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진료소-28화 (28/175)

28화 마법의 스튜 (1)

다음 날, 바이런이 새벽같이 진료소를 찾았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2층에 올라가 준을 깨울까 싶었지만, 진료실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은 진료실 안에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그는 장갑을 낀 채 복잡한 부속을 늘어놓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 전 진료기구를 만들다 폭발한 사건이 떠올랐고, 바이런이 슬쩍 인기척을 냈다.

“벌써 일어난 건가? 정말 부지런한 선생이군.”

“오셨군요.”

태연한 준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것은 바이런이었다. 준은 마치 자신이 올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바쁘지 않으면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나? 밖에 날씨가 꽤 쌀쌀해.”

“앉으시죠.”

바이런은 진료실의 문이 잘 닫힌 걸 확인하고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한편 준은 주전자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마나를 흘렸다. 순식간에 증기가 나며 물이 끓었다.

찬장을 열고 찻잎이 담긴 병을 꺼냈다.

아그네스가 만든 찻잎은 향이 풍부하고 좋았다. 준은 찻잔에 찻잎을 한 스푼 덜고, 거기에 말린 과일 조각을 하나 띄웠다.

그렇게 완성된 차를 바이런에게 건넸다.

“아그네스가 만든 찻잎이라 입에 맞으실 겁니다.”

“고맙네. 그런데 뭘 만들고 있었던 건가?”

“치료 보조기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바스티엔 공자의 상태도 그렇고, 제가 자리를 비울 때 위급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서 말이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이번에는 폭발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준은 소리 없이 웃으며 부속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그가 만들고 있던 것은 의료용 전기 충격기였다. 아그네스가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바이런이 본론을 꺼냈다.

“바스티엔 공자는?”

“특별한 문제 없이 잘 쉬고 계십니다. 며칠 이곳에 머물다 간다고 하는군요.”

“그래? 일이 복잡하게 꼬여 가는군.”

준의 시선이 바이런 쪽으로 움직였다. 그의 걱정이 더욱 깊어진 걸 보니, 하루 사이에 어디서 정보를 물어온 모양이다.

과연, 바이런은 그 내용을 꺼냈다.

“사람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알아봤네. 얼마 전에 드뇌르 백작이 가솔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왔다고 해. 꽤 규모가 큰 사냥이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도중에 이탈한 모양이군요. 기회가 많았을 테니.”

“지금쯤 드뇌르 백작의 기사들이 숲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거야. 우리 마을에 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걸세. 좋은 꼴은 못 보겠어.”

명망 있는 가문의 기사들은 기사도에 충실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득세한 경우는 그 반대가 많다.

찻물을 홀짝인 바이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공자의 상태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욕도 없더군요.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치료해도 문제, 하지 않아도 문제인 상황이라는 거지?”

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뇌르 백작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건재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인 세사르 공자의 입장이라면? 형이 빨리 죽기를 바라지 않을까?

“일단 본인은 진료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으음.”

바이런은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며 이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가늠했다.

하지만 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바스티엔 공자를 치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바스티엔 공자의 의지입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그가 치료를 받고 싶다면, 전 치료를 해 줄 생각입니다.”

“완치될 확률은?”

“제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왕국의 누가 오더라도 치료하지 못하겠지요.”

실력만을 놓고 볼 때 바이런은 준을 신뢰하고 있었다. 마리의 병을 치료한 것은 물론이고 중급 키트를 양산할 정도라면 대단한 실력이다.

그래도 그는 신중했다.

“자네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촌장님과 한번 의논을 해 볼 필요가 있겠어.”

“의미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아드님이신 단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준이 옅은 미소를 짓자 바이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곡을 찔렸던 것.

잠시 고민하던 그는 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좋아. 이번 일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맡기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게. 차 잘 마셨어.”

바이런이 진료소를 나섰다.

준은 다시 장갑을 끼고 의료용 전기 충격기 조립을 시작했다. 왕국 그 어디에도 없는 신기한 의료기구는 동이 틀 무렵 완성되었다.

