였다. 힘이 탁 풀리는 듯했지만, 아그네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준이 옆으로 비켜서자 가려졌던 바스티엔 공자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공자님!”

“아니, 어떻게…….”

믿을 수 없게도 바스티엔 공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끌려온 게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직원들의 시선이 준을 향했다. 같은 질문을 띤 눈빛이었다. 대체 어떤 마술을 부린 거냐고. 어떻게 그의 마음을 돌린 거냐고.

준은 그저 웃을 뿐이다.

“아그네스. 진찰 준비는 끝났나?”

“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마리는 바스티엔 공자를 의자로 안내했고, 아그네스는 새 차트를 준에게 건넸다. 준은 펜을 들고 공자의 성명과 나이 등을 포함한 간단한 정보를 적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문진이 시작됐다.

“언제부터 편찮으셨던 겁니까?”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유감이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린 바스티엔 공자가 증상을 설명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짐없이 차트에 기록했다.

심부전, 호흡 곤란, 부종, 영양 상태 불량 등.

청취한 내용으로도 대강 준은 감을 잡았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웬만한 치유사들도 두 손을 들었다면 아마 구조적인 문제일 거야. 선천적인 기형…….’

고개를 끄덕인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이제 스캐너로 귀하의 심장을 검사할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바스티엔 공자가 침상에 누웠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스캐너를 바라보았고, 그때 아그네스가 상냥하게 검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공자의 불안감이 조금 잦아들었다.

“핸들.”

아그네스가 막대기에 슬라임 정제액을 듬뿍 발라 준에게 건넸다.

“조금 차가울 겁니다. 통증은 없으니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준이 막대를 심장에 댔다.

곧 흑빛 유리판에 선명한 영상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여 그 영상을 바라보는 그때, 준이 핸들의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다.”

준이 손가락으로 영상을 가리켰다.

아그네스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지만 도통 어디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준은 간단히 심장의 구조를 설명하며, 혈류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쪽을 잘 기억해 둬. 병소에 관한 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알겠어요.”

준은 교육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영상을 저장했다. 그때 바스티엔 공자가 나직이 물었다.

“병의 원인을 찾은 것 같은데…… 치료는?”

“현재 치유술의 수준으로는 치료가 어렵습니다. 수많은 치유사들이 포기한 것도 그 때문. 대부분 진단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아마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치유사는 대륙에 몇 없을 겁니다.”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치유사가 대륙에 몇 없다니. 바스티엔 공자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대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뇨. 그 몇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접니다. 귀하의 병은,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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