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마법의 스튜 (2)
“단장님!”
망루에서 경비를 보던 험멜이 두 손을 휘저었다. 표정을 굳힌 바이런은 재빨리 망루에 올랐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시선을 저 멀리 던졌다.
경험이 풍부한 바이런은 소리와 먼지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
“사우던 가의 기사단이다.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나! 괜히 나서지 마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험멜이 명령을 전달했고, 마을 입구를 지키던 자경단원들이 모두 무기를 거두었다. 곧 세사르 공자가 이끄는 기사단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정지!”
명령을 내린 세사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누구지?”
“누아 마을의 자경단장 바이런입니다.”
바이런이 능숙히 예를 올렸다.
이런 궁벽한 시골 마을에 기사의 예법을 정확하게 익힌 자가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세사르의 목소리는 급했다.
“묻겠다. 이 마을에서 외지인이 머물 만한 곳이 어디냐?”
“여관과 진료소 정도입니다.”
“진료소?”
세사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곧 그는 제2기사단장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기사단장 사이먼이 고개를 끄덕여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여관은 그렇다 치고 진료소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세사르가 재차 물었다.
“이런 촌구석에 진료소가 있다니 신기하군. 묻겠다. 최근 진료소에 외지인 환자가 온 적이 있나?”
“몇몇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사이먼 경! 지금 당장 부하들을 이끌고 여관으로 가시오!”
세사르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사이먼은 일부를 이끌고 여관으로 향했고, 세사르는 나머지를 이끌고 진료소로 질주했다.
그 기세가 실로 대단했다.
한가롭게 진료소로 향하던 레드 드래곤 로드 볼카누스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심드렁한 눈으로 몸을 돌린 그는 흠칫 놀랐다.
확실히 군마가 일으키는 소음은 이 평화로운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세사르가 이끄는 기사단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자신이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속도를 줄일 생각을 안 했다.
“쯧. 미개한 인간 놈들 같으니라고. 짓밟고 지나갈 기세로 달려오는군.”
평소였다면 브레스로 날려 버리거나 용언으로 목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러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참으라는 준의 충고가 떠올랐던 것.
후드드득!
덕분에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말들이 지나가며 일으킨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쿨럭! 쿨럭!”
볼카누스가 뒤뚱거리다 바닥에 넘어졌다. 드래곤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기사단의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볼카누스와 멀어졌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며칠 더 치료를 받더라도 저놈들을 씹어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건 안 돼. 미개한 인간 놈들 때문에 치료가 늦어지는 게 더 웃긴 일이지. 후우,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나는 고귀한 레드 드래곤 로드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옷을 턴 볼카누스는 다시 진료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진료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바탕 시끄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진료소의 문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온 기사 하나가 목청을 돋웠다.
“고귀하신 사우던 가문의 세사르 공자께서 행차하셨다!”
평소라면 아그네스나 하룬, 혹은 마리가 나서서 손님을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료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할 뿐이다.
인상을 찌푸린 기사가 재차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느냐!”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이곳은 진료소입니다. 환자분들이 요양하는 곳이죠.”
“뭐라?”
인상을 찌푸린 기사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의를 입고 있는 젊은 청년이 진료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준이었다.
“건방진 것. 어디 말대답을 하려고 하느냐? 죽고 싶은 게로군!”
세사르 공자는 뒤편에서 무심한 눈으로 기사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건수를 잡은 기사는 검을 꺼내더니 마나를 주입했다. 곧 검이 연푸른색을 띠며 오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보통이라면 오금을 저리며 주저앉아 목숨을 구걸했을 것이다.
하지만 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백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삼라만상을 초탈한 절대자의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어서 공자님께 예를 갖추지 못할까?”
“예라고 하셨습니까? 흥미롭군요.”
기사가 움찔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오러 소드를 보고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하물며 이런 시골 마을의 치유사가 이렇게 당당하게 굴다니.
준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오러 소드를 전개한 기사와 한 발자국 앞에까지 가까워졌다.
“바스티엔 공자께서 쉬고 계신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결례겠지요. 아닙니까?”
싱긋 웃은 준이 세사르 공자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백작가의 자제답게 눈썰미가 좋았다.
“검을 거두고 물러나라. 카론.”
“옛.”
시비를 걸던 기사가 오러 소드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이번엔 세사르 공자가 직접 나섰다.
“형님께서 이곳에 계신다고 했나?”
“2층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켈세타의 병원이 아니라 이곳 진료소에 계신다는 게 이상한데.”
준은 누아 마을 근방 숲에서 바스티엔 공자를 우연히 발견한 것과, 응급처치로 그를 살려낸 것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사실 별일 없었다고 얼버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바스티엔 공자의 행방일 테니까.
하지만 준은 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세사르 공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가.”
세사르 공자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아쉬움이 아닌 안도에 가까운 표정이다.
“어서 안내하라.”
“이쪽으로 오시죠.”
준이 앞장을 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세사르는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준은 함께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진료실로 내려왔다.
“뭐 하는 놈들이야?”
볼카누스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볼카누스는 인간계에서 수없이 유희를 즐겨 본 경험이 있었다. 준에게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강 어떻게 흘러가는 일인지 짐작했다.