릴리가 나타나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놀라운 업적! 마스터께서 월드 최초로 의료용 전기 충격기를 개발했습니다. ‘의술의 신’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뭐냐?”

「심심해서요. 요즘 시스템 메시지 없으면 재미없잖아요.」

이번엔 잠옷에 곰 인형을 들고 있었다. 그녀도 전용 아공간이 있는 걸까?

「이제 좋은 기계도 완성됐으니 그 싹퉁머리한테 한번 시험해 보죠!」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

「죽으면 다시 충격을 줘서 살리면 되잖아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준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아그네스가 쓰던 앞치마를 두르고 각종 식자재를 꺼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상자엔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 재료들이 신선하게 보존된다.

「웬일로 요리를 다 해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르지.”

「어? 마스터 기분 별로예요?」

“나 말고. 바스티엔 공자.”

바스티엔 공자가 치료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그때.

준은 절망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살았던 자신의 옛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 먹었던 따뜻한 야채죽이 생각났던 건 우연일까.

마스터의 슬픈 과거를 잘 알고 있던 릴리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귀족이면 온갖 산해진미를 다 쳐묵쳐묵할 텐데 뭐하러 품을 팔아요.」

“맛있는 음식과 정성이 담긴 음식은 다르거든.”

「이야. 철학자 납셨네. 왕립 학술원에 출강 한번 갑시다!」

“하하하.”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릴리는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준의 어깨에 앉아 요리를 구경했다.

탕탕탕탕!

식칼이 경쾌하게 도마를 때렸다. 준은 야채를 두툼하게 썰고, 남은 고기를 잘라 넣어 스튜를 만들었다. 거기에 원기 회복에 도움을 주는 약재를 몇 가지 섞었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비장의 향신료를 꺼내 살짝 뿌렸다.

향긋한 스튜의 향이 진료소를 가득 채웠다.

‘이 정도면 먹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준은 먹기 좋게 스튜를 그릇에 담아 2층으로 올라갔다. 바스티엔 공자가 머무는 방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공자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장하실 것 같아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편하게 드십시오.”

“희한한 자로군.”

바스티엔 공자가 몸을 반쯤 돌렸다. 그리고 준을 흘겨보았다.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나?”

“두려워해야 합니까?”

“보통은…… 그렇지.”

“치유사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건 손쓸 수 없는 병을 마주하는 일이겠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묘하게 여운이 남는 한마디를 남긴 채, 준은 스튜를 테이블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고소한 풍미가 병실에 퍼져 나갔다.

물끄러미 스튜를 보던 바스티엔 공자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천박한 스튜였지만, 자신의 처지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가 목제 숟가락을 쥐었다.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런 의심은 버려졌다. 자신을 해치려는 자가 응급처치로 구할 리는 없을 테니까.

숟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스티엔 공자의 입으로 뜨거운 스튜가 들어갔다.

스튜의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가만. 이 맛은…….”

공자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한참 동안, 바스티엔 공자는 멍한 눈으로 스튜를 바라보기만 했다.

* * *

식당으로 돌아온 준은 살짝 놀랐다.

입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두 소녀가 보였다. 둘 다 잠옷을 입고 있었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준이 나타나도 스튜만 바라보고 있다.

“배고프지?”

“엄청요. 대체 이 스튜는 뭐예요? 냄새가 너무 좋아서 잠에서 깼어요.”

“앉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아그네스와 마리가 재빨리 식탁에 앉았다.

평소에는 아그네스가 아침을 준비한다. 출퇴근을 할 때는 빵을 싸 왔고, 마리와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로는 직접 요리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만큼은 준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먹음직스러운 스튜가 한 그릇씩 놓였다.

“근데 선생님. 요리도 할 줄 아셨어요? 전 못하시는 줄 알고 매번 제가 했는데.”

준은 대답 대신 먹어 보라고 손짓했다.

뜨거운 스튜를 후후 분 아그네스가 감자와 고기를 곁들여 한입 삼켰다.

“아……!”

구수한 풍미가 혀를 자극했다. 고기도 적당히 익어 감칠맛을 더하고 있었다. 간은 완벽했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신료는 요리에 품격을 불어넣었다.

요리도 할 줄 아셨냐는 질문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맛있는 스튜였다.

두 소녀는 정신없이 스튜를 떠먹었다. 준이 따로 준비한 빵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아그네스는 여한이 없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선생님. 우리 식당도 같이 해 보는 건 어때요?”

“식당을?”

“아픈 사람은 없어도 배고픈 사람은 많잖아요.”

마리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가끔 요리를 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피식 웃은 준이 앞치마를 벗어 걸었다.

“됐고, 새로운 의료기구를 만들었는데 사용 방법을 설명해 줄 테니 준비하고 내려와.”

“어? 정말요?”

이미 준은 식당을 나가고 없었다.

“언니.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어서 가 보세요.”

“미안. 그럼 좀 부탁해.”

아그네스는 재빨리 씻고 의복을 갈아입은 뒤 진료실로 내려왔다. 웬일로 일찍 출근한 하룬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절망적이었다.

“새로운 의료기구라고요? 이런…… 어째 오늘 일찍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싶더니. 인간의 운명이란 참 가혹한 거네요.”

새로운 의료기구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이 있는 하룬이었다. 이번에도 실험체가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룬은 상의를 벗고 얌전히 침상에 누웠다.

준은 새로 만든 의료용 전기 충격기를 이동식 탁자에 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구성을 살펴보자. 이 기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전원을 공급하는 본체. 여길 봐. 이 본체엔 마나 배터리가 들어가는데 스캐너와 같은 거니까, 한쪽이 다 닳으면 바꿔 끼면 된다.”

아그네스는 열심히 필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다른 부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이건 본체와 패널을 연결하는 선. 마나가 흐르니까 끊어지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해. 그리고 이건 전기를 환자에게 쏘는 패널이고.”

“근데 전기를 환자에게 쏘면 아프지 않아요? 라이트닝 마법을 쓰는 것과 같잖아요. 다치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강하진 않아. 그리고 이게 충격 흡수에 도움을 줄 거다.”

준은 패널에 슬라임 정제액을 바르고 서로 비볐다. 그리고 패널을 하룬의 가슴에 붙였다. 방심하던 하룬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정제한 거라 살이 녹진 않으니 놀라지 마라.”

“그 정도는 이제 저도 알고 있다고요! 차가워서 그런 겁니다! 차가워서! 말 좀 하고 대면 어디 덧납니까?”

“자, 그럼 다음 단계로.”

“웃!”

준이 본체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가 충전되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기묘한 소리에 하룬이 벌벌 떨었다.

“이렇게 패널을 가슴에 대고, 끝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마나가 전기로 바뀌어 충격이 가해진다. 운이 좋으면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지.”

“운이 좋아야 해요?”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거든. 특히 시간이 오래 지나면 심장을 뛰게 한다고 해도 깨어나지 못하지. 식물인간 상태가 돼.”

메모를 다 끝낸 아그네스가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이제 버튼을 눌러 볼까요?”

“야!”

“농담이야. 호호호.”

피식 웃은 준은 패널을 떼고 기계를 정리했다. 짓궂게 장난을 치긴 했어도 아그네스는 수건으로 하룬의 가슴을 깨끗이 닦아 주었다.

준이 마무리를 했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아직은 없어요. 이것도 스캐너처럼 실제로 써 보면서 경험을 쌓아야 할 것 같아요.”

“경험을 쌓는 것도 좋지만, 이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 자세도 중요하다는 거 잊지 마.”

“그럼 이런 거 만들 필요 없는 거 아녜요?”

“이 기계를 쓸 필요가 없도록 환자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야. 기계나 마법에 의존하게 되면 방심하게 되고,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명심해.”

“네, 명심할게요.”

그 무렵, 누아 마을 근방의 숲길에 흙먼지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사우던 가의 제2기사단이 누아 마을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보고했다.

“공자님! 곧 마을입니다!”

“좋아. 모두 속도를 올려라!”

세사르 공자가 거칠게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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