“후계자 다툼인가.”
마음에 안 들면 처리한다. 그게 볼카누스의 사건 해결법이었다.
“그깟 작위가 뭐라고 그렇게 목숨들을 거는지! 쯧. 내가 다 황천길로 보내 줄까? 전직 신의 대리인은 고상하시니 손에 피를 안 묻힐 거고.”
“마나 쓰지 말라고 한 거 벌써 잊었나?”
“흥. 저런 벌레 같은 놈들은 그냥 밟아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됐어.”
준은 여느 때처럼 볼카누스의 상처에 치유 마법을 전개했다. 볼카누스는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어어. 시원하다. 근데 우리 아그네스는 어디 갔냐?”
“집에 보냈다.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잘했군.”
“언제부터 우리 아그네스냐?”
“내 맘이다.”
볼카누스는 친근하게 대하는 그녀가 썩 마음에 들었다. 견습생 나부랭이라는 말도 하지 않게 됐다.
아그네스를 보고 있으면 왠지 고향에 있는 자신의 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잠깐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안이 됐다.
‘조금만 더 있으면 드래곤의 성물을 주지 않을까?’, ‘아그네스 로또 맞았네’ 그런 식의 말을 릴리가 흥얼거릴 정도로 친해지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동생이 산골 마을까지 추격을 와서 나약한 형을 찔러 죽인다라…… 수도 없이 봐 온 뻔한 이야기군. 어쩜 인간들은 이렇게 한결같을까?”
“글쎄.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지.”
“엉? 두고 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때, 진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세사르 공자의 모습이 보였다. 준은 그의 의복을 확인했다. 역시나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치료를 받던 볼카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몸이 성했더라면 세사르 공자는 물론 뒤따르던 기사들은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준은 눈짓으로 진정하라고 전했다.
“마나 유저였나?”
세사르 공자는 조금 놀란 모양이다. 준은 여전히 볼카누스에게 치유 마법을 전개하고 있어,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먼저 오신 환자분이 계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치료가 끝납니다.”
준은 시선을 거두고 치료에 집중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세사르 공자보다 허름한 늙은이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기사 카론이 검집에 손을 대고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그 순간, 세사르가 손을 뻗었다.
“나서지 마라.”
“하지만……!”
“겁박이 통하는 자였다면 진즉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일단 기다려 보도록 하지.”
망나니일 줄 알았는데 제법 영리한 구석이 있었다. 준은 치료를 끝내고 약까지 모두 처방한 다음에야 세사르 공자를 상대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용건이 있으십니까?”
“형님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대의 뛰어난 의술이 형님의 목숨을 살렸더군. 사우던 가의 일원으로서 그대의 공을 치하하고 싶다.”
세사르 공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수행하던 종자가 손바닥만 한 가죽 주머니를 들고 왔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화가 가득 들어 있는 돈주머니였다. 세사르 공자가 턱짓하자 종자가 돈주머니를 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준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없습니다.”
“뭐라?”
“바스티엔 공자께서는 여전히 지병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병을 치료하지 못했는데 대가를 받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세사르 공자가 종자를 물렸다. 그리고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강준입니다.”
“강준.”
이름을 머릿속에 새긴 세사르 공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친형과는 달리 체격이 좋고 다부졌다. 검술이 꽤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에게 부탁 하나만 하지.”
“하명하시지요.”
“오늘 아침에 형님이 드신 스튜…… 혹시 남아 있는가? 한번 맛을 보고 싶구나.”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준은 세사르 공자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아그네스가 매일 청소를 해도 귀족들의 눈엔 못마땅한 곳이었다. 세사르 공자와 기사들은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준은 남은 스튜를 먹기 좋게 데워 그릇에 담아 세사르 공자의 앞에 놓았다.
스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사르 공자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 수행기사가 나섰다.
“공자님. 혹시 모르니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됐다.”
세사르 공자는 스튜를 한 입 흘려 넣었다.
한참 동안 스튜를 내려다보던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의미의 웃음인지 준은 궁금했다. 하지만 기다렸다. 곧 알 것 같았기에.
숟가락을 내려놓은 세사르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준. 그대라면 형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 전에 병명이 무엇인지 진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찰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완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대에게 명한다.”
동시에 기사들이 차려 자세를 취했다. 세사르 공자의 눈빛과 말투에 위엄이 담겼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형님을 설득해 병을 깨끗이 치료해라. 만약 실패한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대답은 필요 없었는지, 세사르 공자가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진료소를 나섰다.
소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진료소에 다시금 평온이 찾아왔다.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게 처먹었으면 곱게 나갈 것이지, 어디서 협박질이야? 어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요? 첫째 공자는 분명 진료 거부할 텐데.」
“방법은 있다.”
「오옷? 무슨 방법이요? 아니 웃지만 말고 좀 알려 달라고! 궁금하잖아요!」
“곧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세사르 공자가 왜 스튜를 찾은 걸까? 뭔가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
「배고파서 그랬나 보죠 뭐.」
준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세사르 공자가 왜 스튜를 청했는지, 그리고 왜 적극적으로 형의 치료에 관여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렇게 준은 설거